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여관에서 보내는 하룻밤
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베드포드 성에서 렌포드까지 3분의 2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여관이었다.
“아휴… 드디어 도착했나 봐요.”
메리가 어두워진 창밖을 쳐다보며 리아에게 말했다. 그 순간 마차의 문이 빠르게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라이언이 서 있었다.
“드디어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소. 내리시오. 부인.”
불쑥 마차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을 리아는 툭 하고 쳐냈다.
“비켜 주실래요? 입구가 좁아서.”
여전히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티를 팍팍 태며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 여관으로 직행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도 뭐가 좋은지 웃으며 뒤를 따랐다.
공작 부부의 방문을 환영하듯 여관은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나온 여관주인의 벅찬 환영사를 들으며 그들은 예약해 놓은 2층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때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라이언! 드디어 자네를 만나는군. 정말 나한테 이러고도 멀쩡할 줄 싶은가!”
제임스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페넬로페의 모습이 보였다.
“오라버니! 저를 따돌리실 생각이신 거예요? 어쩜 이러실 수가 있어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서로에게 지칠 대로 지친 두 남매는 그 분노를 라이언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계단 중간에 멈춰선 라이언이 그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만에 만난 남매가 회포를 풀기에 마차만큼 적당한 장소가 또 있겠나. 둘이 다시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아 내 기분도 좋군. 그럼 다들 짐을 풀고 저녁 식사 때 만나지. 지금 아내가 몹시 피곤해서 말이야.”
그는 황당함에 입이 벌어진 두 사람을 뒤로하고 리아의 등을 감싸며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사이가 좋아져요?”
리아가 고개를 돌려 계단 밑에서 씩씩대고 있는 제임스와 페넬로페를 살피며 라이언에게 물었다.
“남매가 다 그렇지 뭐.”
“화난 것 같은데요?”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라오.”
그는 단호한 손길로 리아의 고개를 앞으로 돌려놓으며 주인의 안내를 따라 그들이 묵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리와 존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옷장에 저녁 식사에 입을 옷과 오늘 밤 입고 잘 잠옷을 나란히 챙겨놓고 나갔다.
“그들을 어떻게 따돌린 거죠?”
조용해진 방 안에서 리아가 입을 열었다.
“따돌린 건 아니오.”
“그럼요?”
“그냥, 마차를 한 시간 있다가 보냈소.”
비슷하게 출발하면 금방 따라올 사람들이었다. 지난밤은 페넬로페가 우겨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집에 가서 자긴 했지만, 제임스는 페넬로페와 단둘이 있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페넬로페는 너무 불평이 많고 까다로웠고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사이좋은 남매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야 제임스에게 욕을 한번 먹고 끝내는 편이 좋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했는데 우리랑 똑같이 도착했다고요?”
하긴 생각해 보니 페넬로페를 알게 된 이후로 오늘처럼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오늘 저녁 시간이 두려워지네요.”
리아가 침대에 털썩하고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건 라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그를 어려워하지 않는 세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
저녁뿐만 아니라 렌포드 여행 자체가 그에게는 곤욕이었다. 이 모든 것은 서로를 다정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두 사람을 보고 생각 없이 건넨 매튜의 편지 탓이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의 어설픈 질투 탓에 제임스와 페넬로페라는 원치 않는 혹이 달라붙었다. 아내와 둘만 있을 때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런데 뭐? 질투?’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 놀란 라이언이 아내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모르는지 그녀는 걸쳐 앉았던 몸을 뒤로 눕혔다. 풀썩하고 침대가 눌리면서 머리카락이 얼굴 주변을 간질이듯 나풀거렸다. 어느새 갈아 신은 슬리퍼는 까닥이는 발끝에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문밖에 성난 친구 한 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힐 만큼.
‘그래서 그게 질투였나? 그래 뭐 좋아. 질투라고 해 두지. 우선은.’
라이언도 그녀의 옆으로 가서 그녀와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바로 옆에 닿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역시도 간질이고 있었다.
“뭐예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봤다.
“그냥. 좀 피곤하군.”
라이언은 리아의 손을 잡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기요? 공작님.”
그는 답이 없었다.
“라이언!”
이번엔 그녀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저녁 먹기 전까지 이대로 있고 싶군.”
그가 잡은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리아는 그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여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뭐 잠깐만 이대로 있자. 아주 잠깐만.’
리아도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마님, 일어나 보세요.”
곤히 잠든 리아를 깨운 것은 메리였다. 창밖은 어두워졌고 그녀의 옆에 라이언은 없었다.
“옷을 갈아입으셔야 할 시간이에요.”
애써 몸을 일으킨 리아의 앞에는 메리가 드레스를 들고 서 있었다.
“몇 시지?”
누군가 누워 있었던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 라이언에 대한 질문을 안으로 삼킨 리아는 그가 누워 있었던 것을 표시 내며 움푹 패 있는 베개를 툭툭 치며 메리를 향해 물었다. 눈을 떴을 때 그가 사라지고 없는 일은 이제 익숙했다. 그래도 오늘은 흔적은 남겨두었으니 그와 함께 잠들었던 것이 꿈인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나가 보셔야 해요.”
메리가 문밖을 쳐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여관방이라 그런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벌써?”
잠깐 누워 있으려고 한 것인데, 순식간에 1시간이나 훌쩍 지나버렸다. 리아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메리는 숙련된 조교처럼 서둘러 리아의 치장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마님….”
메리가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렸다.
“왜? 말을 해 봐.”
“그게… 어째서 보석은 착용하지 않으시는지….”
“보석?”
흔들리는 메리의 눈빛이 허전한 리아의 가슴 쪽에 가 있었다. 한껏 모아 올린 가슴 사이는 매우 휑하게 비어있었다.
“아… 그거….”
한두 개 정도는 가져올 걸 그랬나? 리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보석은 모아뒀다가 나중에 한밑천 삼을 요량으로 잘 챙겨두고 가져오지 않았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 현물재산은 많을수록 좋았다.
어차피 쇼핑의 도시 렌포드에서 두꺼운 백지수표가 얇아질 때까지 쇼핑, 또 쇼핑에만 매진할 생각인데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중 그 어느 하나도 라이언에게서 직접 받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하나같이 다 아름답고 귀한 보석이었지만 정이 가는 것이 없었다.
“이대로도 괜찮아. 워낙 드레스가 예쁘잖아.”
단순함의 극을 달리는 드레스였다. 렌포드에 가면 또 드레스 쇼핑을 신물이 날 정도로 할 텐데 메리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단순한 드레스로만 챙길 것을 명했었다.
“그래도… 이대로 나가시기에는….”
문밖을 자꾸 살피는 메리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리아가 다시 물었다.
“자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게….”
“그게 뭐?”
리아의 목소리가 단호해지자 메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올라오다 레스터 부인 시녀를 만났는데….”
“만났는데?”
“들고 있던 드레스가 엄청 화려해서….”
듣자 하니 페넬로페의 시녀를 만난 모양이었다. 드레스가 화려하지 않더라도 페넬로페는 생긴 것부터 화려해서 어딜 가나 기선을 제압하기에는 좋았다.
“괜찮아, 괜찮아. 뭘 그런 걸 걱정하고 그래.”
역시나 이 시대에서도 시녀들 사이에 기 싸움은 존재했던 모양이다. 리아는 환생 전 배우로 살아갈 적에 코디들 사이에 자주 있었던 기 싸움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 기 싸움이 아무리 심해도 결국 본판이 예쁜 자가 살아남았지. 코디도 이기는 본판 불변의 법칙. 일명 얼굴이 다했다! 라는 말이 있더랬다.
그래도 자신이 모시는 마님이 초라해 보이는 게 싫었는지 메리의 투정 섞인 징징거림은 계속되었다.
“히잉… 목걸이라도 하나 가져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너무 아쉬워요. 드레스도 가장 단순한 걸 가져왔는데….”
“메리메리. 그만! 괜찮아. 난 이대로도 충분해.”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공작부인,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라이언의 시종 존이었다. 메리는 황급히 문가로 다가가 들어오면서 혹시 몰라 잠가 뒀던 잠금장치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곧바로 라이언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리아를 향해 있었다.
“준비 다 되었으면 나가 보겠나?”
그는 리아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메리에게 묘하게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메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나 좀 깨우지 그랬어요?”
리아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물었다. 일어났으면 깨울 것이지 혼자만 쏙 빠져나간 그가 얄미웠다. 그녀의 질책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는 미소가 보였다.
“너무 피곤해 보여서. 세상모르고 자던데.”
리아는 그의 말에 확 얼굴이 붉어졌다. 세상모르고 자던 자신의 모습을 그가 혼자서 내려다봤을 생각을 하니 부끄러웠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 침을 흘리거나 잠꼬대를 하지는 않았어.”
노골적인 그의 말에 리아는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그는 어찌 된 게 자꾸만 얄미워지고 있었다. 점점 말도 많아지고 은근히 장난도 친다. 좋은 징조일까? 그가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그때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놀란 리아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보다 빨리 그녀의 귓가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이번엔 직접 해 주고 싶군.”
귓가에서 너무도 가깝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놀란 리아는 숨을 멈췄다가 후하고 내쉬었다. 예고도 없이 다가온 그의 행동에 그녀의 심장이 쿵쿵 울려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