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돌아온 라이언
저 멀리, 베드포드 성 가장 높은 곳에 꽂혀있는 커다란 깃발이 세찬 바람에 마구 펄럭이는 모습이 라이언의 눈에 들어왔다.
영지는 매우 넓었으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삶은 황폐했다. 그들을 돌아볼수록 라이언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절망과 원망뿐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렇지만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황폐한 삶에 한 줄기 빛이 나타난 것처럼 라이언을 우러러봤다.
버리고 떠난 것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삶을 다시 이끌어주기 위해 위대한 공작님이 나타났다는 것밖에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라이언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모엘르 검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곳 베드포드 성에 정착한 라이언의 마음에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붉게 노을이 지는 저녁이었다. 이곳의 풍경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저 멀리 아스라이 퍼져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자신의 아내라는 여자가 떠올랐다. 꼭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었다. 황금빛이 섞인 붉은 색.
자꾸만 생각이 나는 여자. 이대로 두면 귀찮아질 것이 뻔한 여자. 그렇지만 모엘르 검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여자였다.
“대장 참 웃기죠? 언제부터 우리한테 집이 있었다고 며칠 나갔다 온 것도 아닌데 어찌나 돌아오고 싶던지.”
멈춰서 생각에 빠진 듯 먼 곳을 응시하는 라이언을 향해 제레미가 말했다.
“집이라….”
이곳이 바로 집이란 말인가. 라이언은 ‘집’이라는 그 한 마디가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이고 참, 제가 별소리를 다 했네요. 아직 불타는 신혼이신 대장도 있는데 주책없게.”
제레미가 놀리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라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라이언은 주절대는 제레미를 돌아보며 픽 하고 웃은 후 말고삐를 다시 잡았다. 이대로 십여 분만 더 가면 그 집이라는 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각하.”
막 다시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비서 매튜가 라이언을 불러 세웠다. 라이언은 무슨 일이냐는 듯 매튜를 돌아보았다.
“각하,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듣자 하니 여기에서 동쪽으로 10여 분을 가면 선대공작님과 마님의 묘지가 있다고 합니다. 잠깐 들리셔서….”
“매튜.”
라이언이 차갑게 매튜의 말을 끊어냈다. 선대공작이라니. 그것은 그에게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못 들은 걸로 하겠네. 그만 가지.”
“각하, 그래도 아버님이십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찾아뵙지….”
“매튜, 아무리 내가 아끼는 자네라고 해도 한 번 더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네. 이번이 마지막이야. 잘 듣게. 나에게 아버지는 없네.”
차가운 기운을 잔뜩 뿜어대며 매서운 얼굴로 말을 마친 라이언이 매튜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재빠르게 고삐를 잡아당기며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집. 그래 나에게 집이라는 것이 그런 곳이 있었지.’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곳. 아니다.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힘겨웠던 그 사내를 기억하게 하는 곳 말이다. 너무 오랫동안 떠나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에게는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다. 지금 한가하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
“공작님께서 돌아오셨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라이언의 귀환을 알리는 나팔을 불자, 성안의 시종들이 서둘러 공작과 기사단의 도착을 전했다. 사람들의 손길이 이전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였다.
리아 역시 라이언의 귀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모른척하려 했지만 여기저기 떠들어대는 통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라이언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안했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말이다. 그의 귀환 소식에 공허했던 마음의 한구석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며칠간 이상하게 사라졌던 입맛이 마구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웃음이 났다.
“미쳤네, 정말.”
의도대로 제어되지 않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리아의 입에서 황당하다는 듯 미쳤다는 말이 삐져나왔다. 지금 느끼는 감정의 흐름으로 볼 때 자신의 두근거림은 마치 사랑에 빠진 듯했다. 이상하고 묘한 간질거림이었다. 팔자도 좋게 말이다.
뭘 몇 번이나 보고 겪었다고 두근거리고 좋아해? 리아는 스스로 되물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미쳤네. 나 정말 남자 얼굴 보는 거 맞네.”
그가 없는 며칠 동안 잠 못 이루고 뒤척인 것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상하게도 허전했던 날들이었다.
둘보다는 혼자 쓰는 침대가 당연히 더 편안하고 포근해야 하는데… 그와 한 침대를 쓴 것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혼자서 누워 있는 것이 어색했다.
그와 함께 일 때는 좁게만 느껴지던 침대가 왜 이리도 넓고 썰렁한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그 일상 중에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라이언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은 어디쯤 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자신이 하는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생각들을 깨닫고 미쳤다며 고개를 아무리 흔들어도 잠깐뿐이었다. 그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금 꿈틀댔다.
“아니야 사랑은 무슨. 참네.”
이 이상하고도 요상한 세상에 맨몸으로 떨어져, 그저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이니까 그런 것이다. 발레포르 악마 놈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 봐. 모든 것은 다 네놈 탓이니.
리아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추스르며 발레포르를 다시 소환해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었다. 지옥에 있는 발레포르가 들었다면 공포에 떨 정도로 오싹하고 강한 욕을.
“상황 탓이야, 상황.”
자꾸만 떠오르는 라이언의 검은 눈동자를 지우려는 듯 또다시 고개를 흔들며 리아는 작은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사랑이고 상황이고 뭐든 간에 이곳에서 꼭 살아남아 이번에는 부귀영화를 몽땅 누리고 말 것이다! 악마 놈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깨끗하게 포기하고 이곳에 완벽하게 정착하겠어.
결의가 넘치는 다짐이었다. 구질구질 쉴 틈이 없이 버거웠던 과거의 삶은 말에서 떨어진 그 날로 끝이 났다. 미련하게 그 끈을 잡는다고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치열했던 삶이었다. 지금에 비하면 몹시도 말이다.
“그나저나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지? 그냥 애인이냐고 물어봐?”
오늘 낮에 자신을 찾아왔던 페넬로페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꺼내면 좋을지 고민이었다.
그녀는 아주 당돌한 여자였다. 물론 그녀 역시 자신의 상상과는 매우 다른 공작부인의 모습에 더 당황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리아는 창가로 걸어갔다. 공작이 말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간을 밖으로 떠돈 것 같지 않게 그는 여전히 힘이 넘쳐 보였다.
하인에게 말을 넘겨주고 함께 했던 기사들에게 뭐라 이야기를 하던 라이언이 갑자기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방 창문을 향하는 것 같은 느낌에 리아가 황급히 몸을 피했다.
착각이겠지?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못 봤을 거야.
리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남편은 점점 더 그녀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를 유혹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유혹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자.”
리아가 다시 창밖을 내다봤을 때는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똑똑-
“마님!”
노크 소리와 함께 메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님 들으셨어요?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지금 막 서재로 들어가셨다고 하세요.”
“그래? 오셨어?”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지만, 무척 궁금했다. 그가 서재로 들어갔다고?
“그런데 어디? 서재?”
물론 일 때문에 다녀온 것이니 정리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서운했다.
‘내가 어쩌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을까? 아까 마주친 건 내 착각이었을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이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른 건 없고?”
“네? 다른 거요? 어떤….”
메리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아니 그냥, 뭐 다른 말씀은 없으셨냐고.”
말을 건네는 리아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서운한 이유는 또 뭐냐고! 나를 찾지 않고 바로 서재로 갔다는 것이 왜 이렇게 기분 나쁜 거지?
“아, 네.”
“응?”
“별다른 말씀 없으셨다고요.”
오늘따라 눈치 없는 메리는 리아의 기분을 알지도 못한 채 주방이 바쁘니 도와주러 가야겠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리아는 이상하게 씁쓸한 기분을 곱씹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면 되는 거지.”
그냥 고민하고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가 준 시간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고 여전히 둘의 관계는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이젠 여자까지 나타났다. 페넬로페 그녀와의 관계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결심을 한 듯 단호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