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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31화 (31/116)

31화. 이미 엉켜 든 실타래

라이언의 행동에 리아의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짙은 그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져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는 자세가 너무 부끄러웠다.

리아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어깨를 꼭 안고 있는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혹시 몽유병 같은 거 있어요? 아직도 꿈꾸고 있는 건 아니죠?”

“몽유병?”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리아가 몸을 꿈틀대자 라이언이 리아의 어깨를 더 꽉 잡았다.

“내 옆에서 자게 해 주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뭘 원해요?”

뻔뻔한 라이언의 말에 리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고, 악몽에 힘들어하는 걸 깨워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아니, 난 당신이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깨워 준건데….”

“그만. 졸립군.”

그가 리아의 말을 막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늦었어. 그냥 여기서 자. 나랑 같이.”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부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른 척해 달라고. 제발 자신과 같이 있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무슨 말이냐며 따지고 물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그 자세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며 그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표시 내지 않았지만, 그의 심장만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금방 100미터 달리기를 끝낸 사람처럼 그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기대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천둥 번개보다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악몽을 꾸고 흐느껴 운 것이 부끄러운 것일까?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거지? 리아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원한다면 이 순간만큼은 모르는 척해 주고 싶었다.

무슨 악몽을 꾼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너무 슬퍼 보였고 너무 연약해 보였으니까.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그가 흐느껴 우는 모습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닿은 그의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서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알겠어요….”

리아의 말에 그가 움찔했다.

“나도 졸려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너무 졸려서 제 방까지 갈 힘이 없네요. 그냥 자야겠어요. 여기서.”

그냥 여기서 잔다는 리아의 말에 경직된 그의 몸이 서서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고맙군.”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가 리아를 향해 고맙다는 말을 꺼냈다. 리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은 이제 평온하게 뛰고 있었다.

리아는 애써 졸린 척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왕 모르는 척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야겠지.

“졸려요. 그만 자요.”

그제야 라이언이 안심한 듯 꽉 잡고 있던 리아의 어깨를 살며시 고쳐 잡았다.

가만히 자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그의 따듯한 온기가 닿아 있어 그런지 어느 순간 리아가 진짜 잠이 들었다.

리아의 숨소리가 잠이 든 것을 알리는 듯 규칙적으로 변하자 라이언이 참았던 숨을 후하고 내뱉었다.

정말 오랜만에 꾼 꿈이었다. 잊고 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는데 끔찍한 기억은 불식 간에 그를 삼켜 들었다.

사라진 불면증은 아내 때문이었을까? 그녀 없이 잠이 들자 불면증 대신 악몽이 찾아왔다.

라이언이 겪고 있는 불면증의 원인은 악몽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다. 자신이 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 것인지를.

성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그는 길게 잠을 자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견디기 힘들고 끔찍한 기억들이 그를 집어삼키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잠이 드는 것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불면증을 만들어냈다.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 이후로 몇 시간을 연속으로 잠든 적이 없었고 덕분에 악몽은 꾸는 일은 사라졌다.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을까? 시간은 모든 것을 무뎌지게 만든다.

라이언은 자신의 어깨를 베고 편하게 잠이 든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불면증도, 악몽도 사라지는 것일까?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잡아당겼다. 그녀가 사라지면 또다시 악몽이 찾아올 것만 같아 무서웠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다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이전의 그였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악몽을 꾸고 난 뒤 다시 잠이 든다는 것은.

묻고 싶었을 텐데 모르는 척 넘어가 준 그녀가 고마웠다. 내키지 않을 텐데도 곁을 떠나지 않고 옆에 남아 준 것도.

“…뭐라고 해야 하지?”

정말 잠이 든 아내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는 물어올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무슨 꿈을 꾼 것이냐고.

라이언은 복잡한 생각을 애써 털어냈다. 이마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한다 해도 아내는 이해하고 받아줄 것만 같았다.

거리를 두려 할수록 아내는 자꾸만 가까워진다. 가까이하고 싶어진다.

그는 결국 그녀를 끊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그녀는 그의 삶에 마구 엉켜 들고 있었다.

끊어 내려 해도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

“마님, 마님?”

메리가 커튼을 걷자, 방안에 아침 햇살이 한가득 들어왔다.

“마님, 그만 일어나세요. 벌써 해가 중천에 떴어요.”

메리의 수다에 리아가 눈을 떴다.

잠든 기억도 없는데 벌써 아침이라고? 더군다나 분명 라이언의 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눈을 뜬 곳은 자신의 침대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정신을 차린 리아가 생각을 해 보려는 듯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마님, 이제 다 주무신 거죠?”

“내가 왜 여기 있어?”

“네?”

리아의 물음에 메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잠이 덜 깨셨나 싶어 서둘러 물을 한잔 따라 내밀었다.

“아직도 졸리세요?”

침대 헤드에 기대고 앉아 메리가 내민 물을 한꺼번에 다 마셔버린 리아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 이게 무슨….”

라이언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 앞은 아주 깨끗했다. 탁자도 의자도 모두 제자리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메리가 다 치웠어?”

“네?”

“저기, 저기 있던 의자 말이야.”

메리가 리아의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물론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전 마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자신이 실수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메리가 울상을 지었다.

마님이 하시는 말씀을 통 알아듣질 못하겠으니,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꿈을 꾼 걸까?’

리아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이마에 손을 올려 지끈대는 머리를 진정시키려는 듯 문질렀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몸도, 의자도 다 어떻게 된 거야? 그가 그런 걸까?

“어머, 마님!”

그때 메리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마구 호들갑을 떨었다.

“여긴 언제 다치신 거예요? 분명 지난밤까지도 멀쩡했는데….”

“어?”

메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마에 올려놓은 손을 살며시 잡아 내렸다. 그녀의 손등엔 붉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그래. 꿈은 아니야.’

그건 의자를 서둘러 옮기려다 다친 상처였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남편이 방을 치우고 잠든 자신을 옮겨 놓았다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공작님은 어디 계시지?”

메리가 아프지도 않은 리아의 상처에 후후 바람을 불며 답했다.

“마님께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나시면 서재에서 뵙고 싶으시다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누가? 누굴?”

“당연히 공작님이 마님을 이죠.”

서재에서 보자고? 그건 자신 역시 바라는 바였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리아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몇 시야?”

리아가 벽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벌써 10시에요. 공작님께서 많이 피곤하실 거라고 편히 주무시게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

라이언의 말을 전하는 메리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피곤한 이유는 그런 게 아니거든!

리아는 메리에게 얼굴을 붉힐 필요 따윈 전혀 없다고 말해 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래 네 상상까지 망칠 필요는 없지. 그나저나 벌써 10시란 말이야? 내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

물론 지난밤 그녀의 행동들은 체력 소모가 매우 크긴 했었다.

의자를 옮기고, 옮겼던 의자를 다시 밀쳐내고, 커다란 라이언을 마구 흔들고, 고함을 지르고…

거기에다 가장 심력 소모가 컸던 것은 남편의 품에 안겨 자는 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진짜 잠들어 버렸지만.

“아침은 생각이 없어. 안 먹을래. 바로 옷을 준비해 주겠어? 씻고 서재에 내려갈 거야.”

“어머머, 마님 무슨 말씀이세요! 아침을 안 드시겠다니요. 그럼 정말 큰일 나요!”

“무슨 큰일이야. 아침 한 끼 안 먹는다고 나 안 죽어.”

메리가 고개를 절래 흔들며,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며 아침을 안 먹겠다는 리아의 말에 반대했다.

“꼭 드셔야 해요! 오늘은 특별히 스테이크를 준비했단 말이에요.”

아침부터 스테이크라니. 체력을 회복할 때는 끼니때마다 고기를 먹었지만 이젠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침부터 무슨 스테이크야. 메리가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그냥 과일이나 조금 먹을래. 입맛 없어.”

리아는 빨리 서재로 내려가 남편을 만날 생각밖에 없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님 정말 그러시면 안 되는데… 꼭 드셔야 하는데….”

메리의 표정이 울기 직전이었다.

“뭐야? 좀 이상한데….”

평소보다 더 크게 오버를 하는 메리의 모습이 이상했다.

“메리? 내가 오늘 아침에 꼭 고기를 먹어야 할 이유가 있어?”

리아가 추궁하듯 물었다.

“공, 공작님께서….”

리아가 계속 이야기를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 그러니까 마님 몸매가… 저… 그게… 마르신 것 같다며 끼니마다 고기를 꼭 드실 수 있게 해 드리라고. 식사를 거르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면서 직접….”

“직접?”

“…직접 지시를 하셨어요….”

마르신 것 같다는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메리의 모습에서 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은 그것보다 더 직설적이었다는 것을.

“정확히 뭐라고 하셨지?”

“그, 그게….”

“괜찮아 메리. 말해 봐.”

“별…별거 아니에요. 그냥 마님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면서… 아주….”

“아주?”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메리! 자꾸 답답하게 할 거야?”

“돌아서시면서 혼잣말로 아주 납, 납작 하다고….”

메리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잘못 들은 것 같다고 중얼대며 고개를 푹 숙였다. 리아도 그런 메리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납작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자신의 몸에 한 부분을 내려다보기 위해서.

역시 그의 취향은 글래머 쪽이었다.

‘뭐야. 더 많이 먹여서 살찌운 다음에 잡아먹겠다는 거야?’

잠든 자신을 품에 안아 옮겼을 남편을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침을 흘리거나 코를 곤 것은 아니겠지? 리아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입가를 문질렀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됐다.

그녀는 남편의 뜻대로 아침부터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납작한 정도는 아니지 않아?”

시중을 들던 메리가 리아의 말에 움찔했다. 그렇지만 메리는 끝까지 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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