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한낮의 피크닉
덜컹-
마차가 멈췄다. 리아는 갑자기 달라진 공기를 느끼며 라이언을 밀어냈다.
“왜?”
라이언이 아쉬운 듯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마차가 멈췄어요.”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군.”
점심은 출발할 때 싸 온 도시락을 먹기로 했었다. 중간에 들릴만한 식당도 없었고, 근처의 식당을 찾아가기에는 시간도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시계를 집어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립시다.”
리아는 아직 입술이 얼얼했다. 그리고 심장 역시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 저렇게 금방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하다니… 어쩐지 그가 얄미워졌다.
까칠한 그의 턱에 사정없이 찔린 자신의 턱이 따가웠다. 머리카락은 또 어찌나 헤집어 놓았는지 산발이 따로 없었다.
“앞으로는 면도를 잘하셔야겠어요.”
리아가 턱을 살살 문지르며 라이언을 향해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빨갛게 부어올랐군.”
하얀 그녀의 살결 위로 붉게 자국이 나 있었다.
“앞으론 조심하도록 하지.”
라이언이 붉게 긁힌 리아의 얼굴을 살피며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린 부분을 문질렀다. 그의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그녀는 그만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괜찮아요. 아프진 않아요.”
리아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에게서 등을 보인 채로 서둘러 머리를 정리했다.
“그 망할 보닛은 쓰지 말도록.”
머리를 정리한 그녀가 마차 바닥을 살피자 무엇을 찾는지 눈치챈 라이언이 말했다. 리아 역시 답답한 보닛을 꼭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한쪽 끝에 구겨진 보닛이 보였지만 모른 척 줍지 않았다.
마차가 멈췄는데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주인이 이상했는지 시종 존이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점심을 드실 시간입니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존의 목소리에 라이언이 리아를 살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정돈된 듯 보이자 그는 마차 문을 열었다.
날씨는 좋았다. 엘리시아는 1년 내내 따뜻하다고 했다. 리아는 늘 포근하고 보송보송한 이곳에 날씨가 마음에 들었다.
신에게 축복받은 나라. 그게 바로 엘리시아였다.
리아가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메리가 양산을 들고 그녀의 곁에 와서 섰다.
“마님, 보닛을 쓰고 나오셔야죠. 햇볕이 얼마나 따가운데요.”
메리의 잔소리가 시작되려고 하자 라이언이 그런 그녀를 차단했다.
“난 뭔가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건 딱 질색이야. 보닛은 절대 쓰지 마시오.”
“메리, 들었다시피 공작님께서 너무 싫어하셔.”
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메리를 향해 두 팔을 으쓱하며 점심이 차려진 테이블로 향했다. 다행히도 테이블이 위치한 자리는 나무 그늘 밑이었다.
“이런 건 언제 준비해 온 거야?”
점심이 차려져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보며 리아가 메리에게 물었다.
“피크닉 세트에요. 바닥에서 드실 수는 없잖아요.”
메리가 웃으며 의자를 빼어주자 리아가 앉으며 말했다.
“고마워 메리.”
라이언이 리아의 맞은편에 앉자 메리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라며 자리를 피했다.
둘 만에 피크닉이었다. 하인들과 기사단은 마차 주위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리아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제임스와 페넬로페는 늦나 봐요.”
“오늘 저녁, 숙소에 도착하면 만날 수 있겠지.”
라이언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오늘 저녁까지는 절대 그들과 마주칠 리 없다는 표정이었다.
리아 역시 첫 만남부터 껄끄러웠던 페넬로페를 빨리 만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으므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제임스가 있는데 왜 그의 아버지는 페넬로페를 당신에게 부탁한 거죠?”
제임스가 페넬로페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늘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제임스는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지. 여행을 좋아해서 말없이 떠난 뒤 한 참 있다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고… 그런 그에게 누굴 부탁할 수 있겠소.”
리아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매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던데요. 페넬로페도 제임스보다는 당신을 더 잘 따르는 것 같고요.”
“제임스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군.”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해 두죠.”
“낯선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많이 친해 보이던데.”
으르렁대는듯한 라이언의 말투에 리아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있자니 힘이 들었다.
“혹시… 지금 질투를 하시는 건 아니시죠? 가장 친한 친구를?”
“내가?”
“네. 공작님이요.”
공작님이라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그간 지켜본 결과 그녀가 공작님이라는 호칭을 쓸 때는 딱 두 가지였다.
화났을 때와 놀릴 때. 지금은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라이언.”
“네?”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군. 서로 친해져야 하지 않겠나?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줘야지. 그렇지, 레오니?”
까만 그의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그녀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깨웠다. 그는 너무 노골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지 않나요? 그것도 고귀하신 공작님의 존함을….”
“그런가? 몇 번 당신이 그렇게 부르며 소리치는 걸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봐. 그럼 어쩔 수 없이 여보라고 해야겠군.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아이 아빠로 부르면 되겠지만, 아이는커녕 아직 손도 제대로 잡지 못했으니.”
“라이언. 라이언으로 할게요.”
차마 여보라고 부르기는 어색한 리아가 어쩔 수 없이 라이언이라고 부르기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뭐? 손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고? 그럼 아까 마차 안에서 나눈 것은 키스가 아니고 뭐란 말이야?
“그런데, 우리가 손도 제대로 잡지 못한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리아가 살짝 달아오른 뺨을 애써 숨기며 샐러드를 포크로 콕콕 찔렀다.
“아, 키스는 했지. 그렇지만 손은 아직 안 잡지 않았나? 마차를 태워주거나, 말에 올라타기 위해 잡아 준 것들은 제대로 잡았다고 할 수 없지.”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손을 잡은 경우가 대다수이니 제대로 잡은 적은 없었다.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 좀 엉망이네요.”
“꼭 순서를 따를 필요야 없지 않소? 사랑도 하기 전에 결혼부터 했는데 그런 것을 따지기는 좀 우습군.”
금방 아직 제대로 손도 안 잡았다고 하더니 이제는 순서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리아는 변덕스러운 그의 말에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는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다가도 어느 순간 능숙하게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관심 없는 척 보이다가도 돌아서면 다정해졌다.
그녀가 아는 남자 중에 그가 가장 복잡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사랑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확 덮칠 걸 그랬나? 그랬으면 일이 좀 더 쉬웠을까?
“레오니.”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리아를 향해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리아!”
그의 다정함이 꼭 다른 사람을 향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레오니가 그녀이고, 그녀가 레오니이지만…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응?”
“리아요.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리아?”
라이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리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그게… 리아는 어릴 적 유모가 불러주셨던 이름이에요. 레오니라고 불리는 건 좀 어색해서요. 그렇게 불러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향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집안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작위에 딸린 이름 대신 집 안에서 부르는 애칭이 따로 있는 경우도 흔했고. 더군다나 그녀의 왕궁 생활을 전해 들은 그로써는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리아라… 듣기로는 그녀와 가장 친했던 사람은 어릴 적 죽은 유모 한 명뿐이라고 했다. 그 유모가 불렀던 이름이라니. 라이언은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려울 것도 없군. 리아.”
“고마워요.”
리아는 그의 입을 통해 들리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면서도 감미로웠다. 레오니 하고 부를 때마다 느껴졌던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던 것 같은… 그런 마음.
“고마울 것까지야.”
라이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스테이크를 썰었다. 도시락이라고 하기에는 음식이 매우 거창했다. 수프에 샐러드, 그리고 스테이크까지. 하인들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을지 훤히 보였다.
“많이 드시오.”
라이언은 자신의 접시에 올려진 스테이크 한 조각을 리아의 접시에 덜어줬다.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가슴 쪽을 힐끗 쳐다본 후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랬지. 맞아, 취향이 아주….”
“그게 무슨 말이지?”
“어머! 들렸어요? 혼잣말이었는데….”
그가 덜어준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입안에 쏙 집어넣으며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혼잣말치고는 꽤 크군.”
“제가 목소리가 좀 커서요.”
“그래서 다 들렸으니 물어보겠소. 취향이라는 게 무슨 말이지?”
라이언의 눈빛이 흥미로움으로 물들었다. 마치 그녀와의 대화를 즐기는 사람처럼.
“아니 뭐 딴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취향이 궁금해지네요. 어떤 여성상을 좋아하시는지.”
“아하….”
아하? 뭐야 그 반응은? 리아의 눈초리가 샐쭉 올라갔다.
“아무래도 확고하신 취향이 있으신 모양이에요?”
“확고한 취향이라….”
그의 눈빛이 그녀의 어딘가에 머물렀다가 빠르게 옮겨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위험해. 자꾸 어딘가를 살피는 것 같잖아!
리아가 화제를 돌릴 겸 라이언을 향해 다시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렌포드에 가면 확고한 취향의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죠?”
그녀의 질문에 그가 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은 뭐예요? 긍정이에요?”
“가 보면 알겠지.”
“뭐요? 그 말은 지금 애인이 있다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부르군.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지.”
“저기요. 공작님! 라이언!”
라이언이 못 들은 척 손을 들어 시종 존을 부르며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 남은 리아는 당황함에 물만 들이켤 뿐이었다.
“하, 참나. 그래서 애인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라이언은 다시 마차에 타지 않았다. 대신 메리가 리아와 함께했다.
그는 마차가 답답하다며 말을 탔지만, 리아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같이 마차를 타고 갈 때 자신에게 쏟아질 그녀의 질문을 사전에 차단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말을 타고 가겠다고 말하는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말려 올라간 듯 보인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결국, 리아는 점점 커지는 의심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