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33화 (33/116)

33화. 늦은 결혼 선물

“공작 각하.”

“들어오게.”

라이언은 매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어오라고 소리를 쳤다.

“아, 마침 함께 계셨군요.”

매튜가 서재에 있는 리아를 보고 반가워하며 인사를 했다.

“일은 다 끝냈나?”

라이언이 리아에게 향한 매튜의 시선을 차단하며 물었다.

“그, 그게….”

매튜가 공작부인이 있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걱정이 된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괜찮으니 말하게.”

라이언의 말에 매튜가 리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디께서는 렌포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설득을 하고 부탁을 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으십니다.”

매튜는 아침부터 페넬로페를 설득하기 위해 다녀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없던 저택을 만들어내면서까지 근처로 따라온 그녀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벌써 렌포드에 있는 모든 하인을 다 데리고 오셨습니다. 쉽게 떠날 것 같지가….”

라이언이 페넬로페 때문에 골치가 아픈지 미간을 문질렀다.

“우선 그냥 두게. 내 말도 안 듣는데 자네 말이라고 듣겠나?”

매튜가 라이언의 말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진짜 이웃사촌이 되는 거 아니야? 같이 살자고는 안 하겠지?’

리아는 친동생이나 다름없다는 라이언의 말이 거슬렸다. 남편을 남자로 보는 것이 분명한 여자를 근처에 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떠나지 않는 한 쫓아낼 방법 역시 없었다.

페넬로페. 그녀 때문에 앞으로 골치가 아파질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나저나 난 왜 반가워한 거예요?”

매튜가 서재로 들어오면서 ‘마침 함께 계시네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 리아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마님께 전해 드릴 것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한테요?”

그때 라이언이 일어나 리아의 옆자리로 건너왔다. 그리고는 서 있는 매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매튜가 금방까지 라이언이 앉아 있던 소파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리아가 황당한 듯 그를 돌아보자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매튜가 당신 옆에 앉을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고 계속 서 있게 할 수도 없고.”

설명하는 라이언의 표정이 이상하게 능글맞았다. 그의 시선에 그녀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모른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위험해!

너무 가까웠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가 스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내뿜는 열기에 리아는 자신의 뺨이 더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오늘 남편의 얼굴은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 차갑게 인상을 쓰고 있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무표정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부드러운 그의 얼굴은 그녀를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의 외모는 정말 취향 저격이었다.

그는 그녀의 미적 기준에 매우 부합되는 남자였다.

딱 벌어진 어깨도, 새까만 머리도 남성미가 가득한 굵은 얼굴선도. 모두 리아의 취향이었다. 심지어 이마의 흉터도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물론 머리를 살짝 길러서 가린다면 더 보기 좋겠지만 지금도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를 유혹해서 잘 먹고 잘살겠다는 그녀의 계획에 그의 외모가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매우 못생긴 남자였다면 그녀는 심각하게 미래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잘생겨서 다행이야.

모름지기 잘생긴 게 최고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남편이 그녀가 만족할 만한 외모를 지닌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얼굴값을 하려는지 벌써 그녀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지만 말이다.

“마님?”

매튜의 부름에 리아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남편은 그녀의 옆에 매우 가깝게 앉아 있었다.

“뭐라고 했죠?”

매튜에게 대답을 하는 그녀의 신경이 모조리 옆에 앉은 남편에게 가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우선 이걸 받아주십시오.”

매튜가 가져온 서류를 리아 앞에 펼쳐 놓았다.

“이게 뭐죠?”

“공작님께서 마님께 드리는 일종에 결혼 선물입니다.”

“결혼 선물?”

고개를 갸우뚱하며 리아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처음 보는 글자였지만 읽기 어렵지는 않았다. 다행히 레오니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왕께서 결혼 선물로 주신 것들이지.”

라이언이 끼어들었다. 그는 3년 전 왕이 결혼 선물로 하사한 것들을 모두 아내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것도.”

매튜가 이번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굵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공작님의 인장이 찍힌 수표장입니다. 앞으로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면 그저 이 수표장에 금액을 적어 넣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엘리시아 그 어디에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백지수표였다.

“내가 얼마나 사치가 심한지 모르시나 봐요?”

물론 그녀는 사치보다는 저축을 좋아한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고 모름지기 저축이 최고였다.

라이언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든지 써 보라는 듯.

“나중에 후회하셔도 소용없어요.”

리아가 묘하게 웃으며 수표장을 집어 들었다. 지난 생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아끼고 살았으니 이번엔 원 없이 써 볼 생각이었다. 상상 속에서나 했던 일들을 다 해 볼 작정이었다. 대놓고 사치를 권장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누구한테 돈을 빌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라이언의 말에 리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빌리고 싶어서 빌렸나! 가진 게 하도 없으니까 살려고 빌린 거지.

“저도 빌리는 것보다는 빌려주는 게 좋아요.”

리아는 자신의 말에 그가 웃음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밤 악몽을 꾸더니 사람이 변해버렸나? 갑자기 달라진 그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매튜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작의 처음 보는 모습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가 어려웠다. 그는 매우 편안해 보였고 즐거워 보였다.

매튜는 두 사람이 투닥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마님의 어떤 면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일까? 라이언이 억지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을 알게 되고 그 상대가 미친 공주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절망했었다.

라이언의 평범하지 않은 삶에 큰 짐이 하나 더 얹어진 것만 같아서.

매튜는 라이언의 모든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주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았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검을 찾기 전에는 절대 평온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검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다행히도 결혼과 동시에 미친 공주는 라이언에게서 멀어졌고 무엇 하나 요구하지도 않았다. 존재조차 잊을 정도로 아주 조용하게.

그렇지만 늘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 뒤로 3년이 지났고 여전히 모엘르 검은 주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이곳 베드포드 성까지 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미친 공주가 사실 미친 게 아니었다는.

더군다나 그녀는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던 라이언까지 사로잡고 있었다.

에리스의 딸. 가까이해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는 존재. 매튜는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주인이 그녀 때문에 웃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라이언은 다시 자신의 책상에 가서 앉았다. 그대로 그녀 옆에 있고 싶었지만, 아내는 그의 존재가 방해된다며 쫓아내듯 등을 떠밀었다. 그는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아내의 말을 따랐다.

그가 떠나온 소파에서는 여전히 아내와 매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 일은 많았으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라이언의 시선은 책상 너머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장미 이야기를 하며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내의 모습이 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강력하게.

거리가 좀 있는 탓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뭐 때문에 저렇게 인상을 쓰는 거지? 라이언은 당장 그녀 옆으로 다가가 찡그린 이마를 문질러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가 자신에게 최면을 건 것은 아닐까?

그녀를 좋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자꾸만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예상의 뛰어넘었고,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 마치 평범함을 거부하는 사람처럼.

그렇지만 그 독특함이 싫기는커녕 더 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그의 악몽보다 페넬로페를 더 궁금해했고 그의 상처가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여자였다.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지금 그녀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을 전혀 모르는 그녀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찡그린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 모습에 라이언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마에 올려놓은 하얀 손을 잡고 싶었다. 장밋빛으로 물든 뺨을 만져보고 싶었다. 섬세한 목선을 따라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고 싶었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감촉을 느껴보고 싶었다. 라이언은 애써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감은 그의 눈앞에 여전히 아내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정신 차려.’

책상 위에 올려 둔 손을 밑으로 내려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들며 통증이 느껴지자 다시 정신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손에 힘을 주며 꿈틀거리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사랑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자신은 사랑 따위에 휘둘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사랑이라는 불필요한 감정의 사치에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만큼 사람을 피폐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마치 예전의 그들처럼. 본인의 아픔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 부모라는 이름의 악마들처럼.

이대로는 위험했다. 가능한 한 빨리 원하는 것을 얻고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에게 애정을 느끼고 앞으로 생겨날 아이에게 소유욕을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들의 피가 그에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이언은 두 손을 들어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자신을 삼켜버리기 전에 아내와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소용돌이 안에 들어왔고, 그의 아내는 그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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