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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24화 (24/116)

24화. 알 수 없는 남자

“고마워요.”

리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 애썼지만 그녀의 대답에는 숨길 수 없는 냉소가 섞여 나왔다.

첫날밤을 미뤄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라니.

리아의 고맙다는 말에 라이언의 눈빛이 이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당신은 내 흉터가 보이지 않나?”

리아의 생각과는 다르게 라이언이 흉터를 언급하며 뜬금없는 질문을 내뱉었다. 리아의 시선이 그의 이마 위 흉터로 옮겨갔다가 이내 별스럽지 않은 듯 돌아왔다.

“잘 보이네요. 다행히도 눈은 정상이에요.”

“아무렇지도 않나?”

‘뭐야, 지금 나보고 자기 흉터 평가까지 해 달라는 거야? 아까는 아는 척도 못 하게 차갑게 굴더니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주 잘 어울리시네요. 흉터의 각도와 크기가 아주 적절해요.”

불손한 마음의 소리와는 다르게 매우 공손한 대답이 리아의 입어서 쏟아졌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라이언이 황당한지 헛웃음을 지었다.

“적절하다고?”

“네 매우. 그럼 이만 자리를 피해 주시겠어요? 피곤해서요.”

리아가 문가를 바라보며 라이언을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쉬고 싶었다. 그러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라이언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했던 리아의 몸이 풀어지려는 찰나였다. 그의 발걸음이 문 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향하는 것을 본 것은. 그것도 침대가 있는 쪽으로!

“저, 저기. 그쪽이 아니에요!”

리아가 라이언을 따라가며 작게 투덜댔다. 정말 취한 것인지 아님 멀쩡한 건지 자꾸만 헷갈렸다.

“문은 저쪽이에요!”

그렇지만 리아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라이언은 곧장 그녀의 침대 위에 크게 대자로 누워버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아까 하신 약속을 벌써 잊으신 거예요? 여기에 누우시면 어떡해요!”

다급한 리아의 외침에도 라이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저기! 공작님!”

“라이언.”

“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그게 내 이름이야.”

‘뭐야. 지금 이름을 알려 줄 때야? 그렇게 원하신다면 불러줘야지.’

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라이언을 쏘아보았다.

“네. 그럼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님. 취하신 것 같은데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님 방으로 돌아가셔서 편하게 쉬세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갑자기 허리를 세웠다. 그의 얼굴은 전혀 취한 사람 같지 않았다. 아주 멀쩡했다.

“우리의 첫날밤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실망시킬 필요까진 없지 않나? 첫날밤부터 아내에게 쫓겨난 신랑이 되고 싶지는 않군.”

“그… 그래도.”

“눕지.”

라이언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내가 약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키는 사람이지.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그만 잡시다.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말을 마친 라이언이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이내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리아는 한참을 서서 라이언을 내려 보다가 결국은 체념한 듯 그의 옆으로 올라가 가능한 한 멀찍하게 떨어져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많이 피곤했고 많이 지쳤으며 많이 졸렸다. 그리고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이대로 신랑을 쫓아낼 수도 그렇다고 자신이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다.

리아가 자리에 눕자 그녀의 웅크린 몸 위로 따뜻한 이불이 덮어졌다. 라이언이었다.

‘잠든 줄 알았는데…’

뭐라고 더 따질 말도 남아있지 않았다. 리아는 그저 그가 덮어준 이불을 꼭 끌어당길 뿐이었다.

“잘 자. 레오니.”

그때 그녀의 귓가로 듣기 좋은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이제 내가 레오니야. 그게 바로 나야.’

“당신도요.”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꿈뻑이며 대꾸를 한 리아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 잠이 들었다.

라이언은 잠든 자신의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빨간 머리를 늘어트리고 작게 웅크려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모습이 묘하게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취했군. 취한 것이 분명해. 취하지 않았다면 이럴 리가 없지.”

어지러운 마음을 감추려는 듯 그의 눈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감겨들었다.

***

이른 아침 라이언이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잠을 잔 것인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힘겹게 노력 중이었다.

참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불면증.

그것은 라이언의 오랜 동반자였다. 특히나 이곳 베드포드 성에서의 첫날부터 아침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깊이 잤다는 것은 직접 겪고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진 것은 편안함이었다. 평생을 통틀어 이토록 달콤한 잠을 이룬 것이 또 언제였을까? 그의 기억 속에 그런 날은 없었다.

처음이었다. 라이언이 기억하는 한 분명 처음이었다.

지난밤 마신 술 탓도 아니었다. 그의 불면증에는 술도 효과가 없었다. 술을 마신 날은 더 정신이 또렷하기만 했다.

상쾌한 기분과 가벼운 몸으로 잠에서 깨어난 라이언은 옆자리에 누워 아직도 한밤중처럼 곤히 자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넓은 침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한쪽 구석에 몸을 공처럼 말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여자.

자꾸만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여자.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는 묘한 여자. 참으로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물론 그녀를 대하는 자신의 행동도 그러했지만.

“한 달이라니 미쳤군.”

라이언은 지난밤 그녀에게 선심을 쓰듯 베풀어주었던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이 떠오르자 쓰게 웃음을 지었다.

목표는 오로지 모엘르 검을 되찾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그녀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준 것이지? 물어도 마땅한 답은 없었다. 그저 떨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몸에 마음이 움직였을 뿐.

그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머리를 작게 흔들고는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친 동작에 침대가 흔들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지난밤 아내가 쳐 놓은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일어선 라이언은 아내를 힐긋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방 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마님 일어나셨어요?”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웃으며 다가왔다. 메리의 얼굴에 정신이 번쩍 든 리아가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없어?’

없다. 분명 옆에서 잠들었던 그녀의 남편이 사라졌다. 텅 빈 그곳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깔끔했다.

리아의 몸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알아차린 메리는 일어난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면서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벌써 영지를 둘러보러 나가셨어요.”

“응?”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몰라요. 공작님도 기사님들도 정말 대단하셔요. 지난밤에 모두 엄청나게 많은 술을 드셨다고 하던데, 전혀 티도 안 나요. 이래서 다들 검은 기사단이 최고라고 하는가 봐요.”

리아는 왠지 그 말이 당연하게 여겨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은 정말 지치지도 않고, 힘든 일도 없을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벌써 밖에 나갔단 말이야? 정말 이 침대에서 아침까지 같이 자긴 한 것일까?’

분명 자신은 몹시 긴장했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긴긴밤을 어찌 보내나 고민도 했었다. 그런데 자리에 눕자마자 기억이 없다. 어쩜 그럴 수 있지?

너무도 태평하게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버린 탓에 남편이 자신의 옆에서 정말 잔 것인지 그것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잘 자 레오니.’

지난밤 다정했던 라이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꿈일까? 그것도 꿈인 것일까?

그때 몸을 일으켜 앉은 리아의 앞에 아침이 차려진 작은 테이블이 올려졌다. 침대 위에서 받는 아침상이라니!

“메리, 자꾸 이러면 나 응석받이가 될지도 몰라.”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스프, 그리고 향기로운 커피가 먹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무슨 말씀을요. 오늘은 공작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신걸요. 마님께서 피곤하실 테니 아침 식사는 방으로 올려보내 드리라고요.”

“공작님이?”

메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처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자신에게 보여줬던 라이언의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때 방 한쪽 끝에서 처음 본 문이 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어? 메리. 혹시 저거 문이야?”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었다. 아니 문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던 공간이었다. 워낙에 방이 넓고 장식도 많아서 저런 곳에 문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신경 써서 보지 않는다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이었다.

“저기요? 저긴 공작님 침실로 연결되는 문이잖아요.”

“공작님? 침실?”

메리의 말에 놀란 리아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황급히 금방 발견한 문 앞으로 달려갔다.

공작님의 침실이라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의 침실은 복도 맨 끝에 있었고 그 끝에 방은 단 하나였다.

공작의 방은 계단도 따로 사용하는데… 설마.

“입구는 다르지만, 안에서 이어지는 문이 있다는 거 모르셨어요?”

‘몰랐어. 몰랐다고!’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뒤따라온 메리가 말했다. 역시나. 알 리가 없었다. 레오니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지.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리아가 열린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메리의 말처럼 그 안은 분명 또 다른 방이었다. 자신의 방과 구조가 똑같지만 실내장식은 전혀 다른 방. 남성적이고 거친 느낌이 드는 라이언의 방.

“마님? 왜 그러세요?”

“이 문이 원래부터 여기 있었다고?”

“그야 당연하죠.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런데 이 문이 왜 열려있어?”

리아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내뱉었다. 남편은 이 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겠지? 그럼 혹시… 그가…

“그거야 제가 연 것은 아니니 한 가지밖에 없죠.”

“한 가지?”

“네. 아마도 공작님께서 아침에 방으로 돌아가시면서 열어두신 것 같으신데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였다. 그는 이 문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사용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활짝 열려있는 것은 분명 자신을 놀려주기 위함일 것이니라.

“으악!”

당했다. 뭐? 첫날밤 아내에게 쫓겨난 신랑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그렇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거짓말을 했단 말이지?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이렇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떡하니 있는데 모른 척을 했단 말이지?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그는 정말로 알 수 없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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