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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22화 (22/116)

22화. 길고 긴 밤

“제레미. 우리에 공작부인께서 얼마나 잘 드시는지 보았는가?”

마이클이 제레미를 향해 물었다. 두 남자는 테이블 가장 끝쪽에 나란히 앉아 아까부터 리아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형님. 나도 보고 있습니다요. 그런데 저 많은 것들을 정말 다 드신 겁니까?”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어느 사람보다도 가장 많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장의 괴물이라 불리는 기사단장들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는 여전히 말 그대로 폭풍 흡입 중이었다.

“제레미. 대장 표정을 좀 보게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대장님, 넋이 아주 나간 것 같은데요.”

라이언은 리아의 옆에서 리아의 시중을 손수 들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잔이 비워지면 와인을 따라주고, 접시가 비면 음식을 덜어주었다.

“제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 대장이 부인께 푹 빠진 것 같은데 정녕 맞습니까?”

“제레미. 그건 아닐세. 내가 판단하건대 저건 아마도 신기한 것을 발견한 표정이라네.”

“아니죠. 마이클 형님. 그건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저건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입니다!”

제레미의 말에 마이클이 크게 손을 휘저으며 황당한 웃음을 내뱉었다.

“자네 미쳤나? 천하에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이 사랑을? 죽음의 사자가 사랑에 빠졌다고?”

“죽음의 사자래도 여자 앞에서 별수 있겠습니까? 저 행동을 좀 보시란 말입니다.”

마침 라이언은 웃으며 리아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고 있었다. 마이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어 한숨에 다 마셔버렸다.

라이언을 알아온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자에게 저토록 다정한 모습은. 그에게는 지금 라이언의 행동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아름답지 않으십니까? 3년 전만 해도 아주 어린 아이 같았는데. 역시 여자의 변신은 알 수 없는 법인가 봅니다.”

제레미의 말에 마이클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공작부인은 아름다웠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주홍빛 조명이 와인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리아의 모습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붉은 머리가 조명을 받아 눈동자와 같은 황금빛으로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랑은 아닐 것이네. 죽음의 사자가 사랑이라니. 분명 너무 많이 먹어 신기한 거야. 저토록 많이 먹는 사람은 이제껏 본 적이 없네.”

계속되는 마이클의 말에 제레미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걸까요?”

그 역시도 공작부인의 먹성이 신기한 건 사실이었다.

자신들을 두고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이언은 리아의 먹는 모습을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정말 잘 먹는 여자였다. 거절하는 법도 없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는 모습이 퍽 맘에 들었다.

“더 먹을 건가?”

도대체 언제까지 먹을 건가 싶어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안 드세요?”

리아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라이언을 돌아봤다.

“난 배가 부르군.”

“전 조금 더 먹을게요. 요즘 살을 찌우는 중이라서요. 제가 좀 많이 먹죠?”

물론 당연히 많이 먹는다. 아주 매우 몹시 많이 먹는다. 그렇지만 라이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뒤에 서 있던 시종 존의 입마저 떡 하니 벌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기 좋게 적당히 먹는군. 좀 더 먹도록. 그 정도로 살이 찌겠나?”

말과 동시에 손을 들어 음식을 더 가져오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라이언은 생각했다.

‘이상하게 이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그 뒤로 접시를 몇 번이나 더 갈아치운 후 드디어 배가 찼는지 리아가 백기를 들었다.

“아 이제 그만. 오늘은 이 정도만 먹을래요.”

이 정도만? 주변의 모든 사람이 놀란 듯 그녀를 쳐다봤지만 공작 부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왜 조금 더 먹지.”

더 먹으라고? 저거보다 더? 공작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한번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잘 때 거북해서요.”

사람들은 지금 먹은 음식만으로도 매우 거북해! 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라이언이 홀 한쪽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라이언이 포크를 들어 올려 유리잔을 두드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공작 부부 쪽으로 향했다.

“밤이 깊었군. 우린 먼저 들어가겠네.”

라이언의 말이 끝나자 홀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장! 첫날밤 화끈하게 알죠?”

“파이팅입니다!”

가만히 앉아 부른 배를 두드리던 리아는 우렁찬 기사들에 외침에 깜짝 놀라 얼굴이 붉어졌다.

‘첫날밤? 그게 무슨 말이야? 첫날밤이라고?’

잊고 있었다. 그랬었지. 오늘이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제대로 맞이한 첫날이었어.

첫날밤. 그것은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의 신성한 의무라는 말에 포함된 것들이 그저 플라토닉 한 것만은 아닐 것이었다.

당황한 리아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생각보다 요란한 동작에 사람들의 시선이 리아에게 모여들었다.

“저,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공작님은 좀 더 만찬을 즐기세요! 쭉 오래오래 아시겠죠?”

만찬을 오래오래 즐기라는 말을 강조한 리아가 라이언의 대답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뒤돌아 재빠르게 홀을 빠져나갔다.

그런 리아의 뒷모습에 라이언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쾌했다. 그녀의 당황한 듯 달아오른 얼굴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뭐, 괜찮아. 밤은 아주 길고도 기니까 말이지.

공작부인의 행동에 웃음이 터진 기사들은 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대장 이거 어찌합니까? 우리랑 같이 오래오래 만찬을 즐겨야 하게 생겼습니다!”

라이언도 함께 웃으며 남은 술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

만찬장을 벗어난 리아는 부끄러움과 당황함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자신의 방으로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하녀 메리가 급하게 따랐다.

방으로 들어선 리아는 가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무슨 생각인 거야? 첫날밤을 화끈하게?

간신히 식혀놓은 두 뺨이 그 말을 떠올리자 다시금 뜨거워졌다. 그때 메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메리, 나 물 좀 줄래?”

“마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메리가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가득 따라 리아의 손에 전해주자 리아가 순식간에 벌컥대며 전부 해치워 버렸다.

“마님!”

“이상하게 덥네. 그렇지?”

물을 잔뜩 마시고도 열기가 가시지 않는지 리아가 여전히 손부채 질을 하며 메리에게 물었다.

“그,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조금 더운 것 같기도….”

사실 방안은 조금 썰렁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모시는 주인님이 덥다면 더운 것이다. 메리의 눈에 비친 마님의 얼굴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오늘따라 상당히 덥네.”

“그런데 마님. 무슨 음식을 그렇게나 많이 드셨어요?”

메리가 붉어진 리아의 얼굴에 손부채 질을 함께 해 주며 물었다.

“내가? 무슨….”

메리의 물음에 리아는 어리둥절했다. 음식을 많이 먹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긴장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다들 저보고 마님께서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음식을 드시고 계신다고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지 묻더라고요. 저도 만찬장에 함께 들어가는 건데 그랬어요.”

“내가 그랬대?”

“많이 안 드셨어요? 다들 잘못 본 건가?”

평소보다 몇 배는 음식을 더 먹었다고? 메리의 말에 갑자기 더부룩해져 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리아가 인상을 썼다.

‘아, 내가 미쳤지!’

그건 리아의 버릇이었다. 몸이 바뀌어서 이제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전생 버릇 개 못 준다고 긴장하면 자신도 모르게 많이 먹는 버릇이 또 나왔던 것 같았다. 리아가 조심성 없는 행동을 자책했다.

‘몸이 바뀌었다고 성격까지 바뀐 것은 아닌 거 알면서… 조심했어야지!’

그러고 보니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가라앉지 않는 불타오르는 얼굴도 부끄러움이 아닌 다른 이유인 듯했다.

“저기 메리… 나 혹시 술도 마셨대?”

물어보나 마나였다. 분명 주는 대로 먹고, 주는 대로 마셨을 것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알코올 때문에 붉어진 것이었다.

“에-휴.”

메리의 답을 듣지도 않고 리아가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모든 것은 남편이라는 그 남자 때문이었다. 말투도 외모도 이상하게 취향 저격의 남자였다. 또 그런 남자 앞에서 약해지는 것이 여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본능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이라니 더 의식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마님. 지금 바로 씻으시겠어요?”

“씻어? 내가 왜?”

첫날밤이라는 말이 다시금 리아의 귓가를 맴돌았다.

“네? 주무시기 전에 꼭 목욕하셨잖아요.”

맞다. 더럽고 더러운 레오니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전에 꼭 목욕을 했다. 씻어도, 씻어도 부족한 듯 느껴졌으니.

이만큼 보기 좋은 피부로 거듭난 것도 목욕에 대한 리아의 작은 집착 때문이었다.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메리를 향해 리아가 가능한 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씻고 자야지.”

“네 마님. 바로 목욕물을 준비할게요.”

대답과 함께 메리가 욕실로 들어가자 리아는 초조한 듯 두 손을 마주 대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지만, 그중에 최고는 남편이었다. 그것도 대놓고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남편 말이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리아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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