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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43화 (43/116)

43화. 이상하게 친밀하고, 묘하게 어색한

이른 아침부터 라이언은 일이 많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몹시 바쁜 사람이었다. 리아는 방에서 아침을 먹고 메리를 기다렸다.

“손님은 어디에 계시지?”

막 방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질문에 메리가 놀라 멈춰 섰다.

“네?”

“브렌트 남작!”

이어지는 리아의 말에 메리가 ‘아’ 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클라이님 말씀이세요?”

“클라이님?”

“네. 클라이님이요.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마님! 우리 클라이님은 정말 너무 잘생기신 것 같아요. 목소리도 좋으시고, 매너도 좋으시고.”

우리 클라이님?

완전히 홀린 듯한 눈빛으로 제임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메리를 보며 리아는 황당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고작 어제 도착했을 뿐인데, 하루 사이에 매너까지 보여주면서 메리를 사로잡다니. 역시 그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그래. 그 클라이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있을까?”

환상에 빠진 메리를 향해 리아가 다시 물었다.

그를 만나 물어볼 것들이 많았다. 어쩌면 남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 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주변 사람 공략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어!’

“클라이님은 지금 응접실에서 차를 드시고 계세요. 그 모습도 어찌나 고급스럽고, 우아하신지….”

메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리아는 서둘러 고급스럽고 우아하다는 차 마시는 제임스를 찾아 방을 나섰다.

메리를 뒤로 한 채, 계단을 내려오니 홀에는 집사 넬슨이 서 있었다.

“넬슨! 브렌트 남작님이 응접실에 계신다고 하던데….”

“마님. 내려오셨습니까. 브렌트 남작님은 현재 응접실에서 손님과 함께 계십니다.”

손님? 브렌트 남작이 손님인데… 또 다른 손님과 함께 있다고? 의문이 가득한 리아의 눈빛을 알아들었는지 넬슨이 말을 이었다.

“동생분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페넬로페?”

“네. 레스터 백작 미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페넬로페가 또 왔단 말이야? 페넬로페는 그날, 그 방문 이후 아주 조용했었다. 라이언도 매튜도 그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리아 역시 잊고 있었다. 그녀의 방문조차 먼 과거의 일로 여겨질 정도로…

그런데 어제 제임스의 등장과 함께 그녀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라이언에게는 동생 같은 아이지만, 리아에게는 동생 같지 않은 그냥 여자.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어휴.”

의식할 틈도 없이 한숨이 저절로 쏟아졌다. 복잡한 건 정말 딱 질색인데… 이 세계로 오고 나서부터는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아직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는데 등장인물은 늘어만 가고 일은 꼬여만 간다.

“아니 정말 나 정도 되니까 외우지, 이거 뭐 복잡하기가 수학 기호 급이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

페넬로페 레스터 백작 미망인.

제임스 클라이 브렌트 남작.

그 사교계인지 뭔지 하는 곳에 가면 더 수많은 사람이 나타나겠지? 오 마이 갓! 리아는 지끈거리는 이마 위에 손을 올려놓고 인상을 썼다.

“쉬운 게 하나도 없네. 하나도 없어.”

“네? 마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넬슨의 목소리에 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이마 위에 얹어 놓았던 손을 내렸다.

“어머! 넬슨. 아직 거기 있었어?”

“네. 여기 있습니다. 응접실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여전히 정중한 넬슨의 말에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선은.”

“그럼 제가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리아는 그런 넬슨의 뒤를 따랐다. 넬슨은 역시나 정중하게 응접실의 문을 두드린 후 리아의 등장을 알렸다.

응접실 안의 분위기는 사늘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금방 언쟁을 나눈 듯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리아는 몹시 궁금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일까요?”

그녀의 이상한 인사에도 페넬로페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페넬로페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제임스였다.

“부인. 오늘도 역시 아름다우십니다. 여기 제 동생 페넬로페를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소개는 필요 없겠는데요. 우리 구면이에요.”

“네? 그게 무슨.”

“구면. 그러니까 이미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이에요.”

리아의 말에 제임스의 얼굴이 페넬로페 쪽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다그치는 것처럼.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오라버니. 별일 없었으니까.”

제임스의 표정이 사뭇 볼만했는지 페넬로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저 이웃사촌으로 인사를 하러 들렀던 것뿐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리아는 그런 페넬로페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레스터 부인. 아주 유익한 만남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죠?”

“공작부인께서 절 그렇게 기억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페넬로페는 리아를 향해 양쪽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이내 제임스를 보고 돌아섰다.

“오라버니. 지금 공작부인께서 하시는 말씀 잘 들으셨죠?”

더 할 말이 없어진 제임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넬슨이 간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출출하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리아는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하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스터 부인도 그만 앉으세요. 반가운 인사는 그 정도로 되었으니.”

넬슨은 차가운 레모네이드 한 잔을 리아 앞에 놓아 주고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브렌트 남작님도 한 잔 드세요. 마당에서 딴 레몬으로 만든 거예요. 정말 맛있답니다.”

리아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 제임스를 향해 말하자 그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부인. 브렌트 남작님이라니요! 그런 딱딱한 호칭은 제 생전 처음입니다. 부디 저를 제임스라고 불러주세요. 부탁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리아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보를 얻으려면 친해져야 하고, 친해지려면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빠른 방법은 없지. 좋았어. 접수!

“그럴까요? 남편의 친구는 제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죠, 제임스?”

“그럼요.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 친구의 부인은 제 부인이기도….”

“네? 그게 무슨?”

“아! 실수! 실수입니다. 제가 그저 기쁜 마음을 표현하려다 보니….”

페넬로페는 그런 제임스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오라버니. 아무리 좋아도 체통은 좀 지켜주면 안 될까요? 누가 볼까 무서워서 정말.”

페넬로페의 날카로운 지적에 리아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말 그대로 실수인걸요.”

“흠흠. 감사합니다. 그럼 부인, 저는 부인을 뭐라고 부르면….”

“리… 아니, 레오니요. 레오니라고 불러주세요.”

“오! 레오니! 그러고 보니 제가 공주님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불러도 될는지.”

“남편의 친구는 제 친구. 우리 친구 아닌가요? 친구 사이에 그런 거 따지지 마세요.”

그때 누군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누가 친구지?”

라이언이었다.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라이언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오라버니!”

라이언을 보고 가장 먼저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페넬로페였다. 그녀는 마치 몸을 내던지는 것처럼 라이언을 향해 말 그대로 뛰쳐나갔다.

“페넬로페. 네가 또 무슨 일이지?”

“오라버니. 자꾸 그렇게 섭섭한 말만 할 거예요?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인가요?”

같은 오라버니였지만 그녀의 억양은 제임스를 부를 때와 라이언을 부를 때 매우 달랐다. 리아는 그런 페넬로페를 보며 눈을 감고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저렇게 티를 내는데 그저 동생일 뿐이라니.

지금 남편의 표정이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라면, 그는 둔하거나 혹은 냉혹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물론 후자와 더 가까워 보이지만 말이다.

페넬로페가 아양을 떨 듯 라이언의 바로 앞에 섰지만, 그의 시선과 발걸음은 곧장 소파로 향했다.

“누가 누구와 친구라는 거지?”

같은 질문이었다. 처음 했던 그대로 똑같은.

“저와 당신의 친구 제임스요.”

리아는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제임스?”

“남편에 친한 친구면 제 친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래서 서로 텄어요.”

그녀에게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의 시선이 제임스에게로 옮겨갔다.

“어이 친구! 그 표정 좀 풀게나. 늘상 뭐가 그렇게도 심각한지. 그저 친구의 아내와 친구를 하기로 한 것뿐이라네.”

제임스의 말에 라이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친구의 찌푸려진 미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임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레오니. 내가 남편의 친구이자, 친구 아내의 친구로서 대신 사과하죠. 이 친구가 원래 인상이 이래요. 화난 건 절대 아니니 걱정 같은 건 하질 말아요.”

리아는 슬슬 제임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라이언의 얼굴은 원래 그렇다고 하기에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험상궂게 변하고 있었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제임스.”

“그러니까요. 이쯤에서 그만 해요.”

리아 역시 고개를 흔들며 라이언의 말을 거들었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제임스는 과할 정도로 신이나 있었다.

“셋이 무슨 일로 모여 있는 거지? 거기에 뭐? 레오니?”

라이언은 어울리지 않는 세 남녀의 조합에 관해 물으며 리아를 바라봤다.

“공작님. 저 역시도 어찌하여 셋이 함께 있는지 그것까지는 잘 몰라서 답을 해 드릴 수가 없겠네요. 제가 내려왔을 때는 이미 다정한 남매가 함께였어요. 그리고 제임스와 저는 오늘부터 친구가 되기로 했답니다. 친구끼리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다정한 남매가 문제였는지, 오늘부터 친구가 문제였는지 라이언의 굳은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공작님께서는 어딜 다녀오셨나요?”

리아는 그가 뿜어내는 험악한 기운을 조금이라도 없애보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노력이 통했는지 라이언은 한껏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쓰윽 문지르더니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이게 뭐죠?”

리아는 라이언이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그냥 종이가 아닌 매튜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각하, 직접 가지 못하고 서신을 보내는 불충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 도움이 필요합니다. 공작부인께서 말씀해 주신 재료들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이곳, 렌포드로 오셔서 저를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 렌포드로 와 달라는 건가요? 저보고?”

“그런 것 같군.”

리아는 디자이너 쥬넬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렌포드를 떠올렸다.

렌포드. 그곳은 수도 르셀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주로 귀족들이 휴양을 하기 위해 찾는 곳이며, 없는 물건이 없다는 쇼핑의 도시였다.

“당신이 불편하다면 매튜를 다시 부르면 돼.”

“좋아요.”

라이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아가 대답을 했다.

불편할 이유가 없었다. 깨어난 이후, 이곳 베드포드 성 이외에는 가 본 곳이 없었기에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했다. 더군다나 여기서는 백지수표도 두껍기만 하고 하나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었지만, 쇼핑의 도시 렌포드라니! 그럼 말이 달라진다.

“라이언! 진심인가? 지금 이 시점에 자네가 렌포드를 가겠단 말인가?”

지금 이 시점? 리아가 궁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제임스를 쳐다봤다.

“지금 렌포드는 귀족들로 가득합니다. 사교계가 르셀에서 막 렌포드로 옮겨간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미지의 사교계? 렌포드에 꼭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백지수표와 사교계!

“그럼 더더욱 가야죠. 그 사교계가 무척이나 궁금하거든요.”

“사교계 하면 이 제임스 클라이를 빼놓을 수가 없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임스의 말에 간신히 풀어졌던 라이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자네는 들썩이는 사교계를 피해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꽃이 있으면 땅이 들썩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거늘. 내가 그 정도 들썩임도 감당하지 못할 놈으로 보이는가? 자네야말로 이런 시기에는 늘 렌포드를 떠나있지 않았나? 그런데 가겠다고?”

그는 친구가 그간 많이 변했다고 중얼대며 목이 타는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라이언은 그런 제임스를 애써 무시하며 리아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가겠다고 하면, 오늘 넬슨을 먼저 렌포드로 보내 저택을 준비시키겠소.”

“고마워요.”

그것은 가겠다는 말이 담긴 인사였다.

“저도, 오라버니! 저도 갈래요.”

그때 페넬로페가 끼어들었다. 제임스에 페넬로페라니. 라이언은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둘은 떼어놓고 간다고 해도 기필코 쫓아올 인물들이었다.

“제임스. 자네 동생은 자네가 책임지게.”

“어허. 친구. 페넬로페가 나 혼자만의 동생인가? 우리의 동생 아닌가?”

그렇게 이상하게 친밀하고, 묘하게 어색하고,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네 사람의 렌포드 행이 결정되었다.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귀족들이 넘쳐난다는 그곳으로 말이다.

리아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알지 못하는 미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그렇지만 그녀도 그 두근거림이 나쁜 쪽인지, 좋은 쪽인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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