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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19화 (19/116)

19화. 노력이 필요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둘 사이를 감싸고도는 갑작스러운 적막을 깨고 라이언이 물었다. 망설이던 리아가 마음을 결정했는지 라이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제 몸만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마음까지 원하시나요?”

앞으로의 삶에서 남편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도 그녀의 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내 대답이 중요한가?”

“후계자를 낳고 싶으신 거죠? 그렇다면 당신의 대답이 물론 중요하죠.”

“내가 둘 다 원한다고 하면?”

라이언의 말에 리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실 거예요.”

“노력?”

“네. 물을 주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않아요.”

라이언이 점점 더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우선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죠.”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그 간단한 것을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옷 어때요?”

리아가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툭툭 털며 말했다.

“옷?”

“이게 어디서 난 것 같으세요?”

“샀나?”

“물론 샀죠. 돈을 주고.”

점점 대화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돈을 주고 옷을 산 것이 무슨 상관이라는 것인지 라이언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한테 돈을 준 적이 있으신가요?”

라이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회전했다. 돈을 준 적이 있었나? 아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공작님. 지금 제 수중에는 땡전 한 푼이 없답니다.”

리아가 불쌍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자린고비 구두쇠 놈아!’ 물론 뒤는 마음속으로 한 말이었다.

“그럼 그 옷은 어떻게 샀지?”

“그러니까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자는 거예요.”

라이언은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빚 좀 갚아 주세요.”

“빚?”

“이 옷 당신 때문에 산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갚아 주세요. 당장.”

“나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는데 거지꼴로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당신 체면도 있는데.”

“내 체면?”

라이언이 황당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빚 같은 건 오래 두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공주였다. 그리고 공작부인이었다. 그런데 돈이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나가던 개도 웃을만한.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말 자신은 그녀에게 조금의 돈도 준 적이 없었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체면 때문에 그 옷을 사려고 빚을 졌단 말인가?”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한 말이 그거잖아요. 갚아 줄 거예요?”

“하.”

“그리고 또 하나. 갚아 주는 김에 돈도 좀 주세요. 아주 많이.”

라이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렇지만 리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돈을 갚아 주리라는 것을.

“이 정도면 아주 간단한 시작이죠?”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하는 말마다 그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

“부르셨습니까.”

집사 넬슨이 라이언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류를 살피던 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내 아내는?”

“마님께서는 지금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래?”

넬슨은 공작의 표정만 보아서는 그의 기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주인의 기분 변화를 먼저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 집사의 의무였으나 도무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넬슨을 향해 라이언의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언제부터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넬슨이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그게 무슨….”

“내 아내가 달라진 것이 말일세.”

라이언은 지금 자신의 아내가 언제부터 저렇게 변했는지 묻고 있었다.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넬슨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이니. 넬슨에게 묻는 편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라이언의 질문에 넬슨이 생각에 잠겼다. 마님이 달라진 것이라면. 그날이었다. 처음으로 방을 벗어나고 요구라는 것을 하신 날.

“공작님의 전령이 다녀간 다음 날부터입니다. 분명 그날이 확실합니다.”

전령이 다녀간 날?

라이언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전령이 다녀간 날이라면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내가 달라졌단 말인가?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달라졌다니 이상했다. 그 전부터 조금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을까?

“그 이전에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지난 3년간 그러셨던 것처럼 늘 같은 모습이셨습니다.”

3년간 그랬던 것처럼 잘 먹지도, 씻지도 않고 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그날 전령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데 갑자기 변하였다?”

넬슨이 답할 틈을 주지 않고 라이언은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전령이 전한 소식은 간단했다. 그런데 그 서신을 받고서 변하였다니. 라이언의 고민을 말해주듯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몇 분이 흘렀을까. 라이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특이사항이라면?”

“요즘 아내에 대해서 말이네.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나?”

“아, 마님께서는 아직 몸이 많이 약하십니다. 오랜 기간을 잘 드시지 않고 방 안에만 계셨기 때문에 체력이 좋지 못하십니다.”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비하면 굉장한 발전이지만 아직도 보통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막 살이 오르기 시작했을 뿐이다.

보기 좋게 살집이 오르려면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한 듯 보였다. 예전의 그녀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찾자면 그것은 오직 아내의 눈빛이었다.

“성격도 많이 달라진 것 같더군.”

“저도 마님과 이토록 오래 이야기를 나눠 본 것이 처음이라.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넬슨뿐만 아니라 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3년 만에 만난 사이가 아니던가.

“그래. 우선 알겠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지금 렌포드에서 이곳으로 의사가 오는 중이네. 자네가 성안에 가장 좋은 집을 골라 내어주게. 그리고 즉시 르셀로 사람을 보내어 쥬넬 버켄을 불러오도록.”

“쥬. 쥬넬 버켄 말입니까?”

쥬넬 버켄이라면 이곳 엘리시아 왕국에서 제일가는 디자이너였다. 그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옷들은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실력도 그를 따를 자가 없지만, 실력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는 아무에게나 옷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왕비도 그 앞에서는 줄을 서야 했다. 그런데 이곳 데본셔, 그것도 베드포드 성으로 쥬넬 버켄을 불러오라고? 넬슨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보내서 왔다고 전하게. 공작부인의 옷을 만들 것이라고 하면 당장 따라올 것이니.”

넬슨은 그 도도하고 콧대 높은 쥬넬 버켄이 고작 공작부인의 옷을 만들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올 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들었지만, 공작의 말에 더 토를 달수는 없었다.

공작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집사의 임무는 주인의 말에 따라 수도 르셀로 사람을 보내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넬슨이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자 라이언이 다시 입을 열어 넬슨을 잡았다.

“넬슨.”

“네. 공작님.”

“얼마인가?”

“네?”

자신의 말을 넬슨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라이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내 아내에게 빌려준 돈 말일세.”

“아, 그것 말씀이시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건 그냥 제가….”

“그런 말은 말게. 내 아내가 자네에게 돈을 빌리고 그간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자네는 아직 모르는군. 내 오늘 그 돈을 꼭 갚아야지만 아내를 다시 만나볼 수가 있네.”

“그것이, 얼마 되지 않는 돈인데.”

“적건 많건 간에 빌린 돈은 갚아야 하지 않겠나. 빚 같은 건 오래 두는 게 아니라고 하더군.”

그건 아내가 한 말이었다. 당당하게 빚을 갚아달라던 그의 아내가.

“송구합니다.”

“내 비서 매튜에게 말해 놓았으니 바로 처리해 줄 것이네.”

“감사합니다.”

넬슨이 다시금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 참.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네. 그러니 너무 오해하거나 그러지는 말게.”

“아닙니다. 절대 오해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앞으로는 아내에게 아주 넉넉한 용돈을 줄 것이라네. 그럼 이런 일은 다시 발생하지 않을 테지.”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넬슨이 다시 허리를 숙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라이언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일정한 속도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3년 전과는 완벽하게 달라진 아내. 그녀의 변화 원인이 서신 때문이란 말인가?

라이언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리고 걱정도 함께.

그는 아이가 필요했고 변한 아내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제 몸만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마음까지 원하시나요?’

‘물을 주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않아요.’

후계자를 낳고 싶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력? 여자를 얻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항상 자신을 가져달라는 여자들이 차고 넘쳤으니. 그저 골라잡으면 그만이었다.

“아내는 다르다는 말인가?”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라이언은 잘 알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마주치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난리였다.

“난감하군.”

매우 난감했다. 그는 급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아내는 느긋해 보였다. 그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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