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의 유혹
“날 유혹하는 건가요?”
리아가 간신히, 꽉 잠긴 목소리를 뱉어냈다.
“아니, 당신이 날 유혹해야지.”
그의 손이 귓불을 간질이다가 다시 턱 끝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와 이번에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지도록.”
리아가 참을 수 없는 초조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랑을 원한다는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이 남자의 노련함에 허를 찔리고야 말았다.
“그게 무….”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달콤한 사과 향이 그의 혀끝을 통해 그녀의 입안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흡.”
놀란 그녀가 신음을 뱉어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입술을 마주 댄 채 살짝 웃고는, 그녀에게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눈을 감아.”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쪽에 여린 살을 쓸어 올리며 달콤함을 갈구하듯 그녀의 혀에 휘감겼다.
“흐읍.”
리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키스가 주는 황홀함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아랫배를 간질이고 심장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원하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요구하고, 애정이 있는 결혼생활과 태어날 아이에게 다정한 아빠를 바라는 여자. 원래의 그였다면, 사랑을 원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황당한 요구를 단번에 무시하고 그녀를 강제로 가졌어야 했다.
아니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다시 만난 그날 그녀를 가졌어야 했다.
그렇지만 달콤한 그녀의 숨결은 그의 심장을 간질이고 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라이언은 생각했다. 그래 원한다면 사랑하는 척을 해 주지. 그렇지만 진짜 사랑은 아니야. 사랑은 없어. 나에게 사랑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야.
결정하니 다음은 쉬웠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던 그녀의 부푼 입술이 너무 탐스러워 보였다.
사랑을 증명하는데 키스만큼 완벽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그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맙소사. 그녀는 너무 촉촉하고 너무 달콤했다.
‘취한 거야. 취하지 않고서야 내가 이럴 리가 없지. 사과주가 생각보다 독했던 거야.’
라이언은 애써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가 그의 말에 눈을 질끈 감자, 그의 자제력 역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라이언은 감당할 수 없는 욕망에 몸을 맡긴 채로 이성을 상실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는 소리로 가득했다. 어느새 리아는 라이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있었고, 그의 손은 그녀 작은 몸을 쉴 새 없이 오를락 댔다.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리아였다.
그녀는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몸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입술을 떼어냈다. 라이언의 입에서 아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흠.”
“뭐죠?”
“뭐가?”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죠?”
리아가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라이언이 그런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그냥 있으면 안 되나?”
“왜 키스를 한 거예요?”
“확인 차.”
“무슨 말이죠?”
리아의 물음에 라이언이 유쾌한 듯 웃으며 말했다.
“나도 당신처럼 그 확인이라는 걸 해 보고 싶었거든.”
“네?”
의아해하던 리아의 머릿속에 덩굴장미 앞에서 그녀가 먼저 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리아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당신은 비밀로 했지만 난 말해 주고 싶군.”
“네?”
“내가 뭘 확인했는지 말이야.”
리아는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그의 대답이 너무 궁금했다.
결국, 호기심은 이성을 이기고야 말았다.
“그게 뭐죠?”
허리를 잡고 있던 라이언의 손이 천천히 리아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내려왔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당신이 원하는 걸, 내가 줄 수도 있을 것 같군.”
리아는 라이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있는 탓에 처음으로 그녀의 시선이 그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어둠이었다. 흔들림 없이 전혀 감정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밤.
‘당신이 원하는 걸, 내가 줄 수도 있을 것 같군.’
내가 원하는 걸 줄 수도 있다고?
리아는 그의 눈을 그대로 응시하며 어색함으로 마주 잡았던 자신의 손을 그의 양쪽 어깨에 올렸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의 몸이 아주 살짝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손이 닿는 그 순간 그의 떨림을.
그는 말이 없었다. 눈동자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리아는 그가 궁금해졌다. 이 남자의 눈동자도 사랑에 흔들리는 날이 올까? 내가 이 남자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의 작은 떨림은 그녀에게 ‘혹시’라는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리아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하얀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그을린 피부와 대조되어 더 가녀려 보였다. 그녀의 움직임이 시작되자 그녀의 엉덩이에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아는 그의 어깨선을 쓸며 굵은 목을 타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그의 남성적인 턱에 닿자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살짝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녀는 그의 미세한 변화에 용기를 냈다. 분명 그는 작지만 반응하고 있었다. 손바닥 밑에서 까끌까끌한 그의 수염이 느껴졌다. 그 그녀를 떼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제지하지도, 그렇다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리아의 손은 그의 얼굴을 마음껏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그의 피부는 거칠지만 부드럽고, 차갑지만 뜨거웠다.
그녀의 오른손 끝은 그의 턱을 따라 볼을 타고 올라가서 눈썹 끝에 멈췄다. 왼손은 여전히 그의 턱 주변을 간질이고 있었다.
눈썹 근처로 올라간 손가락이 그의 흉터 끝부분과 마주 닿았다. 다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신을 제지하기를. 자신의 손을 떼어내기를.
그렇지만 그는 그대로였다. 까만 눈동자 역시도. 아니 변화는 있었다. 더는 어두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
블랙홀.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았다.
‘만져도 되는 걸까?’
흉터 끝에서 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처음 그의 흉터를 만졌을 때. 그는 명백히 싫다는 표시를 했었다. 그것도 아주 확고하게.
접근하지 말라는 거부의 표시를.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그런데 지금 그녀의 손이 다시금 그의 흉터와 마주 닿아 있었다.
둘 사이에 적막은 묘한 음악이 되어 리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그녀는 흉터 끝에 닿아 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흉터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자신의 허리를 강하게 움켜쥘 때마다 작은 아픔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리아는 오히려 그 통증이 고마웠다.
그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녀의 접촉에 대한 그의 반응을.
리아는 긴장감에 숨을 참았다. 그녀의 손끝은 그의 울퉁불퉁한 흉터를 천천히 쓸며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그 찰나의 순간이 억 겹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흉터의 시작에 멈춰선 그녀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수월했다. 그녀는 다시 흉터 위에 올려진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쓰다듬었을까. 그녀는 침묵을 참기 어려웠다.
“아팠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리아의 반대편 손가락이 대답을 재촉하듯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문지르자 그가 응답했다.
“무척.”
그의 대답에 리아는 웃음이 났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 그녀의 입가에 고여 있는 웃음에 그가 다시 물었다.
“내가 아팠다니까 즐겁나?”
“뭐, 어떤 의미로는.”
허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접촉에 그녀의 몸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만해야 해. 여기서 멈춰야 해. 이대로 그에게 계속 안겨 있고 싶은 마음과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이제 그만 하죠.”
치열한 싸움 끝에 이번에는 이성이 감성을 이겼다.
“뭘 말이지?”
라이언은 다 알면서 모른 척 되물었다.
“그만 내려줘요.”
“싫다면?”
“설마….”
“설마?”
그가 계속 말하라며 그녀를 재촉했다.
“벌써 날 사랑한다고 하는 건 아니죠?”
“…그럼 안 되나?”
“거짓말.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잖아요.”
“사랑해.”
거짓 고백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으며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을 만큼.
리아는 그에게 홀리기 전에 고개를 흔들었다.
“한번 어떻게 해 볼까 싶어서 하는 고백은 거절이에요. 사람이 진심이 없잖아. 진심이.”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등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아 빼며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섰다.
오랜 시간을 긴장하며 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힘이 빠진 듯 몸이 휘청댔다. 그가 급히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그보다 먼저 탁자를 잡았다.
“접촉은 그만.”
그녀의 단호함에 라이언이 아쉬운 듯 손을 털었다.
“당신이 먼저 유혹한 거 아닌가?”
“하, 참나. 뭐라고요?”
리아가 그의 말에 어이가 없다며 황당한 웃음을 뱉어냈다.
“유혹은 당신이 한 거죠. 내가 아니라.”
라이언이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사랑해 달라고 유혹한 건 당신 아닌가?”
“그, 그게 어떻게 유혹이에요?”
“나한테는 그렇게 들리던데.”
리아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공작님.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바라는 것이지 유혹을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둘에 차이가 무엇인지.”
라이언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럼 그녀가 원하는 사랑이 뭐지? 만지고 싶고, 갖고 싶은 게 사랑 아닌가? 그걸 원하는 게 아니야?
“잘 모르겠죠? 지금 막 눈동자가 흔들리는데.”
리아가 그의 눈 쪽으로 손가락질하며 말하자 그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당신께 시간을 드린다고 하잖아요.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알려주세요.”
“시간을 준다고? 얼마나?”
“그건 알 수 없죠. 하루가 될지, 일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지. 어쩌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고요.”
“내가 준비되었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전 다 알 수 있어요. 금방 사랑한다는 고백도 거짓인 걸 맞췄잖아요. 공작님.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답니다.”
그녀의 조건은 너무 까다로웠다. 지금 당장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 믿지도 않겠지. 내일 당장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비웃겠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녀를 쉽게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녀는 역시나 쉬운 여자가 아니었다.
진정 원하는 게 뭐란 말인가! 정말 사랑을 원하는 것인가?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게 무엇이기에!
말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그녀를 사랑하는 척해야 한다는 말인가?
라이언은 왕이 원망스러웠다. 그녀와 아이를 낳으라는, 힘겹고 불가능한 조건을 내건 왕이.
버림받았다 해도 역시 그녀는 왕실의 핏줄이었다. 놀라울 만큼 젊은 왕 던컨과 그녀는 닮아있었다.
“저를 사랑하지 못할 것 같으면 되도록 빨리 말씀해 주세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새 출발 해야 하지 않겠어요?”
“새 출발? 부부가 헤어지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가?”
“우린 아직 진정한 부부가 아니잖아요. 혼인을 무효로 만드는 건 가능하지 않겠어요?”
리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라이언은 허를 찔렸다.
“화나신 건 아니죠?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라이언은 들리는 평판과는 반대로 마음이 약했다. 리아가 보기에는 그랬다.
칼끝에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사자라고 했는데.
다행히 그 칼끝은 자신을 향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닌척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저렇게 고민하고 서 있겠지.
“그만 자요. 너무 늦었어요.”
리아가 침대를 향해 돌아서 말했다.
“잠은 같이 자고 싶군.”
침대 끝에 도착한 그녀가 라이언을 돌아봤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것마저 거절한다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그래도 숨통은 트이게 해 줘야겠지. 그는 이상하게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그럴까? 악몽을 꾸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누구나 트라우마는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