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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17화 (17/116)

17화. 숨 막히는 만남

“마님?”

대답이 없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다시 마님이라고 부르며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응?”

“나가 보지 않으실 거예요? 지금쯤이면 공작님이 성문 안으로 들어오시고도 남으셨을 거예요.”

“나?”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며칠 내내 공작님이 오시기만 기다리셨잖아요.”

“내가? 에이 설마. 그런 적 없는데.”

메리는 갑자기 모른 척하는 마님이 이상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워서 저러시나 봐. 소녀 같으시다니까. 며칠 동안 매일같이 오늘은 며칠 남았느냐 확실히 오신다더냐 물으시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공작님의 귀환을 기다리셨으면서.’

아닌척해도 메리는 알고 있었다. 리아의 신경이 몽땅 밖에 도착하신 공작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그래도 나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거듭되는 메리의 권유에 리아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메리, 네 말이 맞아. 내가 나가 봐야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리아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남편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러 간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베드포드 성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달려도 외성을 지나 내성까지 가는데 십 분 이상이 소요되었다.

외성에는 공작가의 소작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공작가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고 내성에는 직계가족들과 하인들이 거주했다.

이번에 라이언을 따라 베드포드 성에 온 기사단원들에게는 외성에 있는 집이 한 채씩 주어졌다.

드디어 데본셔, 베드포드 성에 도착한 라이언과 검은 기사단은 수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외성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십수 년 만에 자신들을 지키고 보살펴 줄 주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영지민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모두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길가에 나와 자신들의 공작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공작과 기사단이 지나는 길마다 꽃가루와 폭죽을 터트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에 눈에는 공작을 향한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공작은 온 백성이 우러러보는 엘리시아의 영웅이었다. 그 위대한 영웅이 자신들의 영주라니. 주체 못 할 영광스러움에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라이언은 영지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내성으로 통하는 다리를 건너 성문 앞에 도착했다.

성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밑에 베드포드 성의 모든 하인이 공작과 기사단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자신의 주인인 공작을 처음 보는 자리였다. 그들 중 라이언을 직접 만나 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워낙 오래전에 성을 떠난 탓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라이언이 말에서 내려 하인들 앞에 서자 기사단 역시 말에서 내려왔다.

“위대하신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님을 뵈옵니다.”

집사 넬슨의 인사와 함께 모든 하인이 허리를 숙였다.

“그만 고개를 들게.”

형식적인 모든 것이 불편했던 라이언이 넬슨을 향해 말했다. 거추장스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베드포드 성 그 안으로.

그때였다. 라이언의 앞에 서 있던 하인들과 뒤편에 서 있던 단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한 것은.

“오랜만이네요.”

라이언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돌려졌다.

그것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 또렷하게 라이언의 귀를 파고들었다.

계단 맨 위. 당당하게 서 있는 여자는 분명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었다. 등 뒤로 늘어진 빨간 머리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오랜만이라니? 혹시…?’

눈으로 보고도 믿겨 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라이언은 계단 위 자신의 아내로 추정되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바로 앞에 서 있는 넬슨을 향해 물었다.

“저 여자가 내 아내인가?”

부인도 못 알아보는 남편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기 서 있는 여자는 그의 기억 속 아내의 모습과는 판이하였다.

“네 공작님. 저분이 바로 공작님의 아내이신 레오니 베드포드 공작부인이십니다.”

웃기는 질문에도 넬슨은 예의를 다해 답했다.

라이언은 넬슨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지난번 서신을 보냈을 때 전령이 가져온 소식으로는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최악의 상태라고 했단 말이다. 그런데 언제 저렇게 당당하고 말끔해진 것이지?

라이언은 자신과 같은 이유로 쉼 없이 웅성대는 기사단을 뒤로하고 아내라고 말하는 낯선 여자를 향해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확인해야 했다. 확인하기 전까지 믿을 수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라이언의 시선은 여전히 리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리아 역시 집요한 라이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묘한 마력이 둘 사이를 이어 주는 듯 서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시 보니 반갑네요. 공작님.”

가까이에서 라이언을 마주한 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묻는 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라이언은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의 아내가 확실하면서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대로였다.

그때 세찬 바람이 리아의 뒤편에서 불어왔다. 등 뒤로 길게 늘어트린 그녀의 붉은 머리가 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렸다.

그 순간, 라이언의 눈이 번뜩였다. 불보다 뜨거운 번개가 머리끝으로 파고들어 온몸을 전율케 하고 발끝까지 찌릿하게 관통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숨 막히는 열기에 뒷덜미가 서늘하고 손바닥에는 땀이 솟았다.

넋이 나간 듯 말이 없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이번에는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라이언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가슴 쪽으로 내민 하얗고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이 알던 그 날의 공주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이언이 다시 고개를 들어 리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분명 그녀는 자신의 아내가 맞으면서도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눈빛이었다.

황금빛 눈동자는 그대로였으나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은 변했다.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3년 전 보았던 것처럼 두려움이나 혐오감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많이 달라졌군.”

라이언이 그녀의 하얀 손을 무시하고 말했다. 리아가 멋쩍은지 거절당한 손을 거둬들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살짝 웃었다.

‘웃어?’

전 세계를 돌며 온갖 일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하는 라이언이지만 지금처럼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모든 것이 라이언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달라진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어오는 라이언을 향해 리아가 답했다.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라이언은 다시 아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쓰다듬듯 집요하고 끈적했다.

리아는 집요한 그의 시선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수치스럽거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 보셨나요?”

순간 라이언의 눈동자가 호기심과 유쾌함으로 진하게 물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성격도 아주 딴판이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심지어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도대체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아직, 좀 더 두고 봐야겠군.”

“뭐, 시간은 많으니까요. 우선 들어가죠. 보는 눈이 많네요.”

라이언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내 라이언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잊고 있었다. 달라진 아내를 보느라 이곳이 베드포드 성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떻게 그 사실을 잊을 수가 있었을까? 무려 15년 만의 귀환이었다.

라이언은 리아의 등 뒤로 여전히 웅장한 성을 바라보았다.

뒷문으로 도망쳤던 어린 라이언은 이제 없다. 그 어린아이는 두려울 것이 없는 어른이 되어 당당하게 정문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 베드포드 성 앞에 그는 다시 서 있었다.

라이언이 손짓을 하자 시종 존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네, 주인님.”

“마님께 인사를 드려라.”

라이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존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를 차렸다. 순간 검은 기사단의 모든 단원도 존과 같은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주인마님을 뵙습니다.”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여기저기서 정중한 인사가 터져 나왔다. 리아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전생의 연기 경험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모두 반가워요. 한 명씩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공작님께서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이곳 베드포드 성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술과 음식을 준비했으니 모두 편히 쉬도록 하세요.”

리아가 넬슨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넬슨이 하인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하인들이 흩어졌다.

“그럼 이제 들어가죠. 그만 쉬셔야죠.”

리아는 라이언의 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등을 돌려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등 뒤로 탐스러운 빨간 머리가 그를 유혹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아내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피곤한 남자가 되어 버린 라이언이 헛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이곳 생활이 매우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것은 물론이였다.

돌아오기로 했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이라고는 여전히 말 더듬는 미친 아내와 어쩔 수 없는 하룻밤 동침뿐이었다.

“재미있군.”

의미를 알 수 없는 쓴웃음을 남긴 라이언이 리아의 뒤를 따라 망설임 없이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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