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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18화 (18/116)

18화. 후계자가 필요해

“마님, 어디 불편하세요?”

집 안으로 들어서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물었다.

“으응?”

“얼굴이 너무….”

‘머리카락 색과 얼굴색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붉어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메리가 말끝을 얼버무렸다.

“얼굴?”

메리의 말에 리아는 손을 들어 올려 볼을 감싸 쥐었다. 뜨거웠다. 매우 뜨거웠다. 뜨거워진 만큼 분명 붉어졌으리라.

“아… 아니,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애써 괜찮다고 말하며 빠르게 자신을 지나쳐 홀 안으로 들어가는 리아를 보며 메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러시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

리아는 메리가 중얼대는 소리를 들으며 더 걸음을 빨리했다.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다. 손부채 질을 연신 해댔지만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흉포한 짐승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레오니의 기억은 어찌 된 영문인지 어느 하나 믿을만한 것이 없었다.

무섭고 흉측하다고 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레오니는 그를 그런 식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리아는 남편이라는 남자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 밑에서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주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적어도 리아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는 한 마리의 짐승 같았지만 흉포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탐나는 짐승이었다.

메리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곧장 응접실로 들어간 리아는 소파 가장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제 곧 남편이 그녀의 곁으로 올 것이었다.

리아는 남편을 다시 만나는 것이 기대되면서도 두려웠다. 그렇지만 그것은 레오니가 느꼈던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었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 내 남편. 당신은 어떤 사람이지?”

물론 그녀의 혼잣말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곳은 그대로군.”

라이언은 마치 감상이라도 하듯 응접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이내 리아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왔다.

리아는 애써 식힌 뺨이 다시 붉어지지 않기를 빌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역시, 흉포하진 않아. 레오니! 넌 대체 그에 어디가 무서웠던 거야?’

리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의 눈빛을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발바닥이 간질거리고 아랫배에 바람이 들었다.

‘망할. 이 기분은 도대체 뭐야?’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진정해야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저 건장하고 잘생긴 외국인 남성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동요한 것뿐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리아는 최면에 가까운 주문을 외우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라이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피곤하실 텐데 앉으세요.”

떨리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리아의 입 밖으로 쏟아졌다. 라이언은 그런 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리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리아의 얼굴에 멈춰 있었다. 리아는 혹시나 아직도 볼이 붉은 건 아닌지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부담스럽게 왜 저러는 거야?’

리아가 먼저 라이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호출 벨을 눌렀다.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하녀 한 명이 득달같이 달려 들어왔다. 금발 머리에 오만한 하녀 데이지였다.

호출을 한 사람은 리아였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지는 라이언의 앞에 섰다. 부자연스러운 데이지의 행동에 리아는 금방 그녀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베베 꼬이는 몸,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과하게 붉은 입술, 데이지는 아예 대놓고 유혹이란 걸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공작의 눈에 들 수 있을까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데이지의 화려한 등장은 라이언에게 조금의 관심도 끌어내지 못한 것 같았다. 라이언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리아를 향해 있었다.

“공작님과 함께 오신 단원들은 어디에 있지?”

라이언의 옆에 서 있는 데이지를 향해 리아가 물었다. 물론 그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데이지?”

리아가 다시 데이지를 부르자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모두 숙소를 살피러 갔습니다. 공작님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다 듣고 있었다. 다 듣고도 모른 척했단 말이야? 거기에 간드러진 목소리로 ‘공작님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라니. 데이지의 깜찍한 행동에 리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레오니가 하인들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며 살아왔는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레오니에게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겠지만 리아는 아니었다. 특히나 저렇게 대놓고 얕은수를 부릴 때는 더더욱.

“차는 필요 없어. 그만 나가 봐.”

성격 같아서는 바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싶었지만, 라이언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에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는 하녀의 물음에 조금의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야. 그녀를 훈계하는 것보다 급한 쪽은 남편이었다. 남편부터 해결해야 했다.

나가라는 리아의 말에도 데이지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두 눈을 깜빡이며 라이언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데이지, 그만 나가.”

리아의 차가운 음성이 다시 한번 데이지의 귓가를 두드렸다. 데이지는 어쩔 수 없이 반항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그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끌어보려고 온갖 추파를 던졌던 하녀가 금방 다녀갔다는 것을 모르는지 라이언이 리아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야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다 설명하기엔 벅찬. 물론 설명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공작님께서는 그동안 매우 바쁘셨나 봐요?”

묘한 리아의 표정에 라이언의 입꼬리가 유쾌한 듯 살짝 올라갔다.

“나야 늘 바쁘지. 그러는 당신은?”

“저는 너-무 한가했어요. 3년 내내 오늘을 기다렸는걸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라이언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생각보다 더 재미있군.”

웃는 라이언을 보며 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재미있다고? 더 재미있는 게 뭔지 보여줘? 이상하게 자꾸만 저 남자를 자극하고 싶었다.

“재미만 있을까요?”

리아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뭐 다른 것도 더 있으면 좋고.”

라이언의 말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탐색하는 듯 오가는 눈빛이 묘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라이언이었다.

“무엇 때문에 달라진 거지?”

그녀가 달라진 이유가 정말 궁금한 모양이었다. 분명 응접실에 들어서면서부터 가장 먼저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변하죠. 그렇지 않나요?”

라이언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자신의 아내가 궁금했다. 지금껏 자신 앞에서 이토록 당당한 여자는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예전에 보았던 두려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호기심만이 가득 할 뿐이었다.

별다른 대답이 없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엔 얼마나 머무르실 예정이죠?”

리아는 라이언이 오래 머무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레오니의 짧은 지식과 메리를 통해 주워들은 지식을 종합했을 때 그는 한곳에서 오래 머무르는 성격은 아니었다.

“될 수 있으면 오래.”

“그 오래가 얼마만큼이죠?”

“글쎄,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을 것 같은데?”

‘나에게 달려 있다고?’

웃기는 남자였다. 부인을 3년이나 내팽개쳤으면 사과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시 이곳의 사고방식은 남편이 아내를 모른 척하는 것쯤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애인은 있나요?”

당돌한 질문이었다.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라이언에게서 답변이 없자 리아가 다시 물었다.

“보통 귀족들은 애인 한둘쯤은 있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하하하하.”

라이언에게서 대답 대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죠? 너무 정곡을 찔렀나요?”

“그럼 왕족은 애인이 수십 명은 있겠군.”

왕족? 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왕족이라면 날 말하는 거지? 저놈이 진짜.’

“뭐 때문에 오신 거죠? 우리 그동안 잘 지내 왔잖아요.”

“알고 있지 않나? 서신을 읽은 줄 알았는데.”

물론 읽었다. 그래서 레오니가 죽었으니까. 기억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 서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결혼의 신성한 의무?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그 의무가 뭐야? 여기서 같이 살겠다는 거야?

“읽었죠. 그래도 모르겠어요. 그 의미를.”

“당신과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하려고 왔지. 후계자가 필요하거든.”

“아아, 후계자.”

고개를 끄덕이는 리아를 보고 라이언이 씩 웃었다. 순간 리아는 후계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뒤늦게 깨닫고 소리쳤다.

“뭐요? 후계자요?”

후계자면 뭐야. 아기 말이야? 아기를 낳고 싶다는 말이야? 아기를 낳기 위해 응응도 하고 그러잔 말이야 지금?

“하, 참네.”

“왜 그러지?”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흉포한 짐승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생긴 것만 멀쩡하지 생각은 썩어있었다. 3년이나 버려두고 대뜸 찾아와서 ‘내 아를 나아도’라고?

“갑자기 그러시는 이유가 뭐죠?”

“내가 내 아내에게 후계자를 낳아 달라고 하는데도 이유가 필요한가? 당연한 의무인 줄 아는데.”

당연한 의무였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역시 남편의 의무를 다했어야만 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건?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이제 오롯이 리아의 몫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레오니가 다시 살아날 리 없다는 것도. 이제 그녀는 좋든 싫든 레오니에 몸에서 레오니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녀의 선택에 따라서 이제 레오니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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