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장미 비누
“…좋겠어요?”
라이언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구요!”
반복되는 리아의 외침에 라이언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불러도 듣지 못하고.”
라이언이 잘 안 들리는 척 대답을 회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거리였다. 그는 천천히 걸어 그들이 있는 소파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매튜의 옆자리에 앉았다.
매튜와 리아가 아까와는 또 달라진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라이언은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뭐라고 했지?”
리아는 라이언의 행동을 지적하고 싶었다. 둘이 앉기에는 무척 비좁은 소파에 몸을 구겨 넣은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 얄미웠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한 표정.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
결국 자존심이 승리했다. 리아는 그의 행동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모른척하며 목소리 톤을 매섭게 올렸다.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요. 엉망이에요. 지금껏 영지관리를 어떻게 한 거죠?”
리아는 한껏 거만한 표정으로 신랄하게 말했다. 장미 비누를 만들기는커녕 그 전에 갖춰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리아의 지적에 라이언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고 그는 그동안 관리라고 할 만한 행동을 전혀 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영지 주민들은 어떻게 생활을 유지한 거죠? 들판에는 온통 장미꽃만 가득하다는데….”
그것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넘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 매튜가 라이언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공작님께서 영지를 돌려받으신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선대공작님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공작가를 통해 말린 장미로 만든 향낭 주머니를 판매하고, 공작가의 땅에 소작을 지어서 자급자족을 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관리해 줄 사람이 없다 보니 서로 간에 싸움이 붙어서….”
“그래서 엉망이라는 소리인가요? 그럼 장미밭을 갈아엎어서 농사를 지으면 어때요?”
리아의 말에 매튜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꽃밭은 법으로 보호받는 곳입니다. 영지의 주인은 공작님이시지만 그것만큼은 함부로 건드릴 수가….”
뭐 그런 망할 법이 다 있어? 그린벨트야 뭐야. 리아는 황당한 법에 대해 투덜댔다.
“그럼 다른 꽃을 심는 건 어때요? 약초로 쓸 수 있는 꽃을 심으면 아주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것도….”
“왜요? 그것도 금지예요?”
“저기 그게… 마을별로 대량으로 심을 수 있는 꽃이 정해져 있습니다. 가정마다 정원에서 한두 가지 심는 것은 괜찮지만, 법의 보호를 밭는 꽃밭에는 정해진 꽃만 심을 수가 있습니다.”
리아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뭐요? 그런 엉터리 법이….”
“사실 그것도 마구잡이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10년마다 영주님들끼리 협의 하에 품목을 결정하는데… 저희는 벌써 30년째 장미를….”
“왜요? 왜 우리는 30년째 장미죠? 다른 곳들은 그럼 뭘 심어요?”
장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엘리시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장미인 만큼 좋은 대접을 받기는 어렵다. 집집마다 장미 묘목 한두 그루는 기본으로 심어놓을 만큼 키우기도 쉽고 흔한 꽃이었다.
“다른 영지는 라벤더, 재스민, 아카시아, 해바라기를 심고 있습니다.”
다 차로 마시거나 꿀을 채취하거나 활용도가 높은 꽃이었다.
“어째서 이곳만….”
“내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소. 그래서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 또 장미를 심게 되었지. 그리고 그 이전에는… 그건 모르겠군.”
심드렁한 라이언의 대답에 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 30년간 가난했고 앞으로 10년 동안을 또 가난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장미 비누라는 말에 눈을 반짝인 이유가 있었다.
“그럼 앞으로는 회의에 꼭 참석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생각이 있나요?”
리아가 라이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앞으론 장미 말고 다른 걸 선택하도록….”
“장미요. 무조건 장미로 하세요.”
리아가 라이언의 대답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장미를 가지고 고작 말려서 향을 내는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심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납득가기도 했다.
중세시대 유럽의 모습이 딱 이러할 것 같았다. 그녀의 얕은 지식을 기반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도 없고 냉장고도 없는 이곳에서 불편한 것 없이 적응하고 사는 것이 신기했다. 원래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처럼. 마치 처음부터 레오니가 그녀였던 것처럼 리아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레오니의 몸이 이 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그럼 무엇부터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매튜가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누는 다 사서 쓰는 건가요? 비누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이곳 사람들은 어째서 향이 나는 비누를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써 보면 깜짝 놀랄 텐데.
향기가 필요한 곳에는 무조건 향낭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목욕할 때도 목욕물에 말린 꽃잎을 넣었다. 아마 향기가 나는 비누가 나온다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것이다.
“우선은 영지민들을 상대로 조사하겠습니다. 아마도 마을에 비누를 만들 수 있는 자가 한둘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장미를 보고 싶어요.”
사실 그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지금 장미를 본다고 해서 당장 비누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답답했다. 그리고 이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녀가 아는 세상은 오직 베드포드 성뿐이었다.
리아의 말에 매튜가 곤란한 듯 라이언을 돌아봤다. 라이언은 조금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을 한 듯 표정을 굳혔다.
“내가 데리고 가 주지.”
“언제요?”
“원한다면 당장.”
“뭐 당장은 아니고, 이따 오후에 가도록 하죠. 우선은 매튜와 장미 비누에 관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요.”
리아가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시큰둥하게 말을 돌렸다. 라이언이 직접 데리고 가 주겠다고 나설 때부터 뛰기 시작한 심장은 멈출 줄을 모르고 쿵쿵대고 있었다.
“성에서도 비누를 사용하잖아요. 그렇다면 분명 그 구입처가 있을 거예요. 전부 조사해 줘요. 비누를 따로 구입하는지 직접 만들어서 쓰는지.”
“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장미 비누를 만들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우린 비누를 대량으로 생산해서 엘리시아 곳곳으로 판매해야 해요. 그 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겠죠. 그냥 몇 개 만들어서는 영지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요.”
공작 가의 주도 아래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했다. 비누 만드는 방법을 그냥 던져주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각하께서 이런저런 방법을 연구 중에 계십니다. 오직 장미 비누 한 가지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매튜와 같은 의견이었다. 아무리 장미 비누가 그동안 이 세계에 없었던 획기적인 발견이라 해도 영지민 모두가 그곳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 했고 또 누군가는 가축을 키워야 했다.
리아는 가난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는 흔하디흔했던 장미 비누가 이곳에서는 미래를 걸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발명이라는 것이 그렇듯 그녀가 장미 비누를 만들어낸다면 여기저기서 그것을 따라 한 비누들을 내어놓겠지만, 언제나 시작이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앞으로 잘 해 봐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부디 성공적으로 일이 진행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제 대화는 끝이 난 건가?”
리아와 매튜의 감격스러운 대화에 라이언이 끼어들었다.
“뭐, 대충은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말이죠.”
“그 먼 길에 첫발이라도 디뎠으니 참 다행이군.”
“그러게 말이에요.”
알 수 없는 라이언의 표정을 살피며 리아가 대답했다. 그는 참 어려운 남자였다. 조금 알 것 같다가도 금방 아리송해지는 매력이 있었다.
“그럼 이제 자리를 피해 주시겠소? 매튜는 당신이 지시한 일들을 알아봐야 하겠고 나 역시 밀린 일이 많아서 말이지.”
금방 장미를 보러 데려가 준다고 말했던 모습은 또 온데간데없이 그가 또 차갑게 그녀를 밀어냈다.
“저도 할 일이 몹시 많아서요. 당신이 늦게나마 준 결혼 선물도 살펴봐야 하고 어디다 돈을 써야 할지도 고민해야 하거든요. 쓰라고 준 수표장을 쓰지 않으면 당신이 서운할 거 아니에요.”
리아의 대꾸에 라이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듯하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모른척하며 서류와 수표장을 꼼꼼히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물은 고마워요. 감사 인사는 제때 하는 거라고 배워서 말이죠.”
리아의 말에 느끼는 바가 있는지 라이언 역시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나 역시 고맙소. 영지민들을 위해 솔선수범 나서 줘서 말이요. 아마도 다들 공작부인을 칭찬할 거요.”
“당신은요?”
“나?”
“당신도 날 칭찬하나요?”
“아직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지. 과한 칭찬은 독이 되는 법이야. 다만 모른척하지 않고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준 것은 무척 고맙소.”
리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니까 그 말은 칭찬을 받고 싶으면 장미 비누를 빨리 만들어내라는 말이잖아.
“좋아요. 결과물이 나오고 난 뒤에 다시 묻죠. 그럼 이따 약속한 것이나 잊지 마세요. 이번에도 사라져 버리면 그냥 참지 않겠어요.”
마지막 말을 남긴 리아가 도도하게 서재를 빠져나갔다. 남겨진 라이언과 매튜는 한동안 아무런 대화도 하지 못했다.
꼭 작은 폭풍이 몰아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작은 폭풍이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