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장미 향기에 취해
장미 구경을 하겠다며 리아가 앞으로 걸어나가자 라이언은 근처에 말을 매어두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의 큰 보폭은 금방 그녀를 따라잡았다. 바로 뒤에서 그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으며 말을 꺼냈다.
“여긴 꼭 미로 같네요.”
그들이 구경하고 있는 곳은 가장 오래된 장미 넝쿨 더미였다. 지난 30년간 한 번도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미로.
“조심해.”
리아가 미처 보지 못하고 돌부리에 걸려 휘청대자 라이언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바닥이 엉망이군.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겠어.”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그의 팔에 끼워 넣었다. 능청스러운 그의 모습에 리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씩 웃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의 변덕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조금 가까워진 듯싶었는데 매튜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다시금 철벽을 쳐서 자신을 당황케 하더니 지금은 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리아는 자신의 팔을 꼭 잡은 라이언의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진정한 밀당 고수였을 거야. 이 남자.
“예쁘긴 하네요. 좀 정리해야 하겠지만.”
리아의 말에 라이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끝도 없이 펼쳐진 장미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향기로웠다.
“예쁘지만 쓸모없지.”
“이젠 쓸모 있게 되겠죠.”
“그랬으면 좋겠군.”
라이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그동안 무책임한 영주였다. 그의 돈으로 영지민들을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 스스로 살아남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장미와 당신의 나이가 같네요.”
리아가 문득 생각난 듯 그를 보며 말했다. 매튜가 말하기론 장미를 심기 시작한 지 30년이라고 했다.
“그런가?”
그녀의 말에 라이언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당신과 친구네요. 이 장미.”
리아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미 덩굴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더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당신 친구 없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보면 알아요. 당신 같은 성격은 뻔하거든요. 아니지, 오히려 당신이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고 있을지도.”
“왕…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지 답답해하는 라이언의 표정이 우스웠다. 리아는 웃음을 삼키며 답했다.
“있어요. 그런 게.”
“…그럼 당신도 왕따인가?”
“네?”
“당신 성격도 딱 친구가 없을 것 같아 보이는데.”
라이언의 공격에 리아가 배를 잡고 웃었다. 생각보다 눈치도 빠르고 유머 감각도 있는 남자였다.
“하하하하.”
사랑스러운 리아의 웃음소리가 장미 넝쿨 사이를 타고 빙글빙글 돌았다. 어느새 라이언도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웃었는지 리아가 허리를 펴고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장미 넝쿨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공작님. 오늘 제가 공작님께 30년 된 친구를 소개해 드릴게요.”
리아가 장미를 꺾기 위해 손을 뻗었다.
“조심!”
라이언이 소리치며 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얏.”
라이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리아는 장미 가시에 찔리고야 말았다. 라이언은 다친 리아의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괜, 괜찮아요.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 걸 몰랐나?”
라이언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특히 오래된 덩굴장미 가시는 더 거칠고 뾰족하지.”
그녀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너무 강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이마에 바로 느껴질 정도로.
리아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어내려고 힘을 줬다. 그러자 그가 더 세게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피가 나는군.”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순식간에 손수건 끝이 붉게 물들었다.
“제가 할게요.”
손수건으로 감싼 손가락을 지혈하듯 꼭 쥐고 있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말했다.
손으로 향해 있던 라이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놔주지 않고 있었다.
그와 닿은 손이 미친 듯이 뜨거웠다. 그건 분명 상처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은 그녀를 더는 말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게 만들고 있었다.
리아는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그를 향한 몸의 반응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탐욕스런 눈빛에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코끝으로, 코끝에서 입술로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그의 관능적인 시선은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고 초조함에 몸을 떨게 했다.
이것은 욕망일까?
이미 둘 사이에는 뜨거운 공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순간이 끝이 나고 그가 서서히 그녀를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녀는 장미가 보고 싶다고 했고 그는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신중하지 못한 선택에 대한 후회는 그를 기다리며 서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시작되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이고 부드러운 등이 가슴에 부딪히며, 향기로운 그녀의 체취가 정신을 사로잡아도 그는 최선을 다하여 인내했다. 한낱 육체의 욕망에 무릎을 꿇고 싶지는 않았다.
육체의 욕망.
그는 그녀를 향해 끌리는 마음을 육체의 욕망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것 이외에는 자신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모든 일에 변수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육체의 욕망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자만에서부터.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는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잡아당기고 있었다.
손수건 아래 그녀의 손가락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녀가 움직일수록 그는 더 세게 힘을 줄 뿐이었다.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그를 향한 갈망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는 그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그녀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 역시도.
그의 시선에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한 것일까? 창백한 듯 하얀 피부는 붉은 입술을 더 유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한입에 삼켜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떨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간절하게 그녀를 원하고 있는지.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싶었다. 그건 더 이상 선택이 아니었다. 그를 한계에 밀어붙이듯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보석처럼 반짝였다.
드디어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녀의 피로 얼룩진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손이 자유를 찾음과 동시에 이번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감겨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는 결국 욕망에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참았던 욕망만큼 그는 다급했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라이언은 그녀에게 뜨거운 숨을 불어 넣으며 그동안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촉감은 그를 더 참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예상대로 너무나 달콤했고 한 번의 입맞춤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상대였다.
리아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는 듯 라이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그는 집요하게 자신을 탐하고 있었고 놓아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로 전해지는 충족되지 않는 황홀함에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물자 그녀의 입에서 통제되지 않는 신음이 세어 나왔다.
그는 너무 능숙했고 그녀는 그저 끌려갈 뿐이었다. 그가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면 넣을수록 그녀는 더 애가 닳았다.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육체의 욕망은 두 사람을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이제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둘은 서로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달콤함을 음미하고 있었다.
라이언이 끙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서 힘겹게 입술을 떼어냈다. 그의 온기가 사라지자 리아의 입에서도 아쉬운 듯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벌써 어두워졌군.”
라이언이 리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대며 말했다.
리아는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더 있다가는 길을 잃을지도 몰라.”
이어지는 그의 말에 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 듯이 그에게 매달려 키스를 갈구하던 자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휘몰아쳤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다고!
리아가 한 발짝 물러서며 그에게서 이마를 떼어냈다.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뜨거워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라이언이 리아의 양어깨를 잡아당겨 자신의 앞에 다시 데려다 놓았다.
“내게서 떨어지지 마.”
“…그냥 너무 가까워서….”
“더는 초야를 미룰 수 없겠군.”
“네? 그게 무슨….”
정신이 번쩍 든 리아가 크게 소리쳤다.
“당신도 같은 생각일 줄 알았는데.”
물론 그녀가 강하게 반응하긴 했었다. 그의 키스는 너무 달콤했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같았으니까.
“그래도 약속이….”
“더 기다릴 수 없어.”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다시 입맞춤해 올 것처럼.
리아는 그의 시선을 차단하듯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가렸다. 오랜 키스로 부푼 입술이 살짝 아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를 유쾌하고 즐겁게 만들었던 자신의 말솜씨가 다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라이언이 입술을 가리고 있는 리아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아!”
손끝에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리아는 현실로 돌아왔다.
“괜찮나?”
그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해 그녀가 아파하는 것을 미안해하는 것처럼.
“괜찮아요. 그냥 좀 따가울 뿐이에요.”
리아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손끝의 통증은 그녀의 정신을 맑아지게 만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말하라는 듯.
“갑자기 후계자가 필요한 이유가 뭐죠?”
늘 궁금했었다. 3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그녀가 전해 들은 바로는 그는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변한 그의 행동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계자를 원하는 데도 이유가 필요한가?”
물론 물어보면서도 그가 답을 할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날 원하는 건가요, 아니면 후계자가 급한 건가요?”
“둘 다. 뭐 오늘은 당신이라고 해 두지.”
그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그의 손길에 그녀의 몸이 다시 떨렸다.
지나치게 위험했다. 그녀는 다시 그에게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를 볼 때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단순한 욕망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 단 한 번이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리아는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다시 움켜잡았다. 가시에 찔린 손끝이 아렸지만 상관없었다. 손끝의 통증보다 더 심하게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녀의 호흡을 거칠게 만들고 있었으므로.
“미안하지만 확인 좀 할게요.”
“확인?”
그가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리아는 발끝에 힘을 주며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는 놀란 그의 입술을 단숨에 베어 물었다.
“흡.”
리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라이언이 놀란 신음을 내뱉었다. 순간 달콤한 그녀의 숨결이 그의 입안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는 것도, 빨리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그의 머릿속에서 모두 잊혀졌다. 오직 이 순간 그에게 안겨 오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리아의 수줍은 듯 서툰 혀는 그의 입 안쪽을 감질날 정도로 간질이며 돌아다녔다. 라이언은 그녀가 더 쉽게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