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16화 (16/116)

16화. 남편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부… 부탁이요?”

메리가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알지?”

메리는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모시는 마님더러 ‘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하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좀 아팠어. 그래, 내가 좀 아파서 그랬어.”

머리를 굴려 봤지만, 아프다는 핑계보다 더 좋은 변명은 없었다. 미쳤다느니, 죽고 싶었다느니, 사실은 내가 레오니가 아니라느니 그런 말은 더 많은 혼란만 가져올 뿐이었다.

“곧 공작이 돌아온다고 들었어.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메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 성안은 온통 공작님의 귀환 소식으로 난리였다.

하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과 성을 다해 성 안팎을 쓸고 닦았다. 주방은 벌써 공작과 기사단을 위한 음식 준비에 들어갔다. 메리 역시 가슴이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내 남편을 제대로 맞이하고 싶어. 메리도 이해하지?”

남편. 지금 리아에게는 얼마 뒤면 돌아온다는 남편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난 생에서 리아는 연애 한 번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는 고아에 혼혈인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고, 연예인이 된 이후에는 누군가를 선뜻 믿기가 겁이 났다.

연예인이라는 화려한 직업상 수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리아는 잘 버텨냈다. 외모나 능력에 비해 늦게 뜬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레오니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남편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는 앞을 대비하기가 어려웠다. 이 불쌍하고도 미련한 레오니가 아는 것은 정말 너무 없었다.

남편에 대한 기억은 몇 가지밖에 없었는데 그조차도 얼마나 단순한 정보던지 그 수준이 길 가던 어린애도 알만한 정도였다. 그리고 궁금했다. 정말 내 남편이라는 사람이 흉측한 괴물인 걸까?

레오니의 기억 속 남편은 흉측한 괴물, 무서운 악마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서 더 흥미가 일었다.

리아의 부탁에 메리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메리에게 공작부인 레오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시게 된 귀족이었다. 귀족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다.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만큼 고귀하신 분. 더군다나 공주님이었다. 그런 분이 자신에게 도와 달라는 말을 하시다니. 명령을 내리신다 해도 무조건 들어드렸을 것이었다. 그런데 부탁이라니.

“메리? 도와줄 수 있니?”

대답이 없는 메리를 향해 리아가 다시 물었다. 순간 정신을 차린 메리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도와드릴게요. 당연히 제가 도와드려야죠. 부탁이라니요. 당치 않아요. 명령만 내려주세요.”

리아는 메리의 대답이 매우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메리가 내 전속 시녀가 되어 줘. 그래 줄 수 있지?”

리아의 말에 메리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당연히 할 수 있었다. 무조건 할 수 있었다. 가문의 영광이었다. 공주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다. 아프셨을 뿐. 그동안 모두가 오해하고 있었던 거다.

메리의 고개는 아까부터 위아래로 계속 움직이며 멈출 줄을 몰랐다.

“고마워 메리. 메리의 마음을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고개 흔드는 것은 좀 멈춰줘. 내가 다 어지럽네.”

“네? 네네.”

메리의 고개가 순식간에 딱 멈췄다. 리아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마음을 표시라도 하듯 단호한 동작이었다.

“우선 오늘은 푹 쉬고 싶어. 본격적인 도움은 내일부터 필요할 거야. 메리만 믿고 있을게.”

“네 마님. 알겠습니다.”

“아 참. 내 남편…….”

“네?”

“공작님께서는 언제 도착하실까?”

남편이 온다는 것 외에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남편이라는 그 공작은 언제 온다는 것일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기에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레오니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을까?

물론 레오니의 죽음이 그 남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편이잖아? 보듬어 줄 수는 없었을까? 단 한 명이라도 레오니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가 그런 선택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공작님께서는 이달 말에 도착 예정이세요.”

“이번 달 말?”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는데 이달 말이라니. 전혀 감도 오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 리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메리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3주 정도 남았어요. 이달 말까지. 제가 달력을 가져다드릴게요.”

불과 3주. 리아가 흉포한 남편을 맞이하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

리아가 레오니의 몸으로 깨어 난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2주일이 남은 시점이기도 했다.

리아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아니 초조한 것인지 두근거리는 것인지 확실히 판단이 어려웠다.

이토록 불쌍한 레오니를 홀랑 결혼식만 올리고 버려둔 나쁜 놈을 빨리 확인하고 싶다가도 그가 보낸 서신이 마음에 걸렸다.

결혼의 신성한 의무라는 문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 신성한 의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마님, 산책하러 나가실 시간이에요.”

메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주일 동안 메리와는 많이 가까워졌다. 메리는 베드포드 성에서 리아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상하게 메리에게는 마음이 갔다. 아무래도 푸들을 닮은 외모 탓이 큰 것 같지만.

그동안 워낙 잘 먹은 탓인지 아직 한참 멀긴 했지만 그래도 몸에 조금이나마 살이 붙었다. 빼기는 어렵지만 찌기는 쉽다고 했던가?

리아는 과거에 매일같이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면서 피눈물을 흘렸던 때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산책은 취소야.”

리아의 말에 메리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집사를 만나러 갈 거야.”

“방으로 부르시지 않고요? 제가 내려가서 넬슨 씨를 불러올까요?”

“아니야. 운동도 할 겸 내가 직접 갈 거야. 슬슬 집안도 둘러봐야 하고.”

그동안은 체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기에 잘 먹고 잘 쉬고, 좋은 공기를 맡으며 산책을 했다.

이제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체력은 생긴 것 같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당장 얼마 뒤면 남편이 돌아올 것이니 이제 집안파악에 힘써야 할 때였다.

메리는 어쩔 수 없이 집사를 찾아 앞장을 섰다. 마님이 고집을 부릴 때면 자신은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벌써 여러 번 겪었다. 이럴 때는 원하시는 대로 하게 해 드리는 것이 서로에게 좋았다.

메리는 넓고 화려한 응접실에 리아를 앉혀두고는 집사 넬슨을 데려오겠다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 문이 열렸다.

“마님, 절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앉으세요.”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마님 말씀을 편하게 해 주세요.”

반말하라는 말이야? 당연히 아랫사람이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불편했다. 넬슨은 아버지뻘이었다.

연기다. 이것도 모두 연기일 뿐이다. 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불편해서. 그냥 앉아줘.”

이제 서야 마음이 편해진 넬슨이 의자에 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지난 일주일간 공작부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음식을 먹었으며, 목욕을 했다. 이제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자주 씻어서 문제였다.

넬슨에게는 공작부인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큰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그것도 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정중한 물음이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있을까?”

“네?”

“돈 말이야. 필요한 것이 있어서.”

넬슨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설마 할 말이라는 것이 돈 이야기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 필요하신 것이?”

“개인적인 물건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었다. 몇 벌의 드레스와 속옷, 화장품 등 여러 가지 물건이 필요했다.

레오니의 물건은 애초에 아예 없었고 메리가 다락을 뒤져 꺼내 온 예전 공작부인이 입었다는 옷들을 수선해 입고 있으나 영 불편했다. 먼지 구덩이에서 워낙에 오래 방치된 옷이어서 여러 번 세탁을 해도 쾌쾌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더 불편한 것은 속옷이었다. 메리의 것을 빌려 입었으나 천이 거칠고 두꺼웠으며 마른 몸에 걸치니 줄줄 흘러내렸다.

레오니 요것은 공주씩이나 돼서 재산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해 봐도 돈에 대한 것은 전혀 없었다. 소유라는 개념이 레오니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제 방법은 넬슨밖에 없었다. 집사라고 하니 해결책이 있을 것이었다.

“저… 마님.”

“말하도록 해.”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집안 살림에 관련된 사항에만 예산을 집행할 수 있습니다. 송구스럽지만 마님의 용돈은 공작님께서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용돈? 허락? 나라에서 제일 부자라면서 이것도 안 된단 말이야? 망할. 그 공작이 오기 전에 잘 차려입으려고 필요한 거라고! 결혼만 딸랑 해 놓고 돈도 주지 않다니. 무심함이 하늘을 찔렀다.

“내 옷을 사려고 하는데 그것도 허락이 필요한 거야?”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집사이지 마님의 재정 관리인이 아닙니다. 공작님께 서신을 보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공작한테 서신을 보낸다고? 이메일도 문자도 아닌 서신이라면 돈 좀 달라는 내 편지를 들고 말을 타고 간다는 거 아니야?

“난 당장 필요해. 서신이 오고 가길 기다릴 시간이 없어.”

“저… 마님. 정 그러시다면…….”

넬슨이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리아가 그런 넬슨을 향해 계속 말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마님께 급한 대로 제 돈을 좀 드릴 수 있습니다.”

넬슨의 돈? 그럼 좀 받아 써? 아니지, 아니야. 그건 안 될 말이지. 세상엔 공짜가 없단 말이야. 그때 리아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돈을 그냥 받을 수는 없어. 그럼 넬슨 이건 어때?”

“네?”

“내가 넬슨의 돈을 그냥 받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거야.”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빌리겠다고.”

리아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넬슨은 당황함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럼 넬슨. 나 돈 좀 빌려줘. 꼭 갚을게.”

이 세상에 떨어진 지 일주일 만에 리아에게 빚이 생겼다. 라이언이 돌아오기 2주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

벌써 성 밖이 소란스러웠다. 곧 공작과 기사단이 도착한다는 전령이 먼저 베드포드 성에 당도했다.

리아는 의미도 없이 몇 번이나 치맛자락을 쓸어내렸다.

집사의 급여가 다 그렇듯이 넬슨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공작부인이 입을만한 드레스는 넬슨의 반년 치 급여를 다 합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평범한 드레스 한 벌만이 리아의 수중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짙은 에메랄드색으로 단순하지만, 품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편이라는 남자를 만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어떤 사람일까?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 와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하겠다는 이유는 또 뭘까?

모든 생각은 의문부호로 끝이 났다.

레오니의 기억 속 공작은 무섭고 흉포한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겪어 온 바로는 레오니의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모두들 공작에 대해 칭찬 일색이었으므로 리아의 궁금증은 날로 커져만 갔다.

리아는 다시 한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이라도 하듯 천천히 살펴보았다. 사실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처음 보았던 모습에 비교하면 놀랄만한 변화였다.

때를 벗겨낸 피부는 햇볕을 전혀 쬐지 않은 것을 티 내기라도 하듯이 창백할 정도로 희었다. 거친 피부 결도 그간의 고열량 음식섭취와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해온 피부 관리 덕에 매우 보드라워졌다.

등 부근에서 찰랑대는 붉은 머리는 메리가 얼마나 자주 빗겨 주었는지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

본판이 못난 여자는 아니었다. 아니 되려 예쁜 편에 속했다. 여자는 피부만 고와도 반은 간다는데, 평생을 집안에서만 생활한 레오니의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것 하나는 맘에 들었다.

“몸매가 좀 아쉽단 말이야.”

거울에 비친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리아가 말했다. 워낙에 어릴 적부터 못 먹고 자란 탓 인지 작은 키와 마른 몸이 영 못마땅했다. 이제 와 키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볼륨감이 아직 많이 부족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님, 마님! 지금 성 밖에 공작님이 도착하셨어요!”

공작의 도착에 흥분한 메리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호들갑스럽게 등장한 메리 덕에 덩달아 리아의 긴장감도 증폭되었다.

드디어 내 남편이란 작자가 왔단 말이지? 남편을 떠올리는 순간 리아의 심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결혼의 신성한 의무를 행하시러 결국 왔단 말이지? 그래 좋았어. 원하는 대로 내가 아내 노릇 한번 제대로 해 줄 테니 두고 보라고.

리아는 마음속으로 또 한 번의 결심을 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