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첫날밤에 생긴 일
갓 목욕을 끝내고 나온 리아의 두 뺨이 보송보송했다.
레오니는 아직 스물, 어린 나이였다.
“마님, 점점 보기 좋아지셔요.”
물론 메리의 말처럼 처음 깨어났을 때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보기 좋아졌다. 그렇지만 딱 그만큼이었다. 목욕하면서 리아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허락할 수 없어!’
곧 찾아올 첫날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지금 자신의 몸매는 딱히 몸매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막 살이 오르기 시작했을 뿐, 그냥 마른 몸. 전혀 육감적이지 않은 그냥 어린아이 같은 몸.
그게 현실이었다.
공작에게 초라한 가슴을 보여주기 싫었다. 스물이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가슴.
그 가슴을 남편이 본다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메리의 환상적인 솜씨로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절대 보여줄 수 없어!”
“네? 마님? 무슨 말씀이세요?”
진저리를 치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물었다.
“아, 아니야. 그냥….”
리아가 말꼬리를 흐리자 메리가 더 묻지 않고 머리를 빗겨주었다. 메리의 빗질이 계속될수록 리아의 붉은 머리가 점점 더 윤기를 머금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뒤따라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메리와 리아의 고개가 문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라이언이 서 있었다.
그녀를 올려보내고 몇 잔, 아니 몇 병을 더 마신 것인지 라이언은 상당히 취한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신의 기사단장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온 라이언을 보고 놀란 메리가 뒷걸음을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무엇이 그리 흥겨운 것인지 라이언과 기사단장들은 웃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누가 누구에게 기댄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한 덩이로 어우러져 깔깔대더니 갑자기 누군가에게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하나둘 화끈한 첫날 밤을 부르짖으며 사라졌다. 물론 끝까지 라이언을 향해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은 채로.
그들이 떠난 자리에 라이언과 리아 둘만이 남겨졌다.
라이언이 살짝 흔들리는 몸을 문에 기대고 섰다.
“취했어요?”
집요한 라이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리아가 물었다. 물론 그는 답이 없었다. 또다시 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저기요!”
리아가 조금 더 큰 소리를 냈다. 라이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 자세, 그 표정, 그 눈빛 그대로.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단단히 취했구나. 저래서 첫날밤은 무슨.
리아가 고개를 흔들며 먼저 시선을 피해버렸다. 취한 사람을 상대해서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고민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취해서 나타난 남편이 반가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화가 났다. 알 수 없는 기분. 파악되지 않는 마음이었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거지?’
보고 있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남편의 집요한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몇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리아의 머리에 묵직한 손길이 느껴졌다.
“뭐, 뭐예요?”
라이언이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라이언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메리가 떨어트리고 간 빗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저, 저기요?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리아가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답변은 없었다. 답변은 없었지만, 그녀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는 듯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정수리부터 머리끝까지 그의 손에 쥐어진 빗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 내렸다.
라이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리아가 고개를 흔들며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이번에는 다른 손이 리아의 어깨 위로 올려졌다.
“그대로 있어.”
드디어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리아는 몇 번 더 몸을 흔들었지만, 라이언의 손은 끝까지 그녀의 탈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단한 라이언의 손길에 리아가 할 수 없이 벗어나기를 포기했다.
그래 술 취한 사람의 주정이야. 조금만 참자.
리아는 생각했다. 취한 사람의 고집은 이길 수가 없는 법이야. 원하는 만큼 빗으라지. 다른 주정보다야 견딜 만하잖아.
사그락사그락
방안에 부드럽게 머리를 빗어 내리는 소리가 조용하게 퍼져나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참 특이한 주정이었다. 살짝살짝 닿는 그의 손길이 어색했지만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리아는 근처에 놓인 거울에 비친 라이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변…태…?”
“뭐?”
순간 감겼던 라이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리아는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봐 거울로 향했던 시선을 빠르게 내리깔았다.
하도 수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그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와버렸다.
술에 취해 눈을 감고 여자의 머리를 빗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 모습이 묘하게 변태처럼 느껴진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리아가 가만히 있자 멈췄던 라이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위아래로 계속.
참다못해 리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요?”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빗겨주는 것이 이상한가?”
라이언의 대답에 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언이 엉거주춤하게 한발 물러섰다.
“그만. 이리 주세요.”
리아의 작은 손이 라이언의 가슴 앞으로 내밀어졌다.
“빗 주세요.”
라이언이 말없이 손 위로 빗을 올려놓았다. 라이언에게서 빗을 뺏어 내려놓은 리아가 티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여기 앉으세요.”
어서 앉으라는 눈짓에 라이언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화가 난 것 같군.”
“아무래도 취하신 것 같아요.”
리아는 최대한 공손하고 순종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랜 생각 끝에 얻어낸 결론은 이곳에서는 저 남자가 대장이라는 것이다.
갑 중의 갑.
다소 어이없고 황당하긴 하지만, 새로 얻은 생을 그냥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좀 더 제대로 살아 내고 싶었다.
어처구니없게 환생하게 된 지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의 상황은 충분히 가능했다.
다시 태어난 자신이 이 나라의 공주라고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었고, 기댈만한 것은 울트라 슈퍼 갑인 이 남자뿐이었다.
“그런가? 내가 취한 것 같은가?”
리아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야기를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는 듯 라이언이 여전히 유쾌한 표정으로 어찌 보면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흠, 그러니까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매우 아팠어요. 아시죠?”
라이언의 눈빛이 ‘정말?’이라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많이 아팠어요. 일상생활이 어려울 만큼.”
결혼식부터 이어진 지난 3년 동안의 기행을 몸이 아팠던 탓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변명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아직 몸이 회복된 것이 아니에요.”
리아가 자신을 한번 보라든 듯 두 손을 양어깨 위로 살짝 들어 올리자 라이언의 눈빛이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 입으로 직접 말하기 부끄럽지만, 삐-쩍 아주 삐쩍 마른 수준이죠. 아! 물론 살을 찌우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라이언이 턱짓이나 고갯짓이 아닌 말로 답을 했다.
“그… 그러니까 저….”
이상하게 입이 안 떨어졌다. 할 수 있어! 말해!
“기… 기다려 주세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빠르게 내려왔다.
“기다려 달라? 뭘 기다려 달란 말이지?”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면서 물어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그래도 우선은 살고 봐야 하는지라 리아가 다시 용기를 냈다.
“첫…날…밤. 첫날밤 말이에요.”
리아가 무언가 중대한 발표를 하듯이 첫날밤이라는 말을 내뱉자 순간 라이언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참기 힘들다는 듯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라이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창문을 넘어 밖으로까지 퍼져나가자 이내 밖에서도 화답하듯 기사들의 웃음소리와 외설적인 농담이 들려왔다.
상당히 노골적인 그들의 외침에 기분이 상한 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열린 창문을 세차게 닫고 커튼 까치 꼼꼼하게 치고 돌아서자 라이언이 웃음을 멈추고 그녀를 마주했다.
“그게 걱정인가?”
웃음기를 거두고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며 묻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라기보다는 보시다시피 제가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전혀 저 남자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리아는 라이언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 달.”
리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라이언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네?”
“그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한 달이라는 말이 지닌 의미를 파악한 리아의 표정이 순간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놀람. 경악. 분노. 흥분. 그리고 걱정.
‘진정하자. 그래도 한 달의 시간은 번 셈이잖아.’
지금 당장 부탁을 거절하고 자신을 범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면 될 것이었다.
당장 첫날밤을 보낸다고 하면 그를 사로잡을 자신이 없었다. 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와 밤을 보내려는 것은 그저 후계자를 얻겠다는 의무 때문이었고 욕망이나 서로에 대한 끌림 같은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 세계에서 아주 근사하게 살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를 유혹해야 한다. 그를 진짜 남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녀가 떨어진 이곳은 유럽의 어느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넘어선 과거도 아니었다.
엘리시아. 처음 들어본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계. 고리타분하고 맘에 들지 않는 세상.
한 몫 단단히 챙겨 도망쳐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평생을 숨어서 살아야 했다. 그건 잘사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엘리시아는 법으로 이혼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의 대답이 맘에 들진 않지만, 이 정도 배려라도 해 준 것에 우선은 감사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