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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32화 (32/116)

32화. 정다운 대화

라이언은 서재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리아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지만, 이내 리아의 등장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움직이지?”

“누구한테 배웠거든요.”

“누구?”

“그런 게 있어요. 도둑같이 흔적도 안 남기는 사람이….”

라이언이 피식 웃으며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리아도 그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아침은 먹었나?”

라이언의 말에 리아의 시선이 빠르게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고는 그의 얼굴로 옮겨갔다.

“…덕분에요. 스테이크가 아주 맛있더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댔다. 리아는 라이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먼저 서재까지 불렀으니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가만히 그녀를 살피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장미 비누 만드는 법은 어디서 배웠지?”

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할 말이 고작 그거야?’

이런 망할.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았다. 자기한테 불리한 건 모르는 척하겠단 말이지? 자신이 뭘 가장 궁금해할지 알면서 딴소리를 하는 모습이 얄미웠다.

“지금 어디서 배웠는지가 중요해요? 내가 그걸 만들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리아의 대답에 라이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에게 아내는 말 한마디를 지려고 하지 않는 처음 겪어보는 유형의 여자였다. 그녀 같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페니조차도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지금 매튜를 불러 그 방법을 받아 적도록 해야겠군.”

이어지는 라이언의 말에 리아의 황당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도저히 못 참겠어!

“당신 좀 이상한 거 알아요?”

“무슨 말이지?”

“혹시 기억 잃었어요? 나 모르게 단기 기억 상실증 같은 거 걸리고 그런 거 아니죠?”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난감한 듯 턱을 문질렀다.

“그 매튜인지 뭔지 부르기만 해 봐요. 가만 안 있을 테니까!”

리아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라이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한테 정말 할 말 없어요?”

답답한 리아가 이제는 대놓고 물었다.

“어젯밤에는….”

한참을 망설이던 라이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러니까 당신이 뭐요?”

느린 라이언의 대답이 답답한지 리아가 채근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그러니까 그 밤에 어딜 다녀온 거예요? 그 백작 미망인 만나러 간 거 맞죠?”

마음이 급한 리아가 그의 대답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런 리아의 말에 잔뜩 긴장했던 라이언이 허탈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악몽을 꾼 것을 변명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악몽에 시달릴 때면 자신이 어떤 잠꼬대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는지를.

그녀는 그 모습을 다 보았을 것이다. 그는 아침 내내, 그녀가 물어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머리가 아프게 고민을 했다.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거짓말을 믿을 수 있도록. 그녀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악몽에 대해 진실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그런데 궁금한 게 그게 아니라고?

잔뜩 긴장했던 자신의 모습이 웃기고 허탈했다. 그녀는 그의 악몽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웃어요? 지금 웃은 거예요?”

그의 웃음에 그녀가 기분 나쁜 듯 쏘아붙였다.

라이언은 그녀의 기분을 생각해서 웃지 않으려고 했지만, 대단한 걸 따지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매섭게 뜬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 웃음이 났다. 라이언이 간신히 웃음을 안으로 삼키며 그녀의 질문에 답을 꺼냈다.

“페넬로페를 말하는 건가?”

“그러니까 어제 그 여자한테 갔다 온 게 맞죠? 그 늦은 시간까지?”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지?”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내가 바보예요?”

라이언은 점점 더 그녀가 맘에 들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와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그녀는 그에게서 새로운 감정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아주 낯설고 아주 간지러운.

그녀가 말을 꺼낼 때마다 그녀의 어깨 주변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손을 뻗을까 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당신 말이 맞아. 페니를 만나고 왔어.”

“페니요?”

리아의 말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래, 페넬로페 레스터.”

“애인 아니라면서요.”

“애인은 아니지.”

“그런데 그 밤에 그렇게 다급하게 만나러 갔다는 말이에요? 그래놓고 저보고 지금 애인이 아니라는 말을 믿으라고요?”

라이언이 두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오랜 친구는 밤에 만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

물론 그런 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보통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그녀의 촉이 둘 사이가 수상하다고 경보음을 울려대도 아니라는데 우겨댈 명분이 없었다.

“그럼 좋아요. 그 페니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친구 관계까지 다 말해야 하나? 좀 피곤하군.”

라이언의 대꾸에 리아가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뜨며 차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였다.

‘얄미워. 얄밉다. 말하는 꼬락서니가 진짜 한 대 패고 싶다!’

그렇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리아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그럼 저도 꼭 장미 비누 만드는 법을 알려 드릴 필요까지는 없겠네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이거야. 눈치로 짬밥을 먹은 게 몇 년인데 당하고 있을 리아가 아니었다.

“내가 말 안 하면 당신도 안 하겠다는 건가?”

“어머! 그렇게 들렸어요? 그게 아니라 저도 다 말하자니 좀 피곤해서요.”

리아는 라이언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남편의 피로는 아내의 피로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너무 피곤하다고 중얼대며 목을 좌우로 늘리듯 움직이고는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댔다. 그건 마치 그의 행동에 따라 자신의 대답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라이언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기대고 누운 아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페니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애인이냐고 물으며 신경을 쓰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일부러 더 모르는 척을 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놀리는 것도 그만둬야겠군.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장미 비누 만드는 법이 정말 필요했다.

“갑자기 피로가 확 풀리는군. 그러니까 궁금한 게 정확히 뭐지?”

라이언의 말에 리아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몸을 바로 했다.

“저도 갑자기 기운이 나네요. 아침부터 고기를 먹어서 그런가.”

능청스러운 리아의 모습에 라이언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당해낼 수가 없군.’

“그럼 우선 그 밤에 그녀를 찾아간 이유부터 들어보도록 하죠.”

페넬로페와 첫 만남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이곳 베드포드 성에서 맨발로 도망쳐 나왔을 때.

15살, 또래보다 한 뼘이나 작고 삐쩍 마른 작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원망만 가득했던 그때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모습에 라이언은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페넬로페와 관계에 대해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면 자신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간 지켜본 그녀의 성격으로 짐작하건대 대충이라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렇지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전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잊고 있었던 과거였다. 잊고 싶은 과거이기도 했고. 그저 어릴 적 친구라는 말이 페넬로페를 포장하기에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진실이니까. 오래된 친구. 페넬로페는 라이언에게 오래된 친구였다.

어떤 식으로 설명할지 결정을 하고 나니 그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심정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게 그녀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 보였으니.

라이언은 리아의 질문에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리아는 그의 느긋함에 마음이 급했지만, 그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빛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기에.

“내가 어릴 적, 페넬로페의 아버지인 브렌트 남작 밑에서 수습기사로 있었소.”

라이언이 아주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브렌트 남작을 떠올릴 때면 그는 늘 가슴이 아팠다.

이기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 준 사람. 세상엔 라이언 자신의 부모와 같은 어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 사람.

어린 라이언에게 브렌트 남작은 하늘과도 같았다. 브렌트 남작이 아니었다면 지금에 자신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수습기사? 당신이요?”

리아는 라이언이 누군가의 밑에 있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것 말고 명령을 받는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지 않나? 나도 처음부터 공작은 아니었으니.”

‘공작이 되고 싶지도 않았지.’ 라이언은 뒷말을 안으로 삼켰다.

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은 모르지만, 물어볼 수 없어 그냥 때려 맞출 뿐이었다.

‘수습기사라면 인턴 같은 걸까? 그럼 공작은 언제 된 거야!’

공부가 필요했다. 이 망할 세상에 관한 공부가 매우 필요한 순간이었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게 이토록 답답한 일이구나. 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과거나 현재에 대해서 단편적인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페넬로페의 아버지 브렌트 남작은 나에게 은인과도 같은 분이지. 지금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다 그에게 배웠다고 보면 될 것이오.”

브렌트 남작은 라이언에게 은인이었다. 아버지였고, 스승이었고 친구였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까지 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죽기 전에 나에게 페넬로페를 부탁했소. 이 정도면 내가 왜 그 늦은 시간에 페넬로페를 찾아갔는지 설명이 되겠나?”

“그럼 페넬로페와 결혼을 하지 그랬어요?”

리아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라이언이 황당한 듯 웃었다.

“당신은 동생과 결혼을 할 수 있나? 그녀는 나에게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아이야.”

리아는 라이언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생각하기론 페넬로페에게 그는 단순한 오빠가 아니었다.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고 있다니까.’

그렇지만 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알려 줄 만큼 아량이 넓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그 사실을 알아서 자신에게 좋을 것도 없었다.

“이걸로 설명이 된 건가? 아니면 더 궁금한 게 남았나?”

리아는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눈은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분명 그의 눈동자는 그가 말한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딘가 꺼림칙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당신은 진실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저는 자꾸 의심이 드네요.”

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어쩔 수 없죠. 당신 말을 그대로 믿는 수밖에.”

이놈에 의심도 병이다. 병! 리아는 라이언이 듣지 못하게 작게 중얼거리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거였다.

“그럼 취조는 끝난 건가?”

“취조라니요? 부부 사이에 나누는 정다운 대화라고 해 두죠.”

“정다운 대화?”

라이언의 물음에 리아가 싱긋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까부터 라이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였던 붉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하얀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라이언은 다시 한번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위해 움직이기 전에….

그의 시선에 그녀가 민망한 듯 침을 꼴깍 삼키자 이번에는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녀의 눈짓과 손짓 하나하나에 그의 심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왜지?’

지금껏 여자를 보고 이런 느낌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었다.

그가 한 걸음 도망가면 그녀는 두 걸음 다가온다. 그의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언제나 그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힘겹게 거둬들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바로잡고 싶었다. 자신조차 잘 모르겠는 마음을.

그때,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매튜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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