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대화
서재의 문은 조금 열려있었다. 넬슨이 문을 열어 주겠다며 나섰지만, 리아가 됐다며 손을 저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라이언과 매튜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영지민들의 생활이 형편없습니다. 각하도 아시다시피 이곳 웨스터 지역은 원예농업이 활발한 곳입니다. 우리 베드포드 성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로가 형편없고 중심지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에 꽃이 시들기 전에 배송하는 것이 어려워 향낭 주머니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것도 형편없더군.”
“네. 그렇습니다.”
베드포드 성이 위치한 웨스터는 꽃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곳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마을마다 재배하는 꽃의 종류가 다 달랐는데 베드포드 성에서 재배하는 꽃은 장미였다.
장미는 흔한 꽃이었다.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흔한 꽃.
더군다나 베드포드 성은 웨스터에서도 가장 외곽에 자리 잡고 있고 이어지는 도로는 형편없었다.
선대공작은 자신이 먹고 자고 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으므로 도로를 정비하거나 영지민들의 생활을 보살피는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우선 도로정비가 시급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장미로 살아남을 방법을.”
리아는 문 앞에서 끼어 들을 틈을 살피고 있었다. 좀처럼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방법이라는 것을 찾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는지 갑자기 안이 조용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쁘신가요?”
리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라이언과 매튜의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다.
“부인을 뵙습니다.”
매튜가 곧바로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잘 다녀왔어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라이언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리아는 그런 라이언의 태도에 실망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말을 꺼냈다.
“돌아오셨다기에 인사를 드리려고요.”
라이언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왔다는 표시였다. 리아는 그의 성의 없는 행동에 다시 한번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그들이 있는 자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변했어.’
그는 미묘하게 변해있었다. 표정도 말투도 영지를 둘러보러 나가기 전과 달랐다. 아직 유혹은 시작도 못 했는데 멀어지기만 한 것 같아 리아는 조바심이 났다.
“듣자 하니 장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던데….”
“당신은 알 필요가 없는 일이군. 보다시피 지금 일을 하는 중이오, 인사를 했으니 그만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다정하게 건넨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리아는 부끄러움에 당장 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만 가 보라는 말에 페넬로페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렇지만 그녀는 페넬로페처럼 그냥 가진 않을 것이다.
“석고 방향제는 어떠세요? 향초라던가 비누도 좋고요.”
“무슨 말이지?”
“장미 말이에요. 장미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거 아니었나요?”
라이언과 매튜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담겼다. 리아가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로 생활하는데 불편한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가장 아쉬운 것을 고르자면 그중 하나는 비누였다.
이곳에 비누는 뻣뻣하고 향도 없었다. 그냥 세척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말 그대로 진짜 단순한 비누였다.
목욕할 때마다 향이 나는 비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메리에게 이야기해 보았지만 그런 비누는 없다고 했다.
“장미로 비누를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가만히 서 있던 매튜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만들 수 있다면요? 그럼 지금 여기서 나가지 않아도 되나요?”
리아가 라이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발하듯 말했다. 라이언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매튜를 불렀다.
“그만 나가 보게.”
매튜는 리아가 말한 장미로 만든 비누에 대해 매우 궁금했지만, 주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인사를 한 매튜가 느린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왜 내보내세요? 매우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리아가 서재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으며 말하자 라이언이 책상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천장 안 무너져요.”
“할 말이 뭐지?”
라이언이 리아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어머! 할 말이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장난을 칠 기분이 아닌지 라이언에게서는 다시 대답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보았던 중에 오늘처럼 차갑고 무서운 적은 없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살이 쪘군.”
“공작님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요. 요즘 매일 하는 일이 먹고 자는 것밖에 없어서요. 참! 돈 쓰는 일도 하고 있고요.”
리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장미로 비누를 만들 줄 아나?”
“그게 중요한가요?”
“당신의 대답 여부에 따라.”
어린 시절 매일같이 했던 일이 비누와 방향제, 향초 따위를 만드는 일이었다. 리아가 자란 보육원은 늘 돈이 부족했고 원장은 아이들을 그냥 놀게 두지 않았다. 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이고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녀는 일을 했다.
“만들 줄 안 다면요?”
“정말인가?”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할 이유 따윈 없으니까.
“방법을 알려 주면 좋겠군. 내 영지민들은 당신의 백성이기도 하니까.”
“도와드리면 저한테 뭘 해 주실 건가요?”
생각지 못한 리아의 질문에 놀랐는지 라이언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참 리아의 표정을 살피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말했다.
“뭘 원하지?”
“글쎄요. 갑자기 물어보시니 또 딱히 할 말이 없네요. 그건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거로 하죠. 제가 비누를 만들 줄 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리아는 기분이 매우 좋아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라이언과 매튜의 표정으로 판단하건대 자신이 장미로 비누를 만들 줄 안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취향이….”
“취향?”
“풋….”
리아가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왜 웃지?”
“풍만한 걸 좋아하시나 봐요?”
리아가 페넬로페의 몸매를 떠올리며 비꼬듯 말했지만, 라이언은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못 들으셨어요?”
“뭘 말이지?”
“오늘 특별한 손님이 다녀갔다는 걸요.”
라이언은 페넬로페의 방문에 관해 아직 전해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특별한 손님?”
“그 손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 있냐는 질문에 아직 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의 얼굴에 다시 유쾌함이 물들었다. 영지를 살펴보러 떠나기 전과 같은.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우린 부부잖아요.”
“그렇지 우린 부부지. 아직 형식적인.”
아직 형식적이란 말은 치르지 않은 첫날 밤을 의미하고 있었다. 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진짜 부부가 되었을 텐데. 안 그런가?”
리아는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저는 다른 사람과 남편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아요. 애인이 없다는 확신을 받기 전에는 당신과 초야를 치르지 않을 생각이에요.”
“애인이 없다면? 그럼 일주일을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오늘 밤 당장 가능하다는 말인가? 보아하니 이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진 못할 것 같은데.”
없다면? ‘없다’도 아니고 ‘없어’도 아니고 ‘없다면’은 또 뭘까? 리아가 이마를 찌푸렸다. 끝까지 모른 척을 하시겠다 이 말이지.
“페넬로페 레스터.”
리아의 말에 라이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당신이 페니를 어떻게 알지?”
페니? 그의 입에서 나온 페니라는 이름에 리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친한 사람만 부른다는 그 페니?
“오늘 찾아왔다는 그 손님이 자신이 페넬로페 레스터 백작 미망인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말한 페니가 맞나요?”
“페니는 어디에 있지?”
“갔어요. 제가 보냈어요.”
“보냈다고? 어디로?”
라이언의 음성에 약간의 노기가 스며들었다. 리아는 페넬로페가 라이언의 애인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영지 근처에 자기 저택이 있다던데요. 이웃사촌이라는데. 자기 집에 갔겠죠.”
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언이 호출 벨을 울렸다. 금방 넬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튜를 불러주게.”
“네. 주인님.”
그에게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페니가 이토록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 리아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서 라이언의 모습을 천천히 지켜봤다.
진지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애인이 있다 해도 상관없이 그를 유혹해야 할지, 아니면 방법을 변경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처음부터 그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매튜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페니가 근처에 집을 구했다고 하더군. 그녀의 행적을 알아오게.”
라이언의 말에 매튜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레이디 페넬로페 레스터 말입니까? 그녀가 근처에 있다고요?”
“오늘 이곳을 방문했다고 하는군. 지금 당장 알아오게.”
매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리아는 그런 둘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들에게 페넬로페는 어떤 존재일까? 매튜까지 이토록 잘 아는 걸 보면 그녀는 라이언의 공식적인 애인이 맞을까?
“애인인가요?”
“누구? 페니?”
“친한 친구들만 페니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친한 친구인가요?”
“알고 싶은 게 뭐지?”
“물었잖아요. 애인이냐고.”
“애인은 없어. 안타깝게도. 내겐 부인은 있지만, 애인은 없군.”
믿어야 할까? 이렇게 의심스러운데?
“애인이 아니라면 그녀는 누구죠?”
“오랜 친구.”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그럼 오늘 밤 초야를 치러도 되겠나? 더 기다리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군.”
라이언의 표정은 매서웠다. 리아는 그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 더 미룰 핑계도 사라져 버렸다.
끝까지 약속을 지키라고 몰아세워야 할까? 그럼 일주일 뒤에는 또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