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마차를 타고
베드포드 성에서 렌포드까지는 마차로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였다.
물론 말을 타고 간다면 그 시간이 반 이상 단축되겠지만,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이었기에 라이언은 두 번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마차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출발 준비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렌포드행이 결정되자마자 집사 넬슨은 하인 몇 명을 데리고 먼저 그곳의 저택을 정비하기 위해 떠나갔다.
다음날 출발하기 위해 성 앞에 모인 인원은 많았다. 딱 보기에도 스물이 가까운 정도.
라이언과 그의 시종 존, 리아와 그녀의 하녀 메리. 그 외 하인 몇 명과 말과 함께 서 있는 호위기사만 해도 10명이 넘어갔다.
“인원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마차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을 보며 리아가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인원은 많을수록 좋지.”
라이언이 이 정도는 많은 것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사실 자신만 가는 것이라면 이 정도의 인원은 필요치 않았다. 번거롭기도 했고, 거추장스럽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이번 일정은 아내와 함께였고, 더군다나 자신의 아내는 3년 만에 처음으로 베드포드 성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차가 왜 3대에요?”
나란히 서 있는 3대의 마차를 보며 리아가 다시 물었다.
“한 대는 하인들, 그리고 한 대는 제임스와 페넬로페.”
“다 따로 간다고요?”
하인들은 짐도 싣고 가야 하기 때문에 따로 타고 가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제임스와 페넬로페까지 따로 타고 간다고? 그러고 보니 아직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제임스는 페넬로페의 강압에 못 이겨 그녀와 함께 그녀의 작은 저택으로 끌려갔다.
“제임스와 페넬로페는 아직 오지 않은 건가요? 출발시간이 다 되었는데.”
“가는 길에 페넬로페의 저택에 들를 예정이오. 물론 마차만.”
라이언은 자리가 남는다고 해도 두 사람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너무 말이 많았고, 피곤한 존재였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조그맣게 아내와 단둘이 조용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움틀거렸다.
“그만 타지.”
라이언이 활짝 열린 마차 문 앞에 서서 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님!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마차를 세우시고 절 불러주세요.”
“주인님.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 저, 존을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메리와 존이 경쟁이라도 하듯 큰소리를 냈다. 리아는 그런 메리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며 싱긋 웃고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라이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자리를 잡자, 이내 라이언 역시 그녀의 앞에 들어와 앉았다. 마차 문이 닫히고 정적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주 작은 공간 안에 무릎을 마주 대고 앉아 있는 것이 편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뒤 마차가 출발하자 리아가 뒤집어썼던 보닛을 푸르며 말했다.
“이런 건 도대체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자꾸 뒤집어쓰는 이유가 뭐지?”
“메리요. 그 아이는 내가 보닛을 안 쓰고 밖에 나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쓰는 거예요. 메리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살짝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존이랑 비슷하군. 그 녀석은 내 구두가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아니까.”
리아는 고개를 숙여 구두를 쳐다봤다. 역시나 그의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아주 성실하고 충직한 하인이네요.”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너무 심할 정도로.”
“우리도 공통점이 하나 있네요. 매우 심할 정도로 성실한 하인을 두었다는 것.”
리아가 말을 마친 후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자 라이언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여행이 생각보다 더 흥미롭고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마차 타는 거, 싫어하시는 것 아니었어요?”
리아가 레오니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3년 전 그는 마차에 함께 타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레오니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매우 기뻐했었다.
“내가?”
“3년 전에는 같이 안 타셨잖아요.”
리아가 3년 전이라고 콕 집어서 지적을 하자 그가 기억하려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아, 그때. 뭐 그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고요?”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 그런 것 하나 변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시간이잖아. 마치 당신처럼.”
리아는 라이언의 대답이 얄미워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생긴 것만 보면 과묵할 줄 알았는데 그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자신의 말에 한 번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이 토를 달았다. 물론 그가 불리할 때 만 빼고.
리아는 팔짱을 끼고 그를 새침하게 노려보다가 고요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메리 말로는 렌포드까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가야 한다던데 오늘 밤은 어디서 자나요?”
밤새 마차를 몰면 내일 해뜨기 전에 도착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라이언은 그렇게까지 무리하면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중간에 쉬어갈 여관이 있소.”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 저녁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 남편과 단둘이 마차에 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한 침대에서 잠드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덜커덩거리는 조그만 상자 안에서 남편과 무릎을 맞대고, 숨결을 지척에서 느끼며….
어색하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그녀가 지금 느끼는 묘한 기분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리아는 그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자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그러진 말아야지.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자자. 잠을 자는 거야.
“피곤한가?”
그녀가 눈을 감자마자 라이언이 물었다.
“네.”
리아의 짧은 대답에 라이언은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여기서 눈을 뜨면 더 이상해 보일까 봐 그녀는 억지로 의식을 놓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그녀는 출발한 지 삼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무의식의 세계로 잠겨 들었다.
번쩍-
리아가 잠에서 깨어나며 눈을 떴다.
‘이게 뭐지?’
그녀는 누군가에게 머리를 기댄 상태였다. 당연히 그 누군가는 남편일 터였다. 더군다나 그 남편은 어깨에 기댄 자신의 머리 위에 또다시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매우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의 상태를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베드포드 성을 벗어나는 엉망진창인 길을 빠져나왔는지 마차는 한결 부드럽게 달리고 있었다. 덜컹거림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간혹 살짝 몸이 흔들리는 정도였다.
‘어쩌지?’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기척을 내서 그를 깨워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혼자만 깨어 있는 시간이 정확히는 잴 수는 없지만 십 분 이상 지난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는 몰랐지만, 의식을 차리고 보니 기댄 목이 점점 뻣뻣해지며 아파 왔고, 그의 머리는 매우 무거웠다.
덜컹-
그런 리아의 고민을 알았는지 때마침 마차가 구덩이라도 지나가는 듯 덜컹대며 두 사람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림에 깨어난 라이언이 고개를 바로 하자 리아도 재빠르게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일어났나?”
“네. 지금요.”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한참 전이지만 리아는 금방 정신 차린 척을 하며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당신은 잘 잤나요?”
“나?”
“네. 당신요.”
라이언이 고개를 양옆으로 운동하듯 움직이며 말했다.
“난 안 잤는데.”
“네?”
그의 황당한 대답에 리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난 그저 당신 고개가 자꾸 밑으로 떨어지기에 어깨를 빌려준 것뿐이오. 잠은 자지 않았어.”
그를 깨울까 봐 아픈 목도 참아가며 인내했던 시간이 허무해졌다. 잔 것도 아니면서 왜 머리를 기대고 난리야! 살짝 말려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너무 얄미웠다.
“이대로 가기에는 좀 좁지 않아요?”
리아가 앞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며 그에게 옮겨가라고 눈치를 줬다.
“반대로 앉아 있으니 어지럽더군. 이대로가 좋겠어.”
“혹시 어디 아파요?”
당혹스러운 그의 행동에 리아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글쎄, 아픈 것도 같고.”
이번에는 리아가 그의 정수리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열이라도 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작은 접촉에 짜릿한 기운이 그의 머리를 타고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라이언은 자신의 정수리 위에 올려진 리아의 손을 잡아내려 이마 위로 옮겨 놓았다.
“보통 열이 났냐고 물을 때는 이마를 만져보지 않나?”
라이언의 손은 오늘도 차가웠다. 리아가 손을 움찔거리며 이마에서 떼어내려고 하자 그는 더 세게 잡으며 이번에는 자신의 무릎 위로 잡아끌었다.
가만히 잡고 있으니 그녀의 따뜻함이 그의 손까지 물드는 듯 잡은 손에 열기가 돌았다.
“그만 놔주세요.”
리아가 라이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키 차이 때문에 앉아 있어도 그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라이언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봤다. 살짝 골이 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새로웠다.
매일 보아도 믿어지지 않는 아내라는 존재. 그는 지금 이 상황이 꿈결 같았다. 지금껏 한 번도 타지 않았던 마차. 그 마차에 앉아 있는 자신.
분명 밖에서 단원들은 자신의 대장을 놀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니 당연한 듯이 마차에 올라탔다.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그가 말없이 눈을 맞추며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도 긴장했는지 앙증맞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그 틈으로 분홍빛 혀가 그를 유혹하듯 살짝 입술을 핥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었고 고개만 조금 숙이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을 거리였다. 그는 자제력을 찾기 위해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그에게 잡혀있던 손이 아팠는지 그녀가 조그맣게 비명을 내뱉었다.
“아야.”
결국, 그는 무너졌다. 참을 수가 없는 욕망에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삼켜버리고 말았다.
빠르게 다가온 그의 입술에 리아는 숨을 멈췄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강렬해서, 너무 뜨거워서… 그녀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조차 숨이 찼다.
라이언은 너무 능숙하게 그녀를 휘감았고, 잡아당겼다. 리아는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거친 숨결은 그녀의 입안 곳곳을 맴돌았고, 다급한 손길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 놓았다.
마차의 덜컹거림도 주변의 소음도 아득해졌다. 오로지 서로의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서로가 존재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얽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