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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25화 (25/116)

25화. 정보가 필요해

늘 그렇듯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특히나 받아놓은 날짜는 하루가 무섭게 성큼성큼 다가오고는 한다.

라이언이 리아에게 선심을 쓰듯 던져주었던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도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그사이 수도 르셀에서 쥬넬 버켄이라는 왕국 최고의 디자이너가 베드포드 성으로 날아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긴 망토를 펄럭이며 한 마리의 새처럼 날아 들어왔다. 그리고는 도착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리아를 최고의 뮤즈라고 칭송하며 수십 벌의 드레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쥬넬, 이건 어때? 이렇게 과감하게 등 라인을 파내는 거야.”

“어머나! 굿! 오 굿뜨! 역시 부인의 안목은 따라올 사람이 없다니까요홍. 아, 항항항.”

쥬넬의 특이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아항항’ 대는 웃음이 작업실 안을 크게 울려대며 퍼져나갔다.

쥬넬은 도착과 동시가 볕이 잘 들고 넓은 방을 하나 정해서 작업실을 차렸다.

그는 아무에게나 옷을 만들어주지 않지만, 라이언만큼은 그 아무나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와 라이언의 특별한 인연이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리아는 최고급 옷감과 트렌디한 디자인들로 중무장한 드레스 더미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라이언은 생각보다 아주 후한 사람이었다. 친분이 두터워 절대 아무나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드레스값은 똑같았다.

추가금은 있지만, 할인은 없었다. 예전처럼 연예인 할인을 기대한다거나 하는 것은 이곳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언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계산서를 늘 더 후하게 결제해 주었으며 쥬넬 역시 조금의 할인도 해 주지 않았다.

쥬넬 버켄의 의상 한 벌 가격은 기본 100골드부터 시작했다.

메리의 한 달 급여가 3골드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주 많이 비싼 편이었다. 처음 드레스의 가격을 들었을 때 메리가 살짝 혼절했던 것도 이해할 만했다.

더군다나 거기에 추가로 어마어마한 출장비가 플러스 되었다. 그렇지만 라이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얼마가 들든지 간에 리아의 옷장을 가득 채우라는 명을 내렸다. 분명 한 벌당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옷장은 과하게 컸으며 언제 입을지도 모르는 드레스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리아 역시 남편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이 참된 부인의 미덕이라는 생각에 따라 거절할 마음 따윈 없었으니 말이다.

“아항, 부인 오늘은 이 드레스를 입으시는 것을 추천 드리겠어요홍홍.”

쥬넬이 특유에 몸을 베베 꼬는 몸짓을 하며 리아를 위아래도 훑어보았다. 보통의 남자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면 곧바로 뺨을 날렸겠지만 쥬넬은 예외였다.

쥬넬이 들어 올린 것은 하늘하늘한 쉬폰 드레스였다.

“응?”

“어머 마님, 잊으셨어요? 오늘 공작님께서 돌아오시는 날이잖아요.”

메리가 호들갑을 떨며 끼어들었다.

맞다. 오늘은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영지 외곽을 하루 안에 돌아보고 오는 것은 무리라며 짐을 싸서 떠난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가짜 첫날밤 이후 매일같이 리아의 식탁에는 몸에 좋다는 보양식과 고열량 영양식이 올라왔다. 모든 것은 공작님이 명하신 일이라고 했다. 조금도 남김없이 드셔야 한다는 엄포와 함께 말이다.

극진한 보살핌으로 인해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얼굴은 윤기가 흐르고 사랑스러웠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탄력이 붙기 시작하니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 변화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제 제법 가슴도 볼록해지고 팔다리에도 근육이 붙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금세 다이어트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래 그랬지. 오늘 돌아오시는 날이구나.”

모른 척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며칠간 넓디넓은 성에 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허전했다.

혼자 잠드는 밤도 그러했다. 얼마나 되었다고 침대에 그녀만 눕는 것이 어색했다. 리아는 다시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음에도 왜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냐고 따지는 리아를 향해 그는 말했었다.

“남편이 아내의 침대에서 같이 잠을 청하는 것이 잘못인가?”

“그, 그래도. 약속하셨잖아요!”

“약속? 아 그래 약속. 그래서 내가 당신의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나?”

“그건 아니지만.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저 문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잖아요.”

“아! 저 문? 내가 너무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그런지 깜빡했군. 아침이 되니 생각이 나지 뭔가.”

분명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지금 이 상황을 흥미롭게 즐기고 있다는 티를 너무도 내고 있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내 부탁도 하나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부탁…이요?”

“내 부탁은 뭐 당신처럼 한 달이니 뭐니 하면서 까다로운 것도 아니지. 그저 잠은 한 침대에서 잤으면 하는 것뿐이니.”

그날 그는 한 달을 기다려 줄 테니 침대를 같이 쓰자는 어이없는 부탁 같지 않은 부탁을 해 왔다. 그 부탁을 들어줘야 리아의 부탁도 들어줄 수 있다며 말이다.

물론 핑계는 하인들이 우리의 관계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지만 리아는 믿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의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부탁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그건 명령이었다. 그를 유혹하기로 마음먹은 지금, 그의 명령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그날 이후 어색하고도 이상한 동침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벌써 익숙해진 것일까? 라이언이 없던 지난 며칠간 리아는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님, 드레스가 너무 예뻐요! 주인님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메리의 칭찬에 리아가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쥬넬이 골라 준 드레스를 입고 그의 앞에 설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이제 약속된 한 달까지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해낼 것이다. 분명 그를 유혹하고 이곳에서 매우 훌륭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드레스를 바라보는 리아의 눈빛이 확신으로 반짝였다.

***

그는 어떤 사람일까? 리아는 남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레오니의 보잘것없는 기억 속에 흉포한 짐승 따위로 묘사된 엉터리 정보 말고 제대로 된 정보가 필요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의 취향과 성향을 파악해야 한다.

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호기롭게 유혹하겠다고 문제없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지부터 막막했다.

흔히들 연예인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이 아주 쉬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혀 아니다. 화려한 화면 속 모습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내성적인 스타들도 많다. 물론 리아 역시 그렇다.

화면에 비친 모습은 모두 연기일 뿐. 더군다나 스타인 그녀가 먼저 유혹하지 않아도 수많은 남자가 먼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다가왔었다. 이번엔 먼저 다가서야 한다.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네?”

리아의 중얼거림에 메리가 귀를 쫑긋거렸다.

“마님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배고프세요?”

메리는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프진 않으세요?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메리. 나 진짜 배 안 고파. 이러다 살 너무 쪄서 드레스가 맞지 않을까 봐 걱정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마님은 더 드셔야 해요. 지난 3년 동안 워낙 못 드셨잖아요. 데이지가 그러는데 아무리 좋은 음식을 해 드려도 손도 안 대셨다면서요?”

“데이지?”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그 오만한 데이지 말이야?

“데이지가 마님 식사 담당이었잖아요.”

“그, 그랬지.”

그럼 그 멀건 죽과 딱딱한 빵이 모두 데이지 짓이라는 거군. 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공작 부인에게 그런 음식을 주었다는 것이 이상하긴 했었다.

“그래. 그때 내가 조금밖에 안 먹긴 했지….”

“조금이라니요! 전혀 드시지 않은 날이 많으셨잖아요. 데이지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주방에서 아무리 좋고 귀한 음식을 해드려도 손도 대지 않으신다고.”

물론 데이지는 걱정보다는 투정과 불평을 많이 했지만 메리는 그래도 좋은 쪽으로 그녀를 포장해서 이야기를 전했다.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메리의 말이 모두 맞는 건 아니었다. 손도 대지 않은 건 맞지만, 음식은 분명 형편없었다. 가끔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멀건 수프를 마셔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데이지가 그 아까운 음식들 어쩔 수 없이 다 버렸다고 해서 주방 사람들이 얼마나 속상해… 어머! 아니에요. 제가 무슨 헛소리를….”

“아니야. 맞는 말이지. 다들 내 욕했겠네.”

리아는 데이지의 그간 행동을 되짚어봤다. 늘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불손했다.

어딘가 느낌이 좋지 않았지. 그날 공작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랬고.

정신없이 몸을 추스르느라 생각지 못했지만, 이상하긴 했었다. 그렇게 사람 좋은 집사 넬슨이 그토록 레오니를 내버려 뒀다니 말이다.

“그런데 메리.”

“네 마님.”

“어째서 데이지가 내 담당 하녀가 되었던 거지?”

“그, 그건….”

메리가 대답을 망설였다. 눈알을 굴리며 딴청을 피우는 모습에 리아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괜찮아 메리. 난 진짜 괜찮으니까 말해줘. 궁금해서 그래.”

“…그, 그게 사람들이 저… 마님을 무서워했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데이지가 선뜻 나서 줘서 그래서 데이지만 마님 방을 출입했어요….”

“아… 그랬구나….”

“그때는… 그러니까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에요. 전 마님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마님 전속 시녀가 된 것이 제 인생의 가장 축복이고 영광이에요!”

모든 원인은 데이지였군. 리아는 자신의 진정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메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주먹을 작게 말아 쥐었다.

‘앙큼한 것! 성안에 모든 사람을 속이고 레오니를 기만했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때 안 드신 것까지 몽땅 다 드셔야 해요. 공작님께서 마님 식사를 얼마나 신경 쓰시고 계시는데요.”

메리의 말에 리아의 신경이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왔다. 자신을 사육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시간마다 음식을 해 나르는 이유가 모두 남편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한 달 그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라이언의 말을 떠올리자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는 한 달 동안 가능한 자신을 살찌워서 잡아먹을 생각이다.

“완전한 사육이 따로 없군.”

“완…전한? 뭐요?”

“아냐 아냐. 그나저나 쥬넬은 왜 이렇게 안 와?”

쥬넬은 쉬폰 드레스에 꼭 어울리는 장갑이 자신의 방에 있다며 몸을 비비 꼬며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리아는 쥬넬에게 물어볼 말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쥬넬보다 라이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 그가 딱이었다.

“오홍홍홍홍. 마이 프린세스, 마이 뮤즈! 저 쥬넬이 돌아왔어요.”

“쥬넬! 기다렸잖아. 여기 앉아 봐.”

리아가 필요한 시점에 딱 맞춰 요란하게 등장한 쥬넬을 티테이블 앞에 앉혔다.

“메리? 나 갑자기 케이크랑 커피가 먹고 싶어. 케이크. 그래 과일 케이크!”

“과일 케이크요? 그건 바로 준비가….”

“지금! 지금부터 준비해서 가져다줄래? 오래 걸려도 기다릴게. 나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래.”

사랑스러운 황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부탁을 하는 리아의 모습에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마님이 드시고 싶으시면 무조건 가져다드려야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요리사를 재촉해서 최고의 케이크를 가져다드릴게요!”

메리가 비장한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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