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만찬(2)
“이게 무슨 짓이지?”
라이언이 거친 숨을 뿜어대며 무섭게 말을 뱉어냈다.
갑자기 움직인 라이언 탓에 리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끌어내렸다.
“아, 갑자기 만져서 미안해요. 아깐 보지 못해서.”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지 라이언이 다시 인상을 썼다. 흉터를 보지 못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헛소리였다.
그의 흉터는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내의 표정이 매우 이상했다. 그녀는 흉터를 보고 직접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자주 보아서 익숙해진 사람들조차도 가끔 놀라곤 하는 흉터였다. 그런데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혐오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호기심이 가득할 뿐.
여전히 인상을 쓰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사과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미안해요. 흉터가 꽤 큰데 언제 다친 거예요?”
그리고는 곧바로 질문이 이어졌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 그녀는 눈으로도 말하고 있었다. ‘왜 다쳤어요? 언제 다쳤어요?’
물론 라이언은 답해줄 마음이 없었다.
질문은 그가 하고 싶었다. ‘당신이야말로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거지? 이유가 뭐지?’ 그렇지만 라이언은 질문을 안으로 삼킬 뿐이었다.
그녀는 딴사람이었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얼굴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은 물론이요, 직접 흉터를 만지기까지 하는 그녀의 행동은 그의 흥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히 차고 넘쳤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
라이언의 말에 잔뜩 기대했던 리아가 실망한 듯 입술을 샐쭉거렸다.
“에이, 그게 뭐 큰 비밀이라고.”
“뭐?”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들어보는 투정이었다.
지금껏 이토록 당당하게 그의 흉터에 관해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뒤에서 흉터를 두고 수군거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마음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없는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3년 만에 만난 아내라는 여자는 그의 얼굴 앞에 대놓고 흉터에 관해 묻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15년간 그 누구도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왜 다친 건지 진짜 말 안 해 줘요?”
리아가 천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라이언이 무섭게 인상을 썼다. 일그러진 그의 이마를 보며 그녀가 투덜댔다.
“진짜 치사하네. 그만 째려봐요.”
“째려… 뭐?”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라이언이 묻자 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더 안 물어볼 테니 그만 째려보시라고요. 무서워서 어디 밥 먹으러 가겠어요? 먹기도 전에 체하겠네.”
퉁명스럽게 말을 마친 리아가 라이언을 지나쳐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리아는 그깟 흉터가 뭐라고 저러는지 라이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숨기고 싶으면 가리고 다니던지. 보란 듯이 내놓고 다니면서 물어보지도 못하게 하다니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 공작 부부의 행동을 보고 시종 존과 메리는 너무 놀라 돌부처가 된 지 오래였다.
‘역시 주인마님은 미치신 게 분명해! 주인님께 그런 질문을 하다니!’
‘역시 마님은 대단해! 어쩜 말도 잘하실까!’
물론 그들이 놀란 이유는 다르지만 말이다.
“안 갈 거예요? 이러다가 여기서 밤새우겠어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말했다.
배고프다는 시늉을 하며 삐딱하게 멈춰선 리아를 보며 라이언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하게 그녀의 행동이 불쾌하지 않았다. 그녀의 변화가 당황스럽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라이언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가지.”
라이언이 리아의 곁으로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는 것쯤이야 수도 없이 해 보았던 일이었다.
지금 이 남자는 보통 남자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것이 달랐지만.
둘의 걸음은 지극히도 느렸다. 긴 복도를 지나 계단에 다다르기까지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마주 닿은 손에 열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질 무렵 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넬슨에게 전해 들었어요. 감사해요.”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이 라이언은 리아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는 답했다.
“당연한걸.”
“남편으로서 당연한 일을 해 주신 거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내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은 남편의 무관심을 질책하는 불만을 섞은 교묘한 감사 인사였다. 리아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라이언이 모른 척 다시 물었다.
“고맙군. 혹시 내가 갚아줘야 할 것이 남았나?”
“아쉽지만 더는 없어요.”
“그래.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군.”
라이언의 말끝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웃음기가 섞인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음악처럼 리아의 귀를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한 계단씩 내려갈 때마다 리아의 아쉬움이 더해졌다. 유쾌함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그녀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정말 미친 것처럼 묘한.
***
여자가 웃는다. 여자의 웃는 모습을 보자 그의 기분이 사정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웃어? 감히 네년이 웃어?”
물론 누구도 듣지 못할 작고 음산한 혼잣말이었다.
공작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자의 표정에 그의 기분도 같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여자는 불행해야 한다. 여자는 저런 드레스도 입어서는 안 된다. 여자는 공작의 손을 잡아서도 안 되고 웃어도 안 된다. 여자는 그 무엇도 해서는 안 된다.
지난 3주간, 여자의 변화를 지켜보며 그는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사람의 행색을 하고 움직이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다. 그냥 살려두는 게 아니었다. 여자의 웃는 모습이 이 정도로 분노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정말 몰랐다. 끝까지 보지 못했어야 했는데.
죽은 것보다 비참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여자는 어둠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지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구차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늦었다. 여자는 밖으로 나와버렸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공작이 오기 전에 죽였다면 더 수월했을 텐데.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렇지만 공작은 그를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곧 죽는다. 지금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길.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여자가 계단 끝까지 내려오자 그는 재빠르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공작의 귀환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만찬이었다. 만찬장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꾸며졌다. 이번 만찬은 베드포드 성에서 아주 오랜만에 열리는 큰 행사였다.
넬슨은 문을 열며 공작과 공작부인의 등장을 크게 알렸다. 자신이 성의 집사를 맡은 이후 처음 준비하는 만찬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오늘을 위해 열성적이었다.
식탁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성의 모든 하인이 오로지 이 시간을 위해 그간 노력했던 결과였다. 그렇지만 참석 인원은 많지 않았다.
기사단을 대표해 단장 일곱 명이 참석했으며 공작과 공작의 비서 매튜, 그리고 리아가 전부였다. 차려진 음식에 비하면 매우 단출한 인원이었다.
라이언과 리아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 부부를 환영했다.
넬슨의 안내에 따라 라이언과 리아가 나란히 자리에 앉자 모두 작은 소리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리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수군대는 이유를. 이들의 시선이 리아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는 이유를.
그 모든 것에 이유는 바로 변화 때문일 것이다. 몰라보게 변한 공작부인 말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3년 전 그 초라했던 결혼식에 참석했던 당사자들이다. 그 당시 자신들이 보고 겪었던 공작부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그녀의 모습은 충격이었으리라.
“그만 자리에 앉게.”
“대장. 형수님이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누군가 소란을 뚫고 리아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그러자 라이언의 뒤에 서 있던 시종 존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감히 주인마님께 그런 호칭을 쓰시다니.”
“존. 그만두게. 내 형제 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잊었는가.”
기사단장들에 관해서라면 라이언은 언제나 관대했다. 이 자리에 모인 7인의 단장들은 라이언이 가장 믿는 부하이자 형제였다.
“공작 각하 잔을 드시지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꺼낸 것은 비서 매튜였다. 리아의 시선이 매튜를 향해 돌아갔다.
‘오 마이 갓. 브래드피트랑 똑 닮았잖아.’
이 세상에는 어째서 이토록 잘생긴 사람이 많은 것인가! 매튜를 향한 리아의 표정이 황홀함으로 물들자 옆에 있던 라이언이 그런 리아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부인, 그러다 침 떨어지겠군. 어서 잔을 드시오.”
“저 사람은 누구죠? 저한테 여기 있는 사람들을 소개조차 하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라이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가 라이언의 옆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순간 코끝을 맴도는 그녀의 향기에 라이언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미쳤군. 정신 차려. 라이언 레놀프.’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자세를 바로 한 라이언이 리아의 말을 무시하며 축배를 들었다.
“모두 잔을 들지. 오늘은 우리가 베드포드 성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날이다. 모두 먹고 마시고 즐기시게나.”
리아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잔을 들었다. 모인 사람 모두가 공작과 공작부인을 외치며 목청을 높였다.
베드포드 성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음식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왔고 리아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