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협의한 마음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리아는 라이언에게서 입술을 떼어내며 갑자기 찾아온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만 가요.”
그의 표정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냥 윤곽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라이언은 리아의 어깨에서부터 팔뚝을 따라 팔목까지 천천히 쓰다듬으며 내려와서는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끼워 넣었다. 그의 행동에 리아가 움찔하자 그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두워서 위험해. 이게 싫다면 안고 가는 수밖에.”
리아는 대답 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마지막 장미 덩굴 코너를 돌 때 그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확인은 잘 했나?”
리아는 처음으로 어둠이 고마웠다. 그의 질문에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을 숨길 수 있으니. 대답이 없자 그가 걸음을 멈췄다. 마주 잡은 손이 너무 뜨거웠다. 땀이 났다. 손을 놓고 싶었지만, 그는 더 힘을 줄 뿐이었다.
“아직 확인을 못 했나?”
아직 못 했으면 다시 한번 확인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 느긋한 그의 말투가 얄미웠다.
“…했어요.”
그녀가 작게 웅얼거렸다.
“응?”
“확인했다고요.”
“뭘? 뭘 확인한 거지?”
리아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는 집요하게 질문을 했다.
“있어요. 당신은 몰라도 돼요.”
회피하는 그녀의 말에 그가 웃음을 흘렸다.
“그만 가요. 배가 고파요.”
리아가 그를 재촉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유쾌한 듯 웃으며 다시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모습이 얄미운 리아는 애써 심술궂은 목소리를 냈다.
“다들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아주 잘 웃는군요.”
“그러게. 나도 내가 놀랍군.”
장미 덩굴을 벗어나자 주위가 조금은 밝아졌다. 라이언은 메어놓은 말을 끌고 왔다.
“내가 당신을 들어 올려 말에 태워도 되겠소?”
아까 그녀가 했던 질책을 기억하는 듯 그가 깍듯하게 물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그 모습이 더 얄미웠다. 그는 왠지 그녀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다 알고 행동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좋아요.”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언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말 위에 태웠다. 그리고는 자신도 순식간에 말에 올라탔다.
“날이 어두워 위험하군. 손잡이를 꼭 잡으시오.”
그가 그녀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자!”
그가 힘차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리아는 주위를 떠도는 장미 향기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
“마님, 잠자리를 봐드릴까요?”
밤이 깊었는데 아직도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리아는 그런 메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기계적으로 머리를 빗어 내릴 뿐이었다.
“마님!”
이번엔 메리가 리아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
“응? 왜?”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리아가 깜짝 놀라며 메리를 돌아봤다.
“벌써 밤이 늦었어요. 그만 주무셔야죠.”
졸음 가득한 메리의 얼굴을 보자 리아는 미안해졌다.
“그래 자야지. 메리도 그만 나가 봐.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리아의 말에 메리가 고개를 숙이며 밤 인사를 건네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리아는 습관처럼 남편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쳐다봤다.
‘더는 초야를 미룰 수 없겠군.’
‘더 기다릴 수 없어.’
장미 덩굴 앞에서 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리아는 손을 들어 올려 라이언과의 키스로 부푼 입술을 어루만졌다.
여린 입술은 거친 남자의 숨결을 견디지 못하고 부어올라 있었다. 분명 메리도 눈치챘으리라. 리아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정말 오늘 밤 저 문을 열고 날 찾아올까?’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의 뜨거운 손길이 떠올라 숨이 가빠졌다.
“그래서 넌 뭘 확인한 거지?”
리아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는 물었다. 뭘 확인했느냐고. 리아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그와의 두 번째 키스로 확인한 것이 무엇인지.
그건 바로 그의 유혹에 먼저 넘어가 버린 자신이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 울고 싶었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한번 자각한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고 더 크게 요동치며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철컥-
그때 그의 방과 연결된 문이 열렸다. 철컥하고 문이 돌아가는 소리에 리아는 정신없이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가 왔어. 그가 온 거야.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손끝이 저릿하고 숨이 가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꾸만 귓가에는 초야를 미룰 수 없다는 라이언의 말이 반복해서 맴돌았다.
그만! 그만!
진정해야 하는데, 침착해야 하는데.
진정과 침착은커녕 그녀의 이성은 벌써 어딘지 모르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탁-
이번에는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그가 방 안에 들어왔다. 리아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를 보면 장미 덩굴에서의 뜨거운 키스가 다시금 떠오를 것만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그에게 퍼부었던 부끄러운 키스 역시도. 눈을 감아도 그 생각뿐인데 그와 마주한다면 얼마나 더 선명해질까?
그깟 키스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싶은데….
남편 앞에만 서면 언제부터 이렇게 발연기 전문가가 된 것인지. 리아는 도무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미 한 공간 안에 들어와 있을 라이언을 생각하며 리아는 작은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제발 그렇게만 하자.
분명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 마음은 자꾸 모르겠다고 도망을 쳤다.
리아는 혹시라도 그와 눈이 마주칠까 봐 거울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고, 자꾸만 느껴지는 초조함에 주먹을 마구 쥐었다 폈다.
‘나는 그를 좋아해.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어.’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처음 만난 그 날부터 그는 자신을 뒤흔들었고 결국 사랑에 빠지게 하였다는 것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영화나 책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를 향해 끌리는 마음을 애써 부인했었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그를 이용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를 신경 쓰는 거라고 변명했었다.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녀를 굴복시켰다.
‘좋아하면 뭐!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양방이 아니라 일방이라는 것뿐.
‘그래도 세상은 날 버리지 않았어!’
그래, 그를 사랑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거울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중얼대는 리아의 귀로 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벌써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거울에 비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를 빗고 있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라이언은 거울 속 그녀를 끈질기게 쳐다봤다. 마치 그녀의 생각이 다 보이는 것처럼. 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리아의 손에 쥐어진 빗을 잡아들었다.
“…왜?”
그제야 고개를 돌려 현실을 마주한 리아를 향해 그가 씩 웃었다.
“내가 머리 빗겨주는 걸 좋아한다는 거 잊었나?”
리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수리에서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그는 아주 느리게 빗을 빗어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혹시 술 마셨어요?”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그 상황이 웃긴 듯 똑같이 피식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라이언을 마주치기 두려웠던 리아는 피곤함을 핑계 삼아 방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메리에게 전해 듣기로는 라이언은 기사단장 몇몇을 불러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그가 가까이 서자 그에게서 희미하게 알코올 향이 났다. 살짝 기분 좋을 정도로 달콤한 향.
“영지민 중 한 명이 사과주가 아주 맛있게 익었다고 가져왔더군.”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마셨다고 인정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사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설마… 지금 취한 건 아니죠?”
할 말이 많은데, 서로 협의해야 할 사항이 가득한데. 리아는 그가 취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설마 취했겠어?
“내가 취하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나?”
라이언은 멀쩡했지만, 리아의 반응이 보고 싶어 일부러 이상하게 대답을 했다. 잔뜩 긴장한 리아의 얼굴이 그의 말에 순간 울컥 달아올랐다.
리아는 가만히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랐다. 술은 사람의 마음을 느긋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지금부터 자신이 요구하는 사항을 그가 잘 들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라이언과 진정한 부부가 되기 전에 그녀는 요구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에 모든 것을 거는 것 보다, 더 확실하고 정확한 게 필요했다.
라이언의 손은 여전히 리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관능적으로 음미하듯 빗어 내리는 중이었다.
“그럼 좋아요. 취했어도 어쩔 수 없죠.”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빗질을 멈추고 이번에는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당신 머리카락은 실크보다 부드럽군.”
취했군. 역시 취했어. 취하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는 없었다. 잘만 유도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아는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눈까지 감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표정은 평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였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계속될수록 두근거림이 심해지고 머릿속이 빙글빙글 춤을 췄다. 자신에게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지고 있었다. 리아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카락 속에 파묻힌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만.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라이언이 감았던 눈을 떴다.
“뭐지?”
“여기서 이렇게 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테이블로 가요.”
리아는 라이언의 손을 그대로 잡고 일어났다. 그와 닿아 있는 손끝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라이언은 가만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눈이야.’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리아는 도무지 그의 속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둘은 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여전히 손은 맞잡은 채로 테이블 위에 올려있었다. 리아가 손을 잡아 빼려고 하자 그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힘을 줬다. 그런 라이언을 향해 리아도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손을 놔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요.”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그의 힘이 약해졌다. 리아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빼냈다.
“초야를 치르기로 한 거 아니었나? 무슨 할 말이 또 있다는 거지?”
라이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놈의 초야! 초야! 초야!’
리아는 그를 향해 마구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앞으로 얻어야 할 것이 많기에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진정한 부부가 되기 전에 미리 협의해야 할 사항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