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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35화 (35/116)

35화. 첫 외출

약속된 시간에 딱 맞춰 밖으로 나온 리아는 보닛 끈을 만지작거리며 라이언을 기다렸다. 옷차림은 매우 단순했고 활동을 하기에 편한 드레스였다.

머리는 하나로 틀어 올려 보닛 속에 집어넣었다. 답답하고 불편해서 쓰고 싶지 않았지만 메리는 그랬다가는 큰일 난다며 야단법석을 떨어댄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메리는 오후 햇볕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시냐며 마님의 희고 고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양산도 쓰시라고 하고 싶다고 귀가 아프게 잔소리를 해댔다.

리아도 딱히 피부를 태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레오니의 몸 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이 하얀 피부였으니.

부츠를 신은 발이 어색한지 리아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툭툭 찼다. 괜히 장미를 보러 간다고 한 건 아닐까? 라이언과 단둘이 나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야. 이건 절호의 기회야!

기회였다. 그와 단둘이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알 시간이 길어진다는 의미였다.

단둘?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정말 미치겠다. 하나만 하자 하나만. 유혹하던 거부 하던 둘 중 하나만.

리아는 자꾸만 변덕을 부리는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다 그놈 탓이었다. 그래 모든 것은 다 남편 탓이었다. 그는 가까워질 듯 틈을 주다가도 순간 철벽을 쳤다. 쉬운 남자는 아니었다.

‘어려워. 어려운 남자야.’

“빨리 나왔군.”

갑자기 들려오는 라이언의 목소리에 리아가 깜짝 놀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엄마야!”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러지?”

그는 커다란 검은 말 옆에 서 있었다.

“그, 그게 뭐예요?”

말을 타고 간다고? 리아는 갑자기 자신의 마지막이 떠올라 온몸이 떨렸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던 잔인한 기억.

“걸어가기엔 먼 거리야. 그렇다고 마차를 타고 갈 수는 없지 않나?”

“그, 그냥 걸어가면 안 될까요?”

“그랬다가는 오늘 안에 돌아오긴 어렵겠군. 말을 타고 가는지 몰랐나?”

그가 그녀를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몰랐어요.”

“몰랐다고 하기에는 승마복을 아주 잘 차려입고 있군.”

리아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승마복이라고? 그냥 입혀주는 대로 입었을 뿐인데.

그러고 보니 그의 옷차림도 아까와는 달랐다. 그 역시 부츠를 신고 몸에 아주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주 딱 달라붙은 바지를.

리아가 그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위험했다. 너무나도. 그녀는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기 위해 의지력을 총동원했다.

“당신은 그냥 내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돼.”

그녀의 떨리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순식간에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의 손에 리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손을 잡는다면 다시는 그에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리아의 온몸을 강타했다.

그녀는 말 위에 올라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뜨거운 오후 햇살에 그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몰라. 한번 가 보는 거야.’

다시 눈을 뜬 그녀는 그의 손 위에 떨리는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라이언은 자신의 손 위에 깃털처럼 가볍게 올려진 그녀의 작은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손을 놓고 도망가 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망치기 전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멀어지기 전에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구쳤다.

라이언이 손을 잡자 리아는 한쪽 발을 말안장 발판에 끼워 넣었다. 발판을 밟고 몸을 위로 올릴 생각이었다. 리아가 발에 힘을 주며 몸을 들어 올리던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그가 반대편 손으로 리아의 허리를 잡아 한 번에 들어 올린 탓이었다. 라이언의 빠른 동작으로 인해 그녀는 순식간에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앗! 놀랐잖아요.”

라이언의 행동에 놀란 리아가 질책하며 흔들리는 몸을 바로 하고 양쪽 발판에 발을 끼워 넣었다.

“말을 타본 적이 있군.”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행동에 라이언이 물었다.

“…처음이에요.”

리아는 모르는 척 답했다. 물론 그 앞에 ‘이번 생에는’이란 말이 빠져 있었지만.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올려다봤다.

“좀 더 예의 있게 행동해 주시면 좋겠어요. 예고도 없이 잡아당겨서 깜짝 놀랐잖아요.”

라이언은 그녀와의 외출이 시작부터 맘에 들었다. 그녀와 가까이 앉은 것도 그러했지만, 그에게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매우 불평스러웠지만, 그는 특히 그 점이 좋았다.

“놀랐다면 미안하군.”

라이언이 리아의 몸 옆으로 팔을 뻗어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너무 위험해.’

너무 가까웠다. 그가 말을 할 때면 귓가에 그의 숨결이 바로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 그의 턱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등은 그의 가슴과 맞닿아 있었다.

그녀는 애써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안장 앞부분에 달린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고가 났던 날 이후 처음 말을 타보는 거였다. 다행히도 혼자가 아니었지만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말에 올라탄 지 몇 분이 지났는데 그는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리아가 참다못해 물었다.

“출발 안 할거에요?”

“보닛을 꼭 써야 하나?”

출발하지 않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그의 입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하얀 걸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이야!

리아가 라이언의 투정에 어이가 없는 듯 황당해하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그 황당한 말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돌아본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것도 매우.

“좀 참아주세요. 제 얼굴이 타는 것보다는 당신의 그 이상한 신경을 좀 억누르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녀의 지적에 그가 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예민해서… 그냥 당신 얼굴이 좀 타는 게 좋겠군.”

이어지는 황당한 말에 놀란 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턱밑으로 올라오더니 보닛 끈을 단번에 잡아당겼다.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정신을 차린 리아가 그의 행동을 저지했을 때는 이미 불쌍한 보닛이 벗겨져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후였다. 보닛이 벗겨지자 안으로 말아 올린 그녀의 머리가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디선가 메리가 보고 있다면 아마 기절초풍을 했으리라.

“이제 좀 낫군.”

그는 그녀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더니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는 그녀를 향해 앞을 보라며 턱을 움직였다.

“그만 출발하지. 말 위에서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위험해.”

리아가 당황한 정신을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말이 움직였다. 그의 이상한 행동 덕분에 리아는 다시 말을 탄다는 두려움도 잊은 지 오래였다.

라이언은 마을을 통하지 않고 돌아서 나가기 위해, 성의 옆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온 리아가 자신의 등에 부딪히는 라이언의 온기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성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벅차올랐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멀리 집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얼마나 걸리나요?”

리아가 크게 소리쳤다. 그녀의 질문에 그가 그녀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워진 그의 숨결에 리아가 놀라서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라이언은 그대로 그녀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십 분. 마을을 돌아서 가야 해서 그 정도 걸릴 것 같군.”

그는 대답을 마치고는 바로 고개를 들어 다시 말을 재촉했다.

“핫.”

리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말이 세차게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등이 딱딱한 그의 가슴에 반복해서 부딪혔다. 그는 너무 가까이 있었고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너무 유혹적이었다.

장미밭에 도착하기까지 20분.

리아의 인생에 있어 가장 긴 20분이 될 것 같았다. 리아는 그의 채취에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았다.

***

“아름답네요.”

장미는 아름다웠다. 장미밭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미로와도 같았다.

라이언은 리아의 키보다 더 큰 장미 넝쿨 앞에 말을 세웠다. 먼저 말에서 내린 라이언이 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보던 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잡아당기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 라이언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성안에서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달콤한 장미 향이 그를 변화시킨 걸까? 그녀는 그의 변화에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주 맘에 들었다.

“걱정 마. 이번에는 경고하고 내려주지.”

“겨, 경고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리아의 허리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라이언!”

리아가 소리를 쳤지만,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 단번에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땅바닥에 발이 닿자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바람을 맞으며 말을 탄 것을 티 내듯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춤을 췄다. 라이언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손을 들어 리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뜨거운 그의 손이 귓불을 스치며 그녀의 옆얼굴을 따라 내려왔다. 그가 그녀의 아래턱을 살짝 문지르자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고정되어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레오니.”

라이언의 말에 리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란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행동에 라이언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가 날 레오니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잖아. 내가 이제 레오니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에서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에게 자신이 진짜 레오니가 아니고 리아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말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겠지. 지난 3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내가 레오니야.”

리아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그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왜 그러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 장미 구경을 하려고요. 그러려고 나온 거잖아요.”

리아가 장미 넝쿨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는 거짓말을 들킬 것만 같았다. 자신이 레오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알 것만 같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새까만 눈은 그녀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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