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다가오는 밤
라이언은 아내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황했겠지? 그래 당황했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이곳 베드포드 성에 돌아온 이유를 잊고 있었다.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아내가 주는 편안함에 취해 들떠있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기억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이유도.
“헉…….”
갑자기 이마의 흉터가 고통스러웠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 순식간에 라이언의 온몸을 휘감았다. 마치 처음 상처가 생긴 그 날처럼.
성으로 돌아온 뒤 미처 잊고 있던 고통이었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시작되는 오래된 흉터의 통증은 그동안 그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통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라이언은 더 참지 못하고 이마에 손을 올려 흉터를 눌렀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통증은 더 고약하고 더 지독했다. 이를 악물어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적의 칼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의 사자가 오래된 흉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벌벌 떨다니.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언제 다쳤는지도 모를 흉터에서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도, 그 고통에 몸을 떤다는 것도.
라이언은 오늘 성으로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더는 관심을 두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매튜가 선대공작의 무덤을 언급한 순간, 자신이 이 성에 돌아온 이유가 또렷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내와 동침을 하려는 이유는 후계자를 얻기 위함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눈길도 주지 않으려 했는데.
일부러 귀환 인사도 하지 않고 숨어든 서재였다. 그런 그를 먼저 찾아온 것은 그녀였다.
며칠 만에 만난 아내가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차가운 말투와 표정으로 벽을 만들었다.
요즘 그가 아내를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은 매우 낯선 것들이었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알 수 없는 감정들.
더 이상해지기 전에 더 복잡해지기 전에 그녀를 끊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저주받은 인생에 아내라는 실타래 하나가 더 엉켜 들었다. 아무리 풀어내려고 해도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복잡하게.
풀리지 않는다면 끊어내야 할까?
지금 끊어내지 못한다면 더 엉망으로 엉켜 들것이 확실했다. 끝나지 않는 이마의 통증처럼 말이다.
그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공작님은 어디 계시지?”
리아가 식탁을 둘러보며 물었다. 혼자 먹기에는 과하게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저, 그게.”
넬슨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중얼댔다.
“나 혼자 먹으라는 거야?”
“그게 공작님께서는….”
계속 말을 돌리는 넬슨을 향해 리아가 힘을 주어 다시 물었다.
“넬슨. 공작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왜 지금 이곳에 자신이 혼자인 것인지 알아야만 했다. 분명 공작은 돌아왔고 이 성안에 있는데 어째서 저녁을 먹으러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며칠 만에 돌아온 공작을 위해 진귀하고 화려한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정작 주인공이 자리에 없었다. 다그치듯 묻는 리아의 말에 넬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는 성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넬슨,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겠어?”
돌아온 지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성을 비웠다는 말에 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이. 매튜님과 급히 가 보실 곳이 있으시다며….”
넬슨은 뭔가 아는 것 같았다. 대충 말끝을 얼버무리는 모습이 분명 그의 행선지를 알고 있었다.
리아 역시 매튜와 함께 나갔다는 말에 어딜 간 것인지 짐작이 갔다.
페넬로페 레스터. 그는 페넬로페를 만나러 간 것일까?
애인이 아니라는 말을 믿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모든 상황은 그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녀를 페니라고 불렀다.
“오랜 친구?”
오랜 친구일까? 오랜 연인일까?
“네?”
넬슨이 리아의 혼잣말에 대꾸를 했다.
“공작님이 어딜 가셨는지 넬슨은 알고 있지?”
“저… 저도 확실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매튜님께서 오늘 낮에 찾아오신 손님의 행적을 묻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마침 마구간 지기가 그 손님의 마부와 대화를 나눈 상황을 알게 되셔서….”
집을 알아냈겠지. 그리고 라이언과 거길 찾아갔을 테고. 더 묻지 않아도 답은 하나였다. 페니의 행적을 알아내라고 명령했던 라이언과 당연한 듯 달려나간 매튜.
그 둘이 함께 성을 빠져나갔다면 답은 그것뿐이다.
페넬로페 레스터 백작 미망인의 작은 저택.
리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나 버린 일련의 사건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이 망할 인생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그는 돌아올까? 정말 오늘 초야를 치르려고 할까? 식어가는 음식을 앞에 두고 리아는 또 고민 중이었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복잡하고 생각할 게 많은 거야! 그냥 좀 단순하게 살면 안 되냐고!’
그렇지만 레오니의 삶은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남편 말고는 기댈 사람도 없었고, 재산이라고는 새로 만든 옷이 전부였다. 남편을 꼬셔서 좀 제대로 살아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남편이란 놈은 얼굴만 잘생긴 싸가지였고 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남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망할 남편한테 자꾸만 끌리는 그녀의 망할 마음이었다.
페니라고 부르는 그의 모습에 질투가 났다. 화가 났다. 최대한 자제하며 물었지만, 사실은 누구냐고 흔들어 대고 싶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아니라는. 별 사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렇지만 비참하게도 그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후계자뿐이었다.
“그래 맞아! 그거야!”
리아가 찡그렸던 이마를 손으로 탁 치며 어두운 얼굴을 다시 밝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를 유혹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게 있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녀만 가진 무기. 유일하게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것.
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녀도 거부할 수 있는 거였다. 그에게 홀려서 잊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그녀는 분명히 말했었다.
후계자를 얻고 싶으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는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았고 당연한 듯 그녀에게 요구만 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아 주는 것이 아내의 의무라면, 아내를 아껴 주는 것은 남편의 의무였다.
그가 자신을 보던 눈빛은 전혀 아내를 아끼는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자신을 가지려고 한다면 온몸을 던져 반항할 것이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떠나버릴 남자였다.
‘절대 이대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누구 좋으라고!’
아이는 물건이 아니었다. 후계자를 얻기 위해 동침을 한다는 것 차체가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이제 순순히 받아주지 않을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급한 사람은 그였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고 그는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리아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녀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모른다는 것을. 누굴 사랑한 적도 누구에게 사랑받은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늦은 밤 라이언은 성으로 돌아왔다. 긴 하루였다. 영지를 돌아보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가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와서 확실하게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사라진 불면증이었다.
며칠간의 외출로 그것은 더 확실해졌다. 오로지 성안에서 잠들었을 때만 불면증은 사라졌다.
라이언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를 기다리다 지친 시종 존이 문 앞에 기대서 졸고 있었다.
그는 존을 깨워 방으로 돌려보냈다. 존은 주인의 시중을 들겠다고 우겨댔지만 무시무시한 주인의 표정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간 라이언은 아내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꽉 닫혀있었다.
오늘 밤 그가 초야를 치르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렸을까?
라이언은 자꾸만 드는 아내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며 존의 도움 없이 재빨리 샤워를 마쳤다.
옷을 입으면서도 라이언의 시선은 아내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 그는 아내와 늘 한 침대를 썼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의 말에 놀라는 그녀의 모습이 유쾌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잠이 들면 기분이 좋았다.
불면증이 사라진 것이 아내 때문일까? 아니면 성에 돌아온 탓일까?
“그래도 시늉은 해야겠지.”
초야를 치르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서 아이를 얻고, 모엘르 검을 찾아와야 했다. 성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낮에 그런 말을 한 것도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배려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내키지 않았다.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갖고 싶지 않았다. 차갑게 말을 내뱉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처음 성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아내라는 여자와 동침을 하는 것이 곤욕스럽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싫어도 해야 하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라이언은 아내가 있는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철컥-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분명 잠금장치 따윈 없는데.
철컥- 철컥-
여전히 그대로였다. 라이언이 이번엔 힘을 주어 문을 밀어보았다.
라이언의 힘에 문이 살짝 밀렸다. 열린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탁자였다. 그리고 엉망으로 섞여서 엉켜있는 의자.
“하, 문을 막아놨군.”
리아는 라이언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문 앞에 탁자와 의자를 마구 쌓아놓았던 것이었다.
격렬한 거부였다.
라이언은 그녀의 행동에 짜증보다는 웃음이 났다. 이 정도 막아 놓는다고 못 들어간다고 생각했을까?
그냥 힘을 주어 밀어버리면 그만인 것인데. 그녀는 아직 자신의 힘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왜 죽음의 사자라 불리 우는지.
그렇지만 라이언은 그녀의 귀여운 행동을 그냥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귀여워? 미쳤군.’
미련 없이 돌아서서 침대로 걸어가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거부 한번 제대로 하는군.”
작은 몸으로 탁자와 의자를 끌어다 놓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뭐, 잘 됐군. 오늘 혼자 자 보면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지.”
사라진 불면증이 성에 돌아온 탓인지, 아니면 아내 때문인지.
라이언은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