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공작이 돌아오는 이유
- 렌포드
라이언은 비서 매튜가 가져온 서류를 천천히 읽어보고 있었다.
레오니 엘리시아. 그녀의 짧은 일생이 담긴 단 한 장의 서류였다.
3년 전 의미 없는 결혼식 이후 베드포드 성에 내버려 뒀던 아내였다. 모엘르 검을 얻기 위해 했던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다.
방치일까? 누구보다 방치를 원한 것은 그녀였다.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희열이 아직도 또렷했다.
3년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결혼 3년 후 그에게 주어지기로 약속되었던 모엘르 검.
라이언은 3년만 버텨내면 자신의 손에 모엘르 검이 들어올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검의 행방을 알면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기다리면 자신의 것이 될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정확히 3년째 되는 날. 라이언은 왕을 찾아갔고 그 믿음은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모엘르 검을 떠올리자 어김없이 이마의 흉터가 통증을 일으켰다. 라이언은 손을 들어 올려 오래된 흉터를 누르며 며칠 전 만났던 젊은 왕 던컨과의 별로 유쾌하지 못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 르셀. 샤르트 궁전. 왕의 처소
“어서 오게. 공작.”
3년 만에 만난 왕은 여전히 그때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들어 조금 거칠어진 얼굴뿐.
“3년만입니다. 전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벌써 3년이나 지났는가? 시간이 참 빠르군. 그나저나 바쁜 자네가 여기까지 어인 행차인가?”
분명 다 알면서 묻는 말이었다. 라이언이 왜 찾아왔는지 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전하와 3년 전에 약속한 물건을 받으러 왔습니다.”
라이언이 답했다. 돌려 말할 필요 따윈 없었다.
“약속한 물건? 아, 그 검 말인가?”
“네. 전하.”
왕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최근에 기르기 시작했는지 아직 짧은 턱수염이 왕의 손바닥 밑에서 까끌댔다.
“그 아이는 잘 지내는가?”
“네?”
“자네 아내 말일세.”
관심 따윈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레오니의 안부를 묻는 왕의 저의가 궁금했다. 라이언이 왕의 말에 답했다.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가?”
무슨 뜻이지? 뭘 원하는 것이지? 왕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라이언의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하면 신부를 버렸다지? 결혼과 동시에 찾지 않는 성에 버려두고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엘리시아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베드포드 공작과 공작부인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일이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것만으로도 소문의 증거는 충분했다.
“그게 전하께 중요한 일입니까?”
왕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라이언이 물었다.
“중요하다마다. 명색이 이 나라의 공주인데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그러고도 나에게 그 물건을 내놓으라는 말이 나오는가?”
던컨이 노기가 섞인 음성으로 라이언을 다그쳤다.
성난 왕의 물음에 라이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도대체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왕에게도 자신에게도 그저 형식적인 결혼이었다. 분명 3년 전 왕은 공주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서둘러 결혼을 시켜 치워 버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했었다.
지금에 와서 공주니 뭐니 하면서 그녀를 챙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공주와 자네 두 사람 말일세. 아직 첫날밤도 치르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
“그것이….”
“쯧쯧. 모두 사실이었군. 첫날밤도 치르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결혼이 무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왕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하시게.”
라이언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왕을 마주 봤다.
“첫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자네가 찾아오지 않아도 내가 직접 검을 자네에게 보내겠네.”
“전하!”
“내 할 말은 끝났으니 그만 가 보게. 아, 그리고 늘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젊은 왕 던컨은 라이언을 쫓아내다시피 내보냈다. 더 따질 수도, 따질 명분도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결혼생활을 성실히 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공주와의 첫날밤. 그리고 아기.
라이언은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공주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 공주와 아기를 가지라고?
“각하. 공작 각하?”
매튜의 부름에 라이언이 복잡한 상념에서 깨어났다.
“휴…. 그래 이게 다인가?”
공주에 대한 평생의 기록은 짧았다. 고작 작은 종이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였다.
“네 각하. 그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에리스의 딸이라.”
왜 왕이 자신과 레오니를 결혼시켰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보다 더 큰 견제가 어디 있으랴.
악녀 에리스의 딸이라니. 에리스가 실제 존재했던 사람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그녀의 딸이 레오니라니.
“거의 평생을 아델 궁에서 갇혀 지내셨다고 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종 비명을 지르시는 일이 있으셨는데 그것 외에는 아주 조용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스의 딸이라는 것은 모두 쉬쉬하는 일이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백성들에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은 물론이요, 존재 차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막대한 사건이기도 하니까요.”
자신에게 그 짐을 떠넘기려 하셨다? 아니 떠넘기셨지. 역시 왕 다운 발상이었다. 데리고 있자니 찝찝하고, 그렇다고 죽여 버릴 수도 없고.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리라.
모든 사실을 알고 보니 레오니의 삐쩍 마른 모습이 이해가 갔다.
“그래 서신은 보냈고?”
“네 각하. 마님께서 직접 확인하셨다 합니다.”
“그나저나 그 호칭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라이언이 테이블 위로 종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각하? 어떤 호칭 말씀이십니까?”
다 알면서 되묻는 꼴이 얄미웠다. 유독 매튜는 라이언을 극존칭으로 높여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매사에 정확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되었네. 말해 무얼 하나.”
“그럼 각하. 이제 아주 데본셔로 거처를 옮기시는 겁니까?”
데본셔는 베드포드 성이 있는 지역 이름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멀리한 라이언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럴 생각이네. 단원들에게는 모두 전했겠지?”
왕과의 만남 이후 라이언은 렌포드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아직도 겁이 났지만, 이제는 해야 할 때였다. 이렇게 평생을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네. 모두 각하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아직 미혼인 단원들이 대부분이라 문제없이 이동 가능합니다. 가정이 있는 단원들에게는 각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라이언은 자신을 따라 베드포드 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단원들에게 집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그를 따른다면 떠돌이로 지냈던 단원들도 이제 평생을 머물 고향이 생길 것이다.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 그리고 오롯이 자신의 것인 집.
그걸 마다할 단원들은 없었다. 물론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라이언을 따를 것이 분명하지만.
“곧 출발할 수 있겠군.”
“네. 예정대로 3주 뒤에 기사단 전체와 함께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두근거림, 두려움, 설렘. 딱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열다섯. 라이언은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곳을 떠나오면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다짐은 무너졌다.
이제 그가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3년 전 그날 자신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던 아내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혼자 떠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들뜨던 모습도.
가끔 베드포드 성에서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3년 전과 별다른 바 없는 모습이라 했다.
제대로 된 결혼생활.
과연 가능한 일인 것인가. 그런 엉망인 여자와.
모엘르 검을 얻기 위해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지 않던 그곳에 아내가 있었다.
이제는 이름뿐인 아내가 아닌 진정한 아내가 될 여인이.
“마님, 우선은 전대 마님이 입으셨던 옷 중 가장 깨끗한 것으로 꺼내왔어요.”
길고 긴 목욕을 마치고 일어서는 리아를 향해 메리가 말했다.
전대 마님의 옷? 리아는 순간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맞아. 레오니는 변변한 옷 한 벌이 제대로 없었다. 입고 있던 그 고약한 누더기가 전부였지.
“고마워.”
리아가 싱긋 웃으며 답하자 순간 메리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확실히 메리는 귀여웠다. 갈색 곱슬머리 하며, 동글동글한 볼이 딱 푸들 같았다.
“저, 송구하지만 소…속옷은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것이 없어서 임시로 제 것을 가져왔어요. 깨끗이 세탁한 것이니 불편하시겠지만 이것으로….”
메리의 손에는 낡았지만 청결해 보이는 속옷이 들려있었다. 옷도 없고 속옷도 없고. 레오니 넌 가진 게 도대체 뭐니? 정말 불쌍한 인생이었다.
“고마워. 신경 써 줘서.”
메리는 수줍은 손길로 긴 목욕에 지친 리아의 몸을 닦아주고는 속옷과 헐렁한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청결한 속옷은 거칠었으며, 드레스 역시 깨끗했으나 오랫동안 묵혀 있던 것이라 좀먹은 냄새가 풍겼다. 그래도 처음에 비해 이 정도면 아주 훌륭했다.
“간단히 요깃거리를 준비해 뒀어요. 오랜 시간 목욕을 하셔서 배가 고프실 것 같아서요.”
메리의 말에 리아의 귀가 쫑긋했다. 귀여운 데다 센스도 있었다. 좋아. 역시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 같았다. 그래 푸들을 닮은 사람치고 못된 사람은 없지. 리아는 맘에 쏙 드는 메리의 행동에 기분이 좋았다.
현재 리아에게는 목욕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누워서만 시간을 보낸 레오니의 몸은 작은 움직임에도 긴 휴식을 필요로 했다.
메리는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리아를 부축해 음식을 올려놓은 테이블 앞에 앉혔다. 테이블 위에는 고소한 향이 풍기는 비스킷과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이라 간단하게 준비했어요.”
리아의 뒤에서 긴 머리를 조심스럽게 빗겨 주며 메리가 말했다. 처음보다 한결 안정된 목소리였다. 목욕하는 긴 시간 동안 리아에게 조금은 익숙해진 탓이었다.
“부탁이 있어.”
리아가 고개를 돌려 메리를 올려다봤다. 갑작스러운 리아의 말에 메리의 움직임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