47화. 마주 닿은 손끝을 통해
“그게 무슨….”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던 손가락에 홀려서 정신을 놓은 사이 그녀의 쇄골 사이에는 붉은 물방울 모양의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그는 직접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이번 선물은 특별하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녀가 마지막에 뜯어보지도 않고 그에게 돌려준 그 선물상자에서 나온 보석인 듯싶었다.
“당신 머리카락 색과 가장 비슷한 걸 구하느라 애를 썼지. 엘리시아를 다 뒤져도 같은 색은 없더군. 그래도 그중 가장 비슷한 색이야.”
리아는 그가 걸어준 목걸이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섬세하게 세공된 물방울 모양 보석이 쇄골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루비인가요?”
그 붉은빛에 홀린 리아가 물었다.
“아니, 붉은 다이아몬드야. 그걸 구하느라 매튜가 몹시 힘들었다고 하더군.”
리아도 보석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보석 모델도 여러 차례 했었고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다. 루비보다 다이아몬드가 비싸고 일반 다이아몬드보다 색채 다이아몬드는 최소 몇십 배 이상 가격이 더 나간다고 들었다. 특히나 귀한 빛깔일수록 더더욱.
이곳의 사정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매튜가 이 보석을 구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귀한 것일 것이니라. 그래서 다 똑같은 보석이라는 말에 그렇게 펄쩍 뛰었는지도 모른다.
“고, 고마워요.”
리아가 붉은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리며 감사 인사를 하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더니 자신과 마주 보도록 돌려세웠다.
“감사 인사를 하긴 아직 이르지. 그게 끝이 아니야.”
라이언의 입꼬리는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리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또 뭔가가 더 있다는 말일까?
“생각해 보니 우린 결혼반지도 나눠 끼지 않았더군.”
그의 말에 리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레오니가 기억하고 있는 그와의 결혼식을.
간단하게 혼인서약만으로 순식간에 끝이 나버린 결혼.
“반지라면 벌써 많이 받았어요.”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자 리아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지난 기억 속 그의 행동은 별로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가여운 레오니가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기에 그의 표정까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그중 그 어느 것도 결혼반지는 아니지 않소.”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것도 물론 결혼반지는 아니죠.”
“그런가?”
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고 반지를 안 받겠다는 건 아니었다. 레오니의 기억 속에 남겨진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얄미웠을 뿐.
가슴 앞으로 내민 그녀의 손을 보고 그가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말했다.
“공작님께서 결혼반지라고 하시면 그게 결혼반지겠죠. 뭐 3년이나 늦었지만, 어차피 늦은 거 어쩌겠어요.”
리아의 빈정거림에 그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당신한테 반지 따윈 받지 못했는데. 그건 잊었나 보군.”
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 레오니 역시 그에게 반지 같은 건 선물하지 않았었다. 피차일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네요. 그럼 뭐 피차일반이니 따지는 건 그만하죠.”
“하.”
“그러지 말고 준비한 반지를 빨리 끼워 주시겠어요? 배가 몹시 고파서요.”
당돌한 리아의 말에 라이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더니 주머니에서 반지 두 개를 꺼냈다.
“당신이 미처 준비하지 못할 것 같아. 내가 내 것까지 함께 준비했소.”
그의 손바닥 위에는 백금 반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라이언의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반지는 아무 장식이 없는 단순한 반지였고, 리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지는 몹시 화려했다.
그는 반지 하나를 리아의 오른손에 쥐여주고는 다시 나머지 하나를 집어 들어 여전히 자신의 가슴 앞에 내밀어져 있는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끼워 넣었다.
목걸이와 똑같은 붉은 다이아몬드였다. 이번에는 조금 옅은 색이었고, 주변에는 수십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너무 화려하고 눈이 부셨다. 그가 반지를 손가락 끝까지 끼워 주는 순간, 리아는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진정한 결혼을 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 것도 끼워 줘야 하지 않겠소?”
리아는 고인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리고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그가 반지를 쥐여줬던 오른손을 펼쳤다. 그녀의 화려한 반지와 대비되어 그의 반지는 너무도 단출 했다.
“너무 단순한 거 아니에요?”
“장식이 달린 건 검을 잡기 불편해.”
단순하고도 아주 중요한 이유였다. 그는 검을 다루는 기사였다.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반지를 집어 들었다.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혼반지를 직접 그에게 끼워 준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그의 손가락 끝에 반지 구멍을 맞췄다.
가만히 들여다본 그의 손은 생각보다 더 크고 거칠었다. 오랜 시간 검을 잡아 온 손은 두툼하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으며 매우 차가웠다. 왼손으로 그의 손바닥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그의 손끝에서 반지를 짚고 서 있는 그녀는 순간 수많은 생각이 교차되었다.
그가 이 손으로 지금껏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그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열망이. 그와 마주 닿은 손끝을 통해 그녀에게로 쉼 없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욕망에 몸부림쳤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그가 궁금했다.
“리아.”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흔들어 깨운 것은 그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아픈가?”
재차 이어지는 그의 말에 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아픈 곳은 없어요. 그냥 우리의 결혼식이 생각이 나서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군.”
“그러게요. 결혼식을 떠올리면 즐거워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네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눈을 바로 봤다.
“그럼 이건 어때요?”
“말해 봐.”
그녀와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었다. 이토록 검은 눈이 있을까? 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의 눈은 그대로였다.
“오늘이. 그러니까 반지를 나눠 낀 지금이 우리의 진정한 결혼식이라고 생각하면 어때요?”
“나를 유혹하는군.”
“네?”
“좋아. 당신 말대로 하지. 나도 이전에 기억은 별로 유쾌하지 못하니까.”
말을 마친 그가 빨리 반지를 끝까지 끼워 넣으라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리아는 긴장감에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손끝에 달랑거리는 반지는 아주 천천히 손가락 안쪽까지 올라갔다. 좀 더 빨리 끼우고 싶었지만, 그의 손에 딱 맞는 반지는 그녀가 밀어 넣는 대로 천천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와 마주 닿은 모든 부분이 뜨거웠다. 고개 숙인 그녀의 정수리 끝에 닿는 그의 숨결도 역시 뜨거웠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 가장 안쪽까지 반지가 자기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자 그녀는 ‘후’ 하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그 ‘훗’ 하고 웃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반지를 끼워 준다는 것이 이토록 감미로운 일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군.”
그건 리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얽혀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리아의 얼굴이 그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올라갔다.
“결혼식이라면 모름지기 서약의 키스는 해야 하지 않나? 난 그런 거로 알고 있는데?”
“그, 그건….”
리아의 뒷말은 결국 끝을 맺지 못하고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술 끝에 살짝 닿았던 그의 숨결은 이내 벌어진 그녀의 입안으로 훅하고 밀려들었다. 리아는 그의 열기에 쓰러질 것만 같아 손을 뻗어 그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그는 흔들리는 리아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의 바로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와 그녀의 온몸이 마주 닿았다.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맛보며 놓아주지 않았고, 리아도 그에게 온몸을 기대며 매달렸다. 서약의 키스는 달콤했고, 쉽게 끝내기에는 너무 유혹적이었다.
그런 그들을 일깨운 것은 문밖의 소란이었다.
라이언은 목 안으로 끙 소리를 삼키며 힘겹게 리아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여전히 몽롱한 정신의 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밖에서 우릴 기다리는군.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가는 제임스와 페넬로페가 방까지 찾아올 판이었다. 문밖에서는 메리와 존이 서로 먼저 문을 두드리라며 언쟁을 하고 있었다.
리아는 서둘러 거울을 보고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곤 화장대에서 립스틱을 찾아 다시 발랐다. 그녀가 립스틱을 내려놓고 돌아서자 그가 문을 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깐!”
리아는 그를 만류하며 빠르게 그의 앞으로 가서 섰다.
“미안하지만 잠시만 고개를 숙여 주시겠어요?”
그의 입가에 그녀의 립스틱이 조금 묻어있었다.
“오늘은 우리 메리가 좀 화려한 걸 추구하다 보니… 제 화장이 좀 진했네요.”
리아는 웃으면서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좋아요. 이제 완벽해요. 가여운 메리와 존이 싸움을 멈추도록 그만 나가 볼까요?”
그의 옷깃을 툭툭 털며 그녀가 말하자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제대로 손을 잡아 볼까?”
그와 낮에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어쩌면 좋을까? 그녀는 점점 더 그가 좋아졌다. 그가 툭 하고 던지는 한마디가 좋았고, 무심한 듯 챙겨주는 그의 행동이 좋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는데 현실은 반대였다. 그녀는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리아는 궁금해졌다. 그의 속마음이. 그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일까? 이 순간이 떨리고, 두근거릴까?
그녀는 그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가 끼워 준 반지가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녀가 손을 잡자 그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이 우리의 결혼식이면, 첫날밤을 기대해도 되겠지?”
놀란 그녀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방문을 열어 재꼈다. 그녀의 심장이 다시 멈출 줄을 모르고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