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30화 (30/116)

30화. 라이언의 그늘

“어머니 잘못했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어린아이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었다. 아이는 알몸이었다.

아이의 오랜 간청에도 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 여린 몸을 강타했다.

오늘은 허리끈이다. 어제는 몽둥이였다. 그리고 그 전날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촤악- 촤악-

얇은 가죽을 여러 겹 꼬아 만든 허리끈이 뱀처럼 아이의 몸을 휘감았다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빨간 줄이 그물처럼 생겨나고 곧바로 피멍이 올라왔다.

아이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듯 두 손을 올려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작게 엎드렸다.

그렇지만 그 어떤 행동도 고통을 줄여주진 못했다. 아이의 작은 입에서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신음이 마구 터져 나왔고 신음이 커질수록 가죽 허리끈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으…아… 어…머니… 잘못… 용…서…해….”

반복되는 매질에 아이의 연약한 살이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허리끈 끝에 피가 묻어나오자 아이의 어머니는 그제야 매질을 멈췄다.

아이는 매질이 멈추자마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행여라도 울음이 새어 나와 어머니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아무리 세게 입을 막아도 작은 손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삐져나왔다.

“으윽…하… 흑….”

“아가 우니? 지금 우는 거야? 그렇게 잘못을 해 놓고도 울음이 나오니?”

아이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틀 연속으로 어머니의 눈에 띈 것뿐이었다.

“자…잘…못했어…요….”

잘못한 게 없지만, 습관처럼 아이는 어머니를 향해 또 빌었다. 어머니에게 그는 존재 자체가 잘못인 아이였으니.

“그렇지? 잘못했지?”

“잘…못…했어…요… 용…서해….”

아이가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비벼댔다. 어머니의 분노가 제발 사그라지길 바라고 또 바라면서.

촤악-

그렇지만 아이의 간절한 기도와는 반대로 또다시 매서운 채찍 같은 허리끈이 날아들었다.

“아가,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아…하…악….”

아이가 이번에는 손으로 무릎을 잡아 몸을 공처럼 움츠렸다. 가죽 허리끈이 몸을 내리칠 때마다 여린 살이 터져 피를 뿜어댔다. 이제는 신음조차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때 문가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지친 아이의 지친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눈물로 번진 두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였다.

“아…버….”

아이는 너무 지쳐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입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웅얼댈 뿐이었다.

아버지는 아이 앞에 나타난 구원자였다. 아이는 죽을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버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이 고통을 멈춰주세요.

“아…버…지… 살…려주…세…요… 아…버…지….”

“흐으윽….”

“아…버…지….”

“라이언?”

그때 누군가 라이언의 몸을 흔들었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정신 차려요!”

그건 리아였다.

***

그를 거부하겠다는 결심을 실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라이언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에 잠금장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메리가 잠자리를 봐주고 방을 나가자 리아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사방은 고요했다. 메리가 켜 놓은 작은 등불만이 작게 흔들릴 뿐이었다.

잠금장치가 없는 문을 막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리아는 문 앞에 탁자를 밀어 놓고 그 주변에 의자를 마구 쌓아 올렸다. 그 일에는 방 안에 있는 모든 의자가 동원되었다.

아직 연약한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아 생각보다 힘겨웠지만 그래도 결국 성공하고야 말았다.

그가 이 문을 열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에게 보여줘야 한다. 자신이 이토록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원하는 대로 해 주진 않을 것이다. 끌려다니지 않을 거야.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야.”

마구 엉켜 쌓여있는 의자 앞에 주저앉은 리아가 푸념하듯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된 게 이놈에 세상은 쉬운 게 하나도 없냐고.”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직 라이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직 페넬로페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남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쪽으로.

“발레포르 난 어쩌면 좋을까?”

막막한 순간이면 이상하게도 발레포르 생각이 났다. 이제 더는 발레포르를 향해 화를 낼 힘도 없었다. 그냥 물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냐고. 남편을 믿어도 되는 거냐고.

“몰라. 그냥 잘래.”

깨어 있어 봤자 복잡하기만 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 소모를 필요로 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리아의 모든 신경은 쌓인 의자 뒤 꽉 닫힌 문 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결국은 그였다.

그렇게 리아는 라이언을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흐으윽….”

“아악….”

누군가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에 리아가 잠에서 깨어 부스럭댔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막 잠에서 깨어난 몽롱한 정신은 그녀의 판단력을 흐려놓았으므로.

다시 눈을 감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잘…못…흐흑….”

점점 선명해지는 울음에 리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꿈이 아니야. 이 소리는 꿈이 아니었다.

누구지? 이게 무슨 소리지?

리아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깐 멈췄던 소리는 이내 다시 리아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슬픈 울음이었다. 애절한 애원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라이언의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이언?”

리아는 라이언의 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 꽉 닫혀있던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아마도 라이언이 문을 열려다가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고 그만둔 것 같았다.

여전히 열린 문틈 사이로 구슬픈 흐느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이언? 당신이에요?”

리아의 외침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살…려…주세….”

“살려? 살려 달라고?”

울음소리에 라이언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저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리아는 다급하게 자신이 쌓아놓은 의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니 손이 자꾸 헛나갔다. 가져다 놓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치우려니 쉽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뭘 이렇게까지 잔뜩 쌓아놓은 거야!”

마음처럼 몸이 움직여 주지 않으니 짜증이 났다. 다 치우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혼자 빠져나갈 만큼에 공간을 만들어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두운 방 안은 조용했다.

잘못 들은 걸까? 아니야. 분명히 들었어. 그때였다. 또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흐…흑….”

“라이언?”

리아는 소리의 행방을 찾아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침대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지금 잠꼬대하는 거예요?”

슬픈 꿈을 꾸고 있는지 라이언의 눈가에 눈물이 번져있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두 손은 시트를 말아 잡고 있었다.

리아는 그를 건드리기가 조심스러웠다. 험한 꿈을 꾸는 것일까? 깨워야 할지 그냥 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아…하…악….”

리아가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는 라이언이 몸을 마구 떨었다. 어깨를 움찔대며 입으로는 잠꼬대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저, 저기….”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심각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리아가 손을 뻗어 라이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

“네?”

라이언은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는 거지?

“아…버…지…으아…아악….”

이번에는 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의 이마는 땀으로 젖어 있었고 입에서는 구슬픈 흐느낌 같은 신음이 끊이질 않고 쏟아져 나왔다.

“저기요! 라이언?”

리아가 좀 더 세게 라이언의 몸을 흔들었다.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리아는 침대 위로 올라가 라이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를 깨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정신 차려요!”

그를 향해 고함을 치다시피 소리를 지르고, 있는 힘껏 몸을 흔들자 드디어 라이언이 힘겹게 두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요?”

리아가 라이언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며 물었다.

“악몽을 꿨어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라이언이 느리게 두 눈을 끔뻑였다.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처음 빛을 본 어린아이처럼.

“…뭐…지….”

라이언이 작게 중얼댔다. 상황파악이 되질 않는 듯 당황한 모습이었다.

“뭐라고요? 내가 보여요?”

리아는 그런 라이언의 얼굴에 또 한 번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지?”

정신을 차렸는지 라이언이 오히려 리아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예요?”

상황파악을 하려는 것인지 라이언이 조용히 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뜨거운 눈빛에 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삐죽대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어머!”

라이언이 일어서려는 리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대로 라이언의 품 안으로 고꾸라졌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놀란 리아가 소리쳤다.

“…같이 자려고 온 거 아닌가?”

“무슨 헛소리에요? 잠 덜 깼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리아가 라이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이며 황당하다는 듯 대꾸를 했다.

그러자 그가 이번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팔베개를 하듯이 자신의 옆자리에 눕히고 빠르게 이불까지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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