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공작이라고?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것들을 좀 알긴 하는데 공작이면 왕 다음으로 높은 귀족 아니야?
아 이 망할 악마 놈. 나보고 귀족같이 살게 해 준다고 어쩌고 하더니 진짜 이런 세상에 가져다 놓은 거야? 진짜 귀족으로 살라고?
앞이 깜깜했다. 환생을 시켜 주려면 적어도 같은 세상에는 데려다 놓아야 하는 거 아닐까?
딱 봐도 이건 완전 옛날이잖아. 시대라도 맞춰 환생시켜 줘야지.
하긴 천국도 있고 악마도 있는 판에 이게 무슨 대수인가 싶기도 했다.
계속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리아가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는 지금 렌포드에 계십니다.”
“아, 내가 머리가 좀 아파서… 그럼 당신이…?”
“네, 마님. 저는 집사 넬슨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헨리 넬슨이었다. 그는 베드포드 성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통솔하는 집사였다.
아예 기억상실인 척해 버려? 이 뼈다귀녀의 행색을 보았을 때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고민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 다시 방문이 열렸다.
김이 폴폴 나는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이 들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방안이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그래 이것이 진정한 음식이지.
여자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리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은 잘 마주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다들 뼈다귀녀를 겁내고 있었다.
“고마워.”
리아가 침대에서 힘겹게 내려오며 말하자 여자는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여자는 리아에게 90도를 넘어선 120도로 크게 인사하고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또다시 방안에는 집사 넬슨과 리아만 남았다. 리아가 힘겹게 테이블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들며 넬슨을 바라보았다.
넌 먹는데 쳐다보고 있을 거냐? 물론 속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눈빛으로 충분히 느껴졌으리라.
“그럼 식사하십시오. 식사가 끝나신 후 벨을 울리시면 하녀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아 보였으나 리아의 명백한 축객령에 넬슨은 더 묻지 않고 정중한 인사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리아는 넬슨이 문을 닫고 나감과 동시에 쟁반 위의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고소한 옥수수 수프, 부드러운 스테이크, 육즙이 가득한 닭 다리, 향긋한 빵까지.
평범한 음식들이었으나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리아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순식간에 음식들이 바닥을 보였다.
배가 부르고 나니 다시금 리아의 머리가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아직 파악되지 않은 어느 세계이다.
전등도 없고, 전자기기도 없고 심지어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이다. 나도 외국인이다. 내 남편은 공작이다. 나는 공작부인이다. 남편은, 렌포드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우선은 이곳에 없다. 나는 더럽게 안 씻는다. 나는… 나는… 나는… 더 이상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성격이 이상한 뼈다귀녀는 더럽게 안 씻지만, 남편이 있었다.
“혹시….”
그래 맞아. 아까 거울에 이마를 대었을 때 고통과 함께 찾아왔던 기억. 혹시 저 거울에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는 든든히 먹은 음식 덕에 조금은 힘이 나는 몸을 끌고는 다시 거울 앞에 주저앉았다.
망할 방은 너무 넓었다. 고깟 거 걸었다고 벌써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약해 빠졌어. 정말.
“그냥 확 이마를 대 봐?”
모 아니면 도였다. 고민 따윈 사치일지도 몰라. 리아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망설임 없이 거울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으….”
뭐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게 아니었나? 아까는 분명 이마를 가져다 대니까 발레포르와 계약하는 뼈다귀녀의 기억이 밀려들었는데. 작정하고 대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방법이 아닌 걸까? 여기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살아남으란 말이야?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역시나 하늘은 자신이 편하게 사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공작부인 꼬락서니가 이게 말이나 되냐고! 모든 것이 한 편의 영화라면 얼마나 좋을까? 탄생도 죽음도 환생도 그 어느 것 하나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없으니.
억울했다. 발레포르 이 망할.
“아… 아악!”
리아가 발레포르를 떠올리자마자 이마로 뜨거운 기운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허억.”
순식간에 뼈다귀녀의 기억이 리아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전부. 모두. 남김없이.
“아… 이 미련한….”
그녀의 기억이 하나씩 자신의 것처럼 선명해질 때마다 눈물이 났다. 그녀가 겪어온 고통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죽음을 원했는지.
“그래서 죽었구나. 죽을 수밖에 없었구나.”
내뱉는 목소리에 쓸쓸함이 가득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왜 결혼을 했는지,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죽음을 택했을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진정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을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발레포르 이제 그만 나와. 응?”
나올 리가 없었다. 물론 나올 리가 없겠지.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지만, 따지고 싶었다. 왜 하필이면 이 여자였냐고. 이렇게 상처가 많고 힘든 삶을 살아온 여자였냐고.
리아는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말라비틀어진 뼈다귀녀 레오니가 울상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살아야 한단 말이지?”
고아 리아로 살았던 삶은 끝이 났다. 뭐 그것도 평탄하지 않았던 삶이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 줄은 몰랐다.
인생이라는 게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이 맞구나. 이 몸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 몸이 이번 생을 다 할 때까지 좋든 싫든 이제 레오니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제 자신이 이 몸의 주인이 된 이상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이렇게 더럽게, 이렇게 보잘것없는 채로 살 수는 없었다. 그건 리아 스타일이 아니었다.
황금의 나라 엘리시아. 그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돈이 차고 넘친다는 공작의 부인.
누구나 바라고 꿈꾸는 삶이었다.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상상 속에나 존재하던 인생. 그런데 그런 인생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레오니. 내가 너 대신 제대로 한번 살아 보겠어. 기대해.”
거울 너머로 이상하게도 발레포르가 씨익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발레포르 넌 이미 알고 있었지? 내가 이럴 거란 걸?”
아무리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이렇게 내팽개친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만나기만 해 봐. 혼꾸멍을 내줄 테니.
똑- 똑-
리아의 정신이 다시 돌아온 것은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식사를 마쳤다는 벨이 울리지 않자,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하녀가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마… 마님. 별일 없으세요?”
푸들 머리 여자였다. 벌벌 떨며 말하는 모습이 은근히 귀여웠다. 아무리 봐도 강아지 같았다.
여자는 방안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에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던 냥 깨끗하게 비워진 식기를 확인했다.
“시…식사를 다 하셨으면 그럼… 목욕 준비를.”
리아는 여전히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여자의 말에 리아가 더럽고 떼가 가득 낀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끈적끈적하게 뭉친 머리카락도.
제대로 살려면 이렇게 더럽게는 안 되지.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곧바로 허리를 숙이고는 방을 빠져나가더니 금방 목욕용품을 준비해 들어왔다.
“그, 그럼 마님. 이쪽…으로.”
푸들 머리 하녀가 방 안쪽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뽀얀 김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였다. 뭐라도 좀 먹었다고 기운이 났다. 제대로 내딛기 힘들었던 발걸음에 조금은 힘이 실렸다. 아직도 어색하고 후들거리긴 했지만.
“이름이?”
리아는 욕실이라고 불리는 공간으로 들어가며 여자를 향해 물었다.
“네? 저, 저요?”
당황한 하녀가 얼굴을 붉혔다.
레오니가 그동안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질문이니 당황할 만도 했다. 그동안 이 미련한 뼈다귀는 이곳 베드포드 성에서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메리. 메리예요.”
“메리.”
이름을 들으니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얼굴과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리아의 웃음에 메리가 사색이 되어 몸을 굳혔다.
리아는 분명 귀여움에 웃은 거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건 조소였다. 치렁한 머리와 더러운 얼굴은 그녀를 한층 더 지독하게 만들었다.
“귀여운 이름이네.”
이어지는 리아의 말에 메리의 얼굴이 알 수 없는 온갖 감정들로 뒤죽박죽 섞여 버렸다. 두려움과 감격. 부끄러움과 걱정.
갑자기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마님을 향한 두려움과 마님이 드디어 마님이 자신의 이름을 먼저 물어왔다는 것에 대한 감격.
“메리, 날 도와주겠어?”
이 몸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번 화끈하게 살아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착착 세워졌다.
우선은 귀여운 메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온 마음을 다하는 아군 한 명은 그냥 그런 주변 사람 백 명보다 훨씬 귀중하니.
메리의 도움으로 누더기 같은 옷을 벗고 따뜻한 탕 속에 들어가니 기분이 나른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아있다는 행복.
이렇게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 알 수 없는 세상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있었다.
“마… 마님 머리를 감겨 드릴게요.”
메리가 곁에 와 엉킨 머리를 잡아 올렸다. 어찌나 엉망인지 한두 번 감아서는 티도 나지 않을 상태였다. 머리카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메리는 정성을 다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감았을까? 메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머리카락은 드디어 더럽게 쌓인 기름때와 먼지가 벗겨지고 제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년 만이었다. 레오니가 머리를 감은 것은. 3년 전 결혼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욕한 것이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이었다.
‘얘는 죽지도 못할 걸 왜 굶은 거야.’
발가벗은 몸은 더 비참했다. 갈비뼈 모양이 그대로 느껴졌으며 납작하게 쪼그라든 가슴이 초라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참 많기도 하겠구나.’
열 번째로 물을 갈아 넣은 탕 속으로 리아가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