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만찬(1)
“마님? 마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으. 응?”
“저녁 만찬 준비를 하셔야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
리아가 벽시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벌써 해가 지고 있는 걸요.”
정말 창밖에는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 저녁은 공작과 그의 기사단장들이 함께 모여 베드포드 성에서의 첫날을 기념하는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서 옷을 갈아입으시고 머리도 정리하셔야 해요.”
메리가 시간이 없다며 수선을 떨었다.
“옷?”
지금 입은 옷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더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마님 놀라지 마세요. 실은 제가 재봉에 좀 취미가 있어서요.”
메리가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재봉?”
리아의 물음에 메리가 옷장에서 처음 본 드레스 한 벌을 조심스럽게 꺼내왔다.
“짜잔……!”
“어머, 웬 드레스야?”
“지난번 다락에서 찾아낸 거예요. 제가 밑단과 소매 부분을 조금 손봤어요.”
메리가 내민 드레스는 아주 우아했다. 톤 다운된 와인컬러가 고급스러웠으며 소매와 허리선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빨간 머리에 붉은 드레스라니? 저 드레스가 내 볼품없는 몸에 어울릴까? 리아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색이 너무 과하지 않을까? 내 머리카락 색을 좀 봐.”
리아가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입어 보시면 아마도 깜짝 놀라실 거예요. 마님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더 돋보이게 해 줄 거라고 제가 장담해요.”
확신에 찬 말투였다. 리아는 메리를 믿기로 했다.
“우선 머리를 만져드리고 화장을 해 드릴게요. 드레스는 구겨질지도 모르니 맨 마지막에 입는 것이 좋겠어요.”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메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걸어나갔다. 누가 올 사람이 없는데. 벌써 공작님께서 오신 것은 아닐 것이니. 마님의 방은 메리 자신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도 하인들의 기억 속에 마님은 음침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많이 달라지셨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지만 쉽게 접근을 하지는 못했다.
“마님. 넬슨입니다.”
메리가 넬슨이라는 말에 방문을 활짝 열었다. 넬슨은 메리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넬슨! 마침 잘 왔어.”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반말로 넬슨을 맞이한 리아가 신이 나서 말했다. 드디어 돈을 갚고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니. 그동안 넬슨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매우 많이 불편했었다.
“곧 넬슨의 돈의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미 받았습니다.”
“벌써?”
그 이야기를 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돈을 갚았단 말이야? 행동이 아주 빠른 남자였다. 그것은 참 마음에 드는 구석이었다.
“공작님께서 이자까지 더해서 주셨습니다.”
거기다가 후하기까지 하다니.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넬슨 덕분에 오늘 초라하지 않게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었어.”
“마님께서는 어떤 옷을 입으셔도 기품이 있으십니다.”
역시나 숙련된 집사답게 말이 청산유수였다. 여자의 기분을 헤아릴 줄 알았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청산유수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 당연하니.
“그래도 고마웠어. 무슨 일이야?”
“공작님께서 7시에 마님을 모시러 오실 예정이라는 것을 말씀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날?”
“네. 그렇습니다.”
레오니는 귀족의 예법을 잘 알지 못했다. 만찬이나 파티에 참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줄 사람도 없었다.
“결혼한 여자는 꼭 남편의 에스코트를 받아야 하잖아요.”
그때 메리가 당연하다는 듯 넬슨의 말을 거들었다.
“아 맞아. 그렇지. 워낙 오랜만에 남편을 만난 거라 잊고 있었네.”
그런 망할 풍습이 있단 말이야?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을 전한 넬슨이 방을 나가자 메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내 정신을 좀 봐. 마님 어서 앉으세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네.”
메리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리가 솜씨를 부린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리아는 자신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이게 나야?”
거울 속에는 아주 낯선 여자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 햅번이나, 비비안리? 아니면 올리비아 핫세일까? 어떤 누구를 가져다 댄다 해도 거울 속에 여자보다는 아름답지 않을 것 같았다.
“마님의 피부가 워낙 고우셔서 그래요. 어쩜 이렇게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할 수 있을까요?”
글쎄, 그것은 타고 난 것일까? 나이 탓일까?
레오니. 그녀의 나이 이제 스물이라고 했다. 참 맘에 드는 나이었다. 어려진다는 것은 말이다. 여자는 언제나 소녀이길 원하니까.
전생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아직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리아는 그 청춘을 제대로 누려보질 못했다. 남들은 연예인 생활이 화려하다며 부러워했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었다.
평범한 스무 살은 어떤 느낌일까? 리아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레오니의 스무 살도 나 못지않게 복잡하지.
스무 살에 벌써 유부녀 3년 차라니. 기도 안 차 정말. 넌 더 심했구나.
아직은 빈약한 몸을 교묘하게 가려 주는 메리의 드레스는 정말 탁월했다. 빨간 머리에 와인컬러가 어울릴까 했지만,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고, 황금빛 눈동자를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목이 좀 허전하네요.”
메리가 아쉬움에 탄식했다. 목걸이를 걸면 딱 좋을 텐데 있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된 옷도 한 벌 없는데 보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너무 예뻐. 고마워 메리.”
리아의 칭찬에 메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이게 제 일인 걸요.”
그때 시계가 7시를 알리며 종을 울렸다. 메리와 리아의 시선이 동시에 시계를 향했다.
“이제 나가 봐야 할까?”
“아니에요. 공작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거예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그런데 마님. 저….”
“응?”
“뭐 하나 여쭤보아도 될까요?”
“응, 맘껏 물어봐”
“저… 공작님 흉터 말이에요.”
“흉터?”
흉터라니 무슨 소리지? 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이마에 흉터 말이에요.”
“이마에?”
아 맞다. 흉터! 레오니의 기억 속에 공작은 흉측한 흉터를 가진 두려운 남자였지. 어라, 근데 왜 그 흉터를 보지 못한 거지?
“아, 그거? 응 그래 그 흉터 나도 알지.”
리아가 아는 척 메리의 말에 호응했다.
“저… 어쩌다 다치신 건지 궁금해서요.”
그러게 어쩌다 다쳤을까?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그건 없었다. 그렇다면 레오니도 모른다는 것인데. 그 흉터가 어떤 모양인지 생각이 나야 말이라도 해주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알게 되면 메리에게도 알려 줄게.”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라이언의 시종 존이었다.
“마님, 그만 일어나세요. 벌써 오셨나 봐요.”
공작이 문 앞에 도착했다는 말에 메리가 마지막으로 리아의 모습을 점검하듯 살폈다.
리아는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알 수 없는 낯선 기운이 심장 근처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남편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드레스가 너무 꽉 끼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분명한 것은 드레스는 멀쩡했다. 리아의 몸에 딱 맞는 것이지 꽉 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메리는 공작님을 기다리시게 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 없다며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메리의 재빠른 행동에 활짝 열린 문밖으로 공작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방 앞에 뒤돌아 서 있었다.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설렜다. 뭐? 설레어? 그건 아니야. 리아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해!
저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한 그의 뒷모습은 그 무엇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리아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녀의 느린 동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아는 그의 뒤에 가만히 섰다.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 초조한 것은 존과 메리뿐이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서 있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지쳤는지 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셨어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몸을 돌렸다.
라이언의 검고 또 검고 아주 사정없이 검은 눈동자와 리아의 매혹적인 황금빛 눈동자가 또다시 허공에서 눈 맞춤을 했다.
라이언의 시선이 리아의 눈을 벗어나 잘록한 허리와 한 손에 잡힐 듯 적당히 부푼 가슴을 매끄럽게 감싸고 있는 와인 빛 드레스에 멈춰섰다. 그녀는 아까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미처 틀어 올리지 못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라이언의 집요한 시선에 긴장한 리아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에 목이 탔다.
라이언은 그녀의 얼굴로 움직이는 손을 애써 말아 쥐며 이마를 사정없이 구겼다.
그때 리아의 시아에 라이언의 흉터가 들어왔다.
‘정말이었잖아! 흉터가 있었어!’
못 보고 지나친 것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고 큰 흉터였다.
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남편과의 첫 만남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의 흉터도 보지 못할 만큼 그녀는 긴장했던 것이다.
라이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디서 다쳤어요?”
어색함을 떨쳐내려는 듯 리아가 물었다. 작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을 보던 라이언이 리아의 말에 찡그렸던 이마를 바로 했다.
“무슨 소리지?”
“흉터, 이 흉터 말이에요.”
리아가 대답하며 라이언의 흉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순간 그녀의 손과 마주 닿은 흉터 위로 퍼지는 따스한 기운에 라이언이 크게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