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잊고 있던 고통
“혹시 질투하나?”
서재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자신의 손을 놓아버린 라이언을 향해 제임스가 웃으며 물었다.
“질투는 무슨… 그녀는 그냥 형식적인….”
“그렇지. 자네가 그녀를 질투할 리가 없지. 내가 아무리 좋아도 어떻게 자기 아내를 질투할 수가 있겠나.”
라이언은 변함없는 제임스의 모습에 급격히 나빠졌던 기분이 확 풀어졌다. 그는 언제나 늘 한결같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쾌하고 매력이 넘치는….
똑똑-
“주인님. 넬슨입니다.”
“들어오게.”
넬슨이 쟁반 가득 차와 샌드위치, 쿠키 등을 가득 담아서 들어왔다.
“마님께서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남작님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출출하실 것을 염려하셔서… 그리고 별관에 손님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밖에 두신 짐을 옮겨두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마친 넬슨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제임스는 매력적인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더니 털썩하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역시, 남자는 결혼을 해야 해.”
그는 쟁반 위에 담긴 샌드위치를 들어 올려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자네가 아직도 혼자였으면, 어디 이런 대접을 기대할 수나 있었겠나?”
라이언 역시 무언의 동의가 담긴 눈빛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지?”
“내가 반갑지 않은가?”
“반갑지. 놀랍기도 하고. 그동안 연락 한 번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다니.”
“나는 자네가 더 놀랍네. 결혼이라니. 검은 사자가 결혼이라니! 내가 엘리시아에 돌아오자마자 자네 소식을 듣고 놀란 걸 생각하면….”
제임스가 한껏 호들갑을 떨며 놀리듯 말했다.
“얼마나 신부가 좋았으면 그렇게 몰래 도둑 결혼을 한 건가? 뭐 자네 부인의 얼굴을 보니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라이언이 손을 들어 올려 이마에 상처를 문지르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도둑 결혼?”
제임스의 시선이 라이언의 이마로 옮겨갔다.
“아직도 아픈가?”
라이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흉터를 문지르고 있는 자신의 손을 자각하고는 황당한 듯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가끔.”
“불면증은?”
“그것도 가끔.”
“악몽은?”
“뭐, 그것도.”
“아직도 그 검이 그렇게 필요한가?”
장난꾸러기 같던 조금 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제임스는 진지해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친구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가득해 보였다.
“여전히.”
“강제로 결혼할 만큼?”
제임스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다 알고 찾아왔다. 라이언은 예상했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매튜를 만났군.”
“자네 심부름으로 분주하더군. 엘리시아에 있는 모든 보석을 다 사들일 셈인가?”
“가능하다면 그 정도쯤이야.”
라이언의 대답에 제임스가 혀를 끌끌 찼다.
“미련한 친구.”
“여전히 바보 같은 놈.”
라이언이 제임스의 말을 받아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둘은 한동안 웃으며 말없이 차를 마셨다.
“페넬로페가 근처에 있네.”
라이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임스를 봤다. 그의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미련한 것.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미안하군.”
“그만. 이 좋은 날에 페니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아. 그 아이 생각만 하면 골치가 아파 죽겠네.”
제임스가 주먹을 쥔 손으로 이마를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쩔 셈인가?”
“뭘?”
“왕께서 아이를 낳으라고 했다며? 꼭 그렇게까지 해서 검을….”
라이언이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제임스가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검을 찾아야지. 암 찾아야 하고말고. 아이를 낳는 게 대수인가? 부부 사이에 사랑하다 보면 아이는 뭐 자연의 순리 아닌가?”
“그 자연의 순리가 쉽지가 않다네.”
“왜? 그 정도로 보석을 바쳤는데도 자네가 싫다던가?”
“원하는 게 너무 까다로워.”
“뭐?”
제임스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듣기로는 온갖 선물을 다 갖다 바친다고 하던데 그걸로 부족하다고? 쯧쯧쯧 그렇게 사치가 심한 여자는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그게 아니야.”
라이언이 제임스의 투덜거림을 자르며 말했다.
“사랑을 달라더군.”
“사랑?”
“그래 사랑. 도대체 사랑이 뭔가?”
라이언은 아내가 원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돈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사랑을 몰라? 아니 어떻게 사랑을 모를 수가 있나? 자네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것이 사랑….”
“그만하게.”
쿨럭- 쿨럭-
라이언의 차가운 말투에 제임스가 민망한지 마른기침을 뱉어냈다.
“흠흠. 나만 믿게. 친구 좋다는 게 뭔가. 내가 그 사랑이 뭔지 확실하게 알려 주겠네.”
제임스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치자 라이언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아마 내년쯤이면 이 성에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군. 내가 장담하지.”
그를 바라보며 라이언은 생각했다.
‘이걸 믿어, 말아?’
***
“친구분이 참 독특하신 것 같아요.”
“그런가?”
“인기가 많다면서요? 이유를 알겠어요. 미남에다 말도 잘하고….”
“…그런가?”
계속되는 성의 없는 답변에 리아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런가? 밖에 할 줄 아는 말이 없어요?”
리아의 움직임에도 옆자리에 누워있는 라이언은 미동조차 없이 눈을 감은 그 자세 그대로였다.
“그런….”
“가? 또 그런가? 지금 나보고 말 걸지 말라고 그러는 거죠?”
리아가 이번에는 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반응 없는 모습이 얄미웠다.
‘잘 해 보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정말.’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한 이후 두 사람은 매일 한 침대에서 잠은 같이 자는, 말 그대로 잠만 같이 자는 상태였다.
리아는 답답함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무슨 할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자신이 잠자리에 들고 나면 한참 뒤에 들어와 새벽같이 나갔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아는 일부러 자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직 안 잤나?’도 아니고 ‘그런가?’였다.
리아가 몇 번 더 어깨를 꾹꾹 누르자 그가 눈을 떴다. 등불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짙은 어둠이었다.
“할 말이 뭐지?”
“하, 참네. 부부 사이에 꼭 할 말이 있어야 대화할 수 있는 거예요?”
“아… 그런가?”
“또 그런가, 진짜 그 말 좀 그만할 수는 없어요?”
리아의 목소리가 그를 질책하듯 높아지자 라이언 역시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지. 그 부부 사이에 나누는 대화라는 거.”
살짝 웃으며 답하는 라이언의 말에 리아는 황당해서 어이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까지 잡고 앉았는데 그녀가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임스는 참 특별하지.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리아는 동의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도 그러했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제임스라는 그 친구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했으며,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 그 때문에 사교계가 들썩이나요?”
“당신이 이야기했다시피 그는 미남이야. 여자들은 미남을 좋아하더군.”
“당신은요? 당신 때문에 들썩이고 그렇진 않아요?”
그녀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그런 적은 없는 것 같군.”
“에이, 아닌데. 내가 볼 때는 엄청 들썩였을 것 같은데.”
웃으며 건네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봤다.
“왜요? 아니에요? 엄청 무서워서 무진장 들썩였을 것 같은데. 눈 마주치면 도망가느라.”
“내가 무섭나?”
그의 눈빛은 변함없이 진지했다. 리아는 기운이 쏙 빠졌다. 농담으로 한 말에 진담으로 물어오는 그가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공작님, 농담 같은 거 잘 못 하죠?”
“농담?”
“지금 제가 한 말이 농담이라고요. 서로 웃자고 하는 말.”
그제야 그가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잠깐! 또 ‘그런가?’라고 할 거면 아예 말을 말아요!”
리아가 라이언의 말을 막으며 그의 입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가락 밑에서 그의 입술이 미소 짓는 것이 느껴졌다.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손을 잡아당겼다.
그렇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먼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의 접촉에 리아의 얼굴이 더 뜨겁게 타올랐다.
리아는 작은 등불이 감사했다. 희미한 조명은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숨겨주고 있었다.
“손이 뜨겁군.”
“당신은 차갑네요.”
그의 손은 차가웠다. 마치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손도 따뜻하다던데, 당신은….”
리아가 그를 놀리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내 마음이 차갑나?”
“저야 모르죠. 그냥 그렇다고요. 뭐 제대로 이야기라도 나눠봤어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을 하죠.”
“지금 하고 있잖아. 그 대화.”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또 있나?”
그의 말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보내 주신 선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선물이 싫다는 게 아니라 다만 좀 과하다는 거죠.”
“앞으로는 자제하도록 하지. 과한 선물은.”
“또 너-무 자제하지는 마시고요.”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건 정말 사심 같은 건 전혀 없이 단순히 호기심에서 물어보는 건데요.”
리아가 침대에 기대앉은 몸을 살짝 당겨 앉으며 그를 바라봤다.
“돈 많아요?”
“뭐?”
“얼마나 많아요?”
그녀의 질문이 황당한 듯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마음껏 보석을 선물할 만큼이라고 해 두지.”
“아… 그럼 다행이고요.”
“다행?”
“아니 뭐 조금 무리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거든요. 보내 주신 선물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녀가 정말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뒤로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기대앉아있었다. 여전히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자신의 손아래 그녀의 손이 작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라이언은 생각했다. 요즘처럼 편안한 적이 언제였을까? 아니 그런 적이 있기는 했을까?
그녀에게 그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빨리 초야를 치르고 제대로 된 부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잘 아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영지민들을 위해 일하고, 아내와 함께 식사를 하는… 오늘처럼 종종 오랜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나누고, 악몽 없이 편하게 잠드는 평범한 일상. 그는 따뜻한 아내의 손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엘르 검을 찾는 걸 그만두겠다는 건가!’
“흐읍.”
모엘르 검을 떠올리자마자 이마의 흉터가 마구 쑤셔왔다. 라이언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참지 못하고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마구 찡그렸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통증을 참는 것쯤은 그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동안에 편안함을 시기하듯 갑자기 시작된 통증은 매우 고약하고 지독하게 그를 괴롭혔다. 그녀 앞에서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마에서 시작된 통증은 결국 그의 입을 뚫고 나왔다.
“흡.”
라이언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을 참느라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그의 손이, 잡은 그녀의 손을 꽉 쥐자, 리아의 입에서도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얏.”
그렇지만 그는 그녀가 내뱉은 신음조차 듣지 못했다. 흉터는 자신을 잊고 편안함에 안주했던 그를 벌주듯 격렬하게 요동치며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공작님? 라이언!”
리아는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너무 놀라 하인을 부르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그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아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조…존…!”
그가 잡은 손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리아가 이번에는 존을 부르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그의 제지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그만. 그를 부르지 마.”
그는 꽉 다문 잇새로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왜 그래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네?”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도 그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라이언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통증에 남은 의지를 총동원하며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때 갑자기 이마에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과 함께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라이언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흉터 위에는 아내의 손이 올려져 있었다.
“괜찮아요?”
그가 눈을 뜨자 그녀는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물으며 그의, 이마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녀의 손이 상처에서 떨어지자 따스함 역시 사라졌다. 온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통증이 다시 시작되는 듯 흉터가 찌릿하게 쑤셔왔다. 라이언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이마 위로 잡아 눌렀다.
그녀의 손이 닿으며 따스한 기운이 그의 흉터를 감싸자 그는 이내 평온해졌다. 고통은 이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머리 아파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묻고 있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걱정이 가득한 아내의 얼굴을 보며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방법도 이해시킬 방법도 없었다.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라이언? 왜 그래요?”
대답 없는 그를 향해 그녀가 다시 물었다.
라이언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을 감았다. 그는 이마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자신의 손으로 누르며, 반대편 손 역시 마주 잡은 채로…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양손을 모두 라이언에게 잡힌 리아는 그가 움직이는 대로 어쩔 수 없이, 그의 바로 옆에 붙어 그를 향해 누울 수밖에 없었다. 손을 놓아주지 않는 남편 덕에 그의 어깨에 기댄 자세가 되고 만 리아가 다시 그를 불렀다.
“저기요….”
그는 그녀의 말에 어깨를 작게 움찔하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이대로… 그냥 이대로 자고 싶군. 부탁이야.”
부탁? 부탁이라고 말하는 그의 슬픈 목소리는 그녀를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 걸까?
밤이 깊어갈수록 리아의 고민 역시 함께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