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26화 (26/116)

26화. 남편에 대한 몰랐던 이야기

“오호홍홍. 무슨일이세요홍. 나의 뮤즈?”

역시나 쥬넬은 눈치가 빨랐다. 일부러 메리를 내보냈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내가 쥬넬에게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무얼 알고 싶으세요?”

“내 남편.”

남편이라는 리아의 말에 쥬넬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유쾌하게 번졌다.

“오홍홍홍홍. 마이뮤즈. 부인의 그 마음 제가 알 것 같네요홍.”

“알고 있겠지만, 남편을 만난 게 3년 만이야. 난 쥬넬보다도 내 남편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이럴 땐 솔직한 게 최고였다. 둘러 말하거나 꾸며 말하는 것은 티가 나게 마련이고 더 의심스러울 것이었다.

“난 남편과 잘 지내고 싶어.”

“그럼요. 자알 지내셔야죠홍. 그럼 어떤 게 궁금하신 건가요? 그런 이유라면 저 쥬넬이 아는 것은 모두 다 부인께 말씀드리겠어요호옹.”

“내 남편은. 그러니까 베드포드 공작은 어떤 사람이지?”

“어머머! 멋져! 역시 마이뮤즈. 부인은 멋져욧. 애인이 있냐는 질문을 하실 줄 알았는데…아항항항.”

“애인? 애인이 있단 말이야?”

쥬넬의 말에 리아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아니 아니, 애인은 없으세요. 제가 알기로는 말이죠.”

“알기론?”

“그럼요. 제가 공작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홍. 사교계에 알려진 바로는 공작님이 따로 만나는 여자는 없으시답니다아항. 다만 집요한 추종자들이 몇몇 있기는 하죠홍.”

“집요한 추종자?”

“워낙 출중하신 분이잖아요. 물론 인상이 좀 매서우시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부 앞에는 그 정도 흠쯤이야 상관없지 않겠어요홍?”

흠이라는 것은 라이언의 이마에 흉터를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그의 흉터를 두려워하지만 그의 재산은 그 흉터쯤은 별것 아닌 거로 만들어주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참! 특히 그중에서 레이디 페넬로페를 조심하세요.”

큰 비밀을 이야기하는 듯 쥬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페넬로페?”

“친한 친구들은 그녀를 페니라고 부르죠홍. 레스터 백작 미망인이랍니다아항.”

백작 미망인이라. 그런데 왜 그녀를 조심하라는 걸까?

“그런데 왜 특히 그녀를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

“마이뮤즈. 그녀를 만나면 단번에 그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아항.”

“언제 만날지 모르니 쥬넬이 알려줘.”

“흠… 남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쥬넬!”

그는 조금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이디 페넬로페는 매우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답니다. 화려하고 유혹적이죠. 그리고 공작님을 사랑한답니다항.”

“사랑?”

“그녀의 오랜 집착은 비밀도 아니지요. 공작님이 공주님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다 늙은 레스터 백작과 결혼을 했답니다항. 그런데 이상하게도 늙긴 했지만 건강했던 레스터 백작이 결혼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죠.”

이상하게도 죽었다고 말하는 쥬넬의 표정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레이디 페넬로페에 대한 어두운 의혹을 짙게 뿜어대고 있었다.

“그 뒤로 쭈-욱 이제는 대놓고 공작님을 따라다니고 있답니다아항. 미망인의 신분이니 거리낄 것이 없지요홍. 물론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레스터 백작의 유산도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구요홍.”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녀를 조심하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이언이 그녀를 받아준 건 아닐까?”

“물론 제가 그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아. 공식적인 관계는 전혀 아니니까요홍. 그렇지만 알려진 바로는 페넬로페가 자신이 공작님의 애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더군요.”

애인? 애인은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리아는 라이언과의 첫 만남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애인이 있냐는 자신의 질문에 뭐라고 했었지?

“헐.”

“허얼이라니? 그게 무슨?”

“아냐 아냐. 그냥 생각 좀 하느라고.”

없다는 대답은 끝까지 하지 않았었다. 그의 역질문에 오히려 자신이 당황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넘어갔었지.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레이디 페넬로페 혼자만의 주장일 뿐. 진실은 알 수 없답니다.”

애인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아주 아리송했다. 뭐 남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어. 애인이 있냐는 질문에 왜 답을 안 하냐고 물어보면 되겠지.

“그럼 처음 하신 질문이 뭐였죠? 공작님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었나요홍?”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은 참으로 범위가 방대합니다. 제가 아는 공작님은 남자 중의 남자.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단 한 명에 사람입니다.”

라이언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쥬넬은 진지했다. 요홍이나 오홍홍같은 특유의 말투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공작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하자면 이 밤을 다 새도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공주님께서도 공작님을 믿으시라는 겁니다.”

“믿으라고?”

“가장 힘든 순간 당신께 가장 큰 힘이 되어줄 사람은 공작님뿐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줄 단 하나의 사람.

“그리고.”

“그리고?”

“아주.”

“아주?”

“아주 어마어마한 부자이기도 하고요옹홍홍홍홍!”

쥬넬이 다시 크게 웃으며 분위기를 바꿨다.

“부자라. 그래 뭐 그건 참 중요한 거지. 고마운 거고.”

리아의 말에 쥬넬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부자라는 것은 언제나 고맙고 좋은 것은 맞으니까.

“그럼 그는 어떤 여자를 좋아해?”

리아가 처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기습적으로 꺼냈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그가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을 알아야 했다.

“그…글쎄요홍. 그건 저도 잘….”

“몰라?”

“그러니까 예쁜 여자?”

“뭐?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 그게 보통 남자라면 예쁜 여자를 다 좋아하니까요홍.”

“모른다는 거지?”

쥬넬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동안 어떤 여자를 만났는지 그런 거 몰라?”

“많이 만나긴 했는데요. 취향이 일관적이라고 보기에는… 흐흠….”

“많이 만났다고?”

리아의 집요한 질문에 식은땀이 나는지 쥬넬이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공작부인의 술수에 걸려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 그러니까앙. 솔직히 말해서 공작님은 모두의 우상이잖아요홍. 공작님께서 원하지 않아도 여자들이 공작님의 발밑에 엎어지다시피….”

“발밑에 엎어졌다고?”

“몰라요홍! 이 쥬넬은 더 이상은 몰라욧.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병이 있답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주세요오홍. 마이뮤으즈!”

쥬넬의 앙탈에 오히려 리아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성인 남자의 앙탈이란…

그러니까 결론은 인기가 차고 넘쳤다는 말인 거지? 그것도 취향도 다양하게. 다만 공통점이라고는 예쁜 것이라고?

“고마웠어. 쥬넬.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마이뮤즈. 남자의 입은 절대 가벼워서는 안 된다고요. 저 쥬넬도 이제 입을 다물겠어요홍.”

그때 메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마님!”

“벌써 케이크를 구워 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공작님께 손님이,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하는 메리의 눈빛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공작님은 저녁때나 돌아오실 텐데….”

“그렇게 전해드렸는데… 그럼 마님이라도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날? 누구지? 찾아온 사람이 누구야?”

“그, 그게….”

리아가 궁금함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메리의 대답을 재촉했다.

“누군데 그래?”

“메어리. 누구예요? 궁금하게 그러지 말고 어서 말을 해 봐요호홍.”

메리가 리아와 쥬넬을 번갈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방문자의 이름을 뱉어냈다.

“레스터 백작 미망인이라고 하셨어요.”

레스터 백작 미망인?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깜짝 놀란 리아와 쥬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언제 만날지 모른다는 리아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레이디 페넬로페, 그녀가 베드포드성을 찾아온 것이었다.

***

“손님은 어디 계시지?”

1층 홀로 내려온 리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서 있는 넬슨을 향해 물었다.

“응접실에 계십니다.”

넬슨은 말과 동시에 응접실 문 앞으로 다가가 섰다.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문을 열었다.

“베드포드 공작부인 드십니다.”

리아는 곧장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부인이 왔다는 넬슨의 말에도 수상한 방문자는 자리에 앉은 그대로였다.

리아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여자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넬로페 레스터라고 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소개를 하는 페넬로페의 모습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넬슨.”

리아는 인사를 하는 페넬로페를 앞에 두고 넬슨을 불렀다.

“네 마님.”

“그만 나가 봐도 좋아.”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야. 별로 마시고 싶지 않네.”

“네. 그럼 말씀 나누시길 바랍니다.”

넬슨이 나간 응접실에는 리아와 페넬로페 두 사람이 남겨졌다.

“레스터 백작 부인.”

“레스터 백작 미망인입니다.”

미망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페넬로페의 모습이 퍽 흥미로웠다. 무슨 의도로 찾아왔을까? 정말 라이언을 만나러 온 것인지, 아니면 그 핑계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인지 아직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 가슴 아픈 일을 겪었군요.”

“뭐 이제는 괜찮답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듣기로는 남편이 죽은 지 2년이 좀 지났다고 했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오래된 일이라고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죠?”

“저의 작은 저택이 이곳 베드포드 성 근처에 있답니다. 제가 당분간 그곳에 머물 예정이에요. 라이언, 아니 공작님께서도 마침 베드포드 성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에 인사를 드릴 겸 찾아왔어요.”

라이언이라고 말하는 페넬로페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주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작님께서 외출 중이라고 하시지 뭐예요. 그래서 부인이라도 뵙고 인사를 드리려고요. 이웃사촌끼리 친하게 지낼 겸요. 공작부인을 정말 뵙고 싶었답니다. 공작님께서는 제가 아무리 졸라도 통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셔서 무척 궁금했거든요.”

이웃사촌이라. 앞으로도 왕래하고 지내자는 말이었다. 원래부터 그녀의 저택이 거기 있었는지, 아니면 라이언 때문에 갑자기 생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베드포드 성 근처에 머무는 이유는 라이언 때문이리라.

페넬로페는 리아를 만나고 싶었다고 하면서 은근히 공작과 자신의 관계가 가깝다는 뉘앙스를 뿜어대고 있었다.

쥬넬의 말처럼 페넬로페는 화려하고 유혹적이었다. 온몸으로 그 화려함을 뿜어대고 있었다.

아마도 페넬로페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매우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너무 잘 아는 탓인지 그녀의 드레스는 그 터질 듯한 가슴을 반밖에 가리고 있지 않았다.

“레스터 부인.”

“페넬로페, 그냥 페니라고 불러주세요.”

페넬로페가 교태 가득한 몸짓으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인사 끝났으면 그만 가 봐요.”

“네?”

아직 두 사람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상태였다. 리아가 응접실에 들어온 지 이제 5분 정도 지났을 뿐이니.

“인사하려고 왔다면서요. 그 인사 잘 받았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해요. 오늘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라 내가 매우 바쁘네요. 길게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요.”

“오늘 돌아오시나요?”

라이언의 귀환 소식에 페넬로페의 눈빛이 반짝였다.

“바쁘시다면 제가 이웃사촌으로 기꺼이 도울게요.”

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페넬로페라는 여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것도 방금 전.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모른다. 둘의 관계가 양방인지 일방인지 전혀 모르는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도.

분명한 것은 현재 그녀를 마주한 자신의 기분이 영 별로이고, 그녀가 귀찮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쥬넬은 페넬로페를 조심하라고 했다. 수많은 추종자 중 그녀를 콕 집은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리아는 페넬로페에게 따로 대꾸하지 않고 무심하게 호출 벨을 눌렀다. 금방 넬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손님께서 가신다고 하시네.”

“부인! 제가 언제….”

“배웅을 해 드려.”

계속되는 리아의 말에 페넬로페는 입술을 깨물며 불쾌감을 참는 듯 보였다. 주인이 그만 가라고 하는데 더 머물 명분이 없을뿐더러 자존심이 무척 상한 것 같았다.

“반가웠어요. 레스터 부인. 그럼 먼저 나가 보겠어요.”

페넬로페나 페니라고 부르며 그녀와 친분을 쌓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리아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 곧바로 몸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페넬로페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지만, 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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