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38화 (38/116)

38화. 그녀가 원하는 것

“협의?”

“네. 뭐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가 동의만 한다면.

“어렵지 않다니 뭔지 아주 궁금하군.”

평범한 부부라면 협의나 동의가 필요 없이 당연히 지켜져야 할 사항이었지만 자신과 남편은 아니었다. ‘평범’이라는 말은 두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남 이야기를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디자이너 쥬넬은 말했다. 요즘 사교계에 흔한 귀족 부부의 삶을.

그녀는 그들을 닮고 싶지 않았다. 그들 역시 평범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으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 역시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하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이미 남편에게 애정을 느꼈고, 그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아니 점점 더 커지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리아는 자신을 잘 알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하게 된다면 오래간다는 것을.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평생을 불행하게 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혹시나 살다 보면 그도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기에는 그의 악명은 너무나 드높았고 무서웠다.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기 전에.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조건을 걸만한 것이 있을 때. 그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지금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면, 그가 원하는 것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누가 그러더군요. 애정 없이 결혼한 부부의 삶은 하나같이 똑같다고.”

라이언의 얼굴에 호기심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하나같이 다 똑같다?”

“작위를 물려 주기 위해 후계자를 얻고 나면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된다더군요. 그저 형식적인 부부관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부부 말이죠. 각자 애인을 두는 것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연애결혼보다 정략결혼이 판치는 세상이었고 사랑보다는 상대방의 작위나 재산을 보고 결혼을 결정하는 경우가 넘쳐났다. 귀족들 사이에 그런 일은 일상이었고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중 서로에게 애정을 느껴 사랑에 빠지는 부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전 싫어요.”

“싫어?”

“당신도 후계자를 얻고 나면 다른 귀족들과 똑같이 행동할 건가요?”

라이언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그럼 남겨진 아이는 어떡하죠?”

“아이?”

“당신이 그렇게 얻고 싶다던 후계자 말이에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가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리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당신이 아니 유모가 키우면 되질 않나?”

라이언의 말에 리아가 콧방귀를 꼈다. 하, 역시 그런 생각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전 싫다고요.”

“뭐가 자꾸 싫다는 거지?”

라이언은 리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귀족들이 그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귀부인들은 그걸 더 좋아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후계자를 낳아서, 남편에게 벗어나길 바랐다. 남편 역시 의무를 다하고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건 물론이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 결과는 더 비참했다.

그는 한쪽에서만 갈구하는 애정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전 애정이 있는 결혼생활을 원해요. 태어날 아이에게는 다정한 아빠를 원하고요. 다른 수많은 귀족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부부인 척 연기하는 건 할 수 없어요.”

“무슨 말이지?”

“정말 몰라요?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요?”

라이언은 정말 몰랐다. 그녀가 무얼 원하는 것인지. 아이는 유모가 키우는 것이 당연했고 부모는 아이에게 재정적인 안정을 제공하면 되는 거였다.

“나와의 결혼을 취소하겠다는 말인가?”

리아는 라이언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야 저런 답을 내놓을 수가 있는 걸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리아의 질책에 라이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원하는 게 뭐지?”

리아는 라이언의 눈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그 하나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당연히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가 과연 그 하나를 줄 수 있을까? 그건 달라고 한다고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장미 덩굴 앞에서 그의 행동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을 보여줬잖아.

리아의 황금색 눈동자가 라이언의 검은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눈동자에서 답을 얻어내길 원하는 것처럼.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라이언이 다시 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알 수 없는 암흑이었지만 그녀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랑이요. 나는 당신의 사랑을 원해요.”

사랑?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라이언은 말문이 막혔다.

‘나한테 원하는 것이 돈도 명예도 아닌 사랑이라고?’

처음 생각처럼 원하는 걸 얻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내가 그 대가로 바라는 것이 사랑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날 놀리는 건가?’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요구가 장난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진짜 말 그대로 그 사랑이란 걸 원한다고?

한참을 망설이던 라이언이 느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날 사랑하나?”

“…우선은 호감이에요.”

리아는 거짓말을 했다. 그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나는 널 사랑하니 너도 날 사랑해달라고 우겨대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호감?”

라이언이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사랑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말이죠.”

이야기하는 리아의 볼이 붉어지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그의 시선에 입이 마르는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절 사랑하지 못할 것 같으면 이 결혼은 무효예요. 이번에는 제가 당신에게 시간을 드릴게요.”

말을 하면서도 리아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겁이 났다. 떨리는 마음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무척 애를 쓰는 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화를 내면 어쩌지?

사랑 따윈 절대 줄 수 없다고 거절하면 어쩌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는 당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인가?”

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그 말이에요.”

“사랑을 어떻게 증명하지?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

“날 사랑하나요?”

“나도 당신처럼 호감이라고 해 두지.”

“그럼 앞으로 날 사랑하게 될 것 같나요?”

라이언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사랑을 달라고 말하는 아내를 향해 더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사랑하게 될 것 같냐고?

사랑은 모르지만, 그녀를 원했다. 그녀가 필요했다.

“어차피 사랑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거 아닌가?”

한참을 말이 없던 라이언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은 쉽게 변하는 사람인가요?”

“대부분 사람이 그런 것 같더군. 사교계에 서로를 진정 사랑하는 부부가 몇이나 있을 것 같지?”

“그래도 몇 명은 있지 않을까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코웃음을 쳤다.

“없어. 그런 부부는. 설사 있다고 해도 티를 내지 않아.”

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뭐랄까? 매우 유행에 뒤처지는 일이거든.”

이런 거지 같은… 리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교계, 그리고 귀족들. 아직 겪어보지도 못했지만, 이 세계는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발레포르 망할 새끼. 왜 하필 날 이런 곳에! 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그런 건 평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거든. 대부분 귀족은 말이지.”

리아는 불평과 불만을 온 얼굴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가 웃기다 는 표정으로 비꼬며 말하자 리아가 이번에는 인상을 썼다.

유행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앞으로 이 남자를 어떻게 개조시킬지 앞이 막막했다. 평생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평생을 데리고 산다고? 하, 미쳤네! 미쳤어.

리아는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신이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풉.”

그녀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안으로 삼켰다.

“왜 웃지?”

“좋아요. 그럼 당신과 내가 사교계에 새로운 유행을 만들면 되겠네요.”

“새로운 유행?”

“어차피 유행은 바뀌는 거 아닌가요? 그런 고리타분한 유행은 이제 끝낼 때가 됐죠.”

“무슨 말이지?”

“내가 당신과 함께, 그러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걸 유행으로 만들겠다는 말이에요.”

리아는 그 사교계라는 곳에 가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상식밖에 일들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곳인지. 연예계도 만만치 않은 곳이긴 했지만, 귀족들의 세계는 그보다 한술 더 뜨는 곳이었다. 부부간에 사랑이 웃음거리가 되는 곳이라니.

“어때요? 생각 있어요?”

라이언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마치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것처럼. 한참을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순간 멈췄다. 리아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손에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를 원한다면 생각이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하지 않나? 내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은데.”

아이를 원한다면? 없어도 있다고 한다고?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정말 진짜 궁금했다. 그는 이상하게도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계자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간 그의 행동으로 보아 작위에 대한 집착이나 애정 따윈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꼭 그녀만이 그의 아이를 낳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하면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아이를 낳기 위해 달려들 것이었다.

“뭐지?”

“아니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는 거예요? 곧 죽어요? 불치병에라도 걸렸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정말 이상할 정도로 후계자에 집착하잖아요.”

대답이 없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다시 말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지금이 아니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계속 후계자, 후계자 하는데. 누가 빨리 아이라도 낳아 오래요? 그것도 꼭 나랑?”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말을 할수록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 마치 화를 내듯 다그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화를 내는 모습이 매력적이군.”

“아니 그게 무슨….”

리아는 그의 대답에 너무 당황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분명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 게 뻔한 걸 알면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결론은 당신과 사랑에 빠지라는 거 아닌가? 별로 어려운 요구는 아닌 것 같군.”

질문을 어물쩍 넘긴 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가 앉고 있는 의자를 잡아당겼다. 그의 힘에 가벼운 그녀의 몸이, 의자와 함께 그의 옆으로 옮겨졌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그렇지만 리아의 반항은 너무 약하고 너무 작았다. 그녀는 이미 그가 내뿜는 강한 열기에 취해가는 중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걸 주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

그의 손이 턱을 타고 볼을 쓰다듬더니 그녀의 작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고, 그는 유혹하고 있었다.

리아는 라이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주먹을 꼭 말아 쥐었으나 그의 손길은 너무 집요하고 치명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