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내가 마님이라니?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길고도 긴 복도였다. 아.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혹시 중세시대성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엔틱하고 클래식하고 레트로스러운 분위기가 넘쳐났다.
“분명 한국은 아니야.”
비틀거리는 몸뚱이를 지탱하려고 벽을 잡고 섰다. 아 밥 한번 먹기가 참 힘들다. 환생을 하면 뭐 하냐고 이렇게 거지 같은걸.
누구라도 나타나라. 제발 누구라도 눈앞에 나타났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이 뼈다귀는 평소에 얼마나 움직이지 않았으면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때였다. 복도 저 끝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린 것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복도를 타고 리아의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여… 여기.”
아 진짜 망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개미보다 못한 목소리. 꽉 잠겨 허스키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누군가에게 들릴 만큼은 나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더는 걸어갈 힘도 없었다.
그저 저 앞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이대로 고이 걸어와서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벽을 잡고 기대고 선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거, 거기 누구세요? 혹시 마… 마님?”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여자가 드디어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잠깐만, 뭐라고? 마님? 아까 음식을 가져온 여자도 마님이라고 했었는데….
마님은 결혼한 여자를 칭하는 호칭이 아닐까?
에이, 설마. 결혼까지 한 여자라고? 에이, 그럴 리가.
“마… 마님이세요?”
혼돈으로 가득한 머리를 흔들어 설마 하는 잡생각을 날려 버린 리아는 자신을 마님이라고 칭하는 여자를 향해 다시 걸어갔다.
그렇지만 역시나 뼈다귀녀의 몸은 약해빠졌고 많이 지쳐 있었으므로 몇 걸음 더 가지 못하고 이내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님?”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리아는 온몸이 아파 끙끙댔다.
그런데도 여자는 여전히 마님 타령이나 하고 있었다. 사람이 자빠졌으면 당장 달려와서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곳은 정상적인 것이 어느 것 하나 없었다. 이 악취를 풍기는 뼈다귀녀의 몸뚱이도 그러하고, 어딘가 멍해 보이는 저 여자도 그러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우두커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멍한 여자를 향해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라도 크게 나와 준다면 소리쳐 부르겠지만, 그것도 되질 않으니.
후들거리는 다리는 다시 일어서기를 거부했다. 뭐 어차피 기는 것도 처음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우선은 뭐라도 먹고 봐야 했다.
여자를 향해 천천히 기어가는 리아의 모습은 퍽 엽기적이었다. 쩐내 나는 머리를 치렁하게 늘어트리고 두 팔을 의지해 앞으로 조금씩 기어가는 꼴은, 정말 음식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저… 저… 마… 마… 마님?”
여자는 원래 그런 것인지 놀라서 멍한 것인지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덜덜 떠는 폼이 지금 상황에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드디어 여자의 앞에 다다른 리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한쪽 팔을 뻗어 여자의 치맛자락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지친 얼굴을 여자를 향해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바… 바바…아….”
“네… 에?”
경악한 얼굴의 여자가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고 중얼대는 리아를 향해 벌벌 떨며 되물었다.
“바… 바…압… 줘.”
그것이 리아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지친 몸은 조금의 음식도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리아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마님이 왜 방 밖으로 나오신 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던 일인데….”
“저… 저도 모… 모르겠어요. 복도를 청소하러 올라왔는데 갑자기 마님이….”
“의사를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요?”
마님? 의사? 점점 목소리가 더 정확하게 들려왔다.
‘그래… 맞아. 배가 고파서 방 밖으로 나갔었지. 그다음에 밥을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뭐야? 그럼 나 쓰러졌던 거야? 그 말로만 듣던 혼절?’
“마님이 뭐라고 하셨지? 네 치맛자락을 꼭 잡고 쓰러지신 이유가 무엇이지?”
남자가 다그치듯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그게… 바…바…아….”
여자가 한 번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바… 밥…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오, 내가 밥 달라고 하고 쓰러진 거야? 이런 망할.’
누워 있는 리아의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하필 그 순간 쓰러질 건 또 뭐냔 말이야. 이 약해 빠진 몸뚱어리.
그런데 그 와중에도 리아는 아까부터 그들이 계속 마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매우 거슬렸다.
지금 쟤들이 말하는 마님이 혹시 나야? 앞뒤를 맞춰보니 저 마님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이 뼈다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리아는 살짝 실눈을 뜨고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사내와 아까 그 답답이가 서 있었다.
꼬르륵-
여전히 몸은 정직했다.
꼬르륵-
민망하도록 크게 울려 퍼지는 꼬르륵 소리에 리아는 그만 눈을 떴다. 더는 깨지 않은 척하고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흐음.”
“마님?”
먼저 반응을 한 것은 남자 쪽이었다. 그는 리아의 신음에 역시나 마님이라는 호칭를 내뱉었다.
‘얘 이름이 마님인 건 아닐 거고, 어머머 이러다 나 진짜 남편도 있는 거 아냐?’
“마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푸근한 인상을 한 중년의 사내였다. 잘 차려입은 모양새가 꽤 중요한 직책에 있는 듯 보였다.
‘정신이 들기야 진작 들었지.’
이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이 뼈다귀라면 뭐라고 했을까? 간절하게 죽음을 원했다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들어가 있는 몸에 주인에 대해서.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모르겠다. 우선 밥이나 좀 먹고 싶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곳엔 그 거지 같은 밥을 가져다준 금발 머리도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님이라는 호칭도 그러하고, 이들이 자신한테 관심을 주는 꼴도 심상치 않은 것을 보아하니 이중 가장 높은 사람은 이 뼈다귀녀인 듯했다. 몰라 우선 밥이나 좀 먹고 보자.
“…밥.”
“네?”
중년의 사내가 되물었다. 리아는 좀 더 크게 목소리를 냈다.
“밥 줘요.”
말을 함과 동시에 허리를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여전히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자극했다.
리아가 일어나 앉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당사자가 느끼기에도 이렇게 고약한데 그들은 분명 더 심하게 지독하겠지.
밥을 달라는 자신의 말에도 어리둥절하며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보며 리아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아 몰라. 이렇게 된 거 그냥 연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시하거나 명령을 내리는 역할은 많이 해 봐서 자신이 있었다. 왕비의 역할도, 공주의 역할도 해 본 적이 있었다. 뭐 그게 바로 자신의 특기이자 장기인 셈이다. 그리고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눈칫밥이라면 또 질리도록 먹어 봤지. 이중 누구도 자신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서는 이 없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그냥 하는 명령이나 부탁은 먹혀들지 않는다. 사람의 심리는 다 비슷했다. 콕 집어서 누군가를 지목해야 했다.
“저 끝… 흠흠… 끝에 서 있는….”
허스키하고 갈라지는 리아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작지만 또렷했다. 리아가 지목한 여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리아가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두의 시선이 여자를 향해 몰렸다.
“저… 저 말씀이세요?”
여자의 말에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말이야 너.
“먹을 것을 가져다줘. 지금 당장.”
지금 당장이라는 리아의 말에 주변을 돌아보던 여자가 조금 망설이더니 중년의 남자와 눈을 마주친 후 뒤를 돌아 방을 빠져나갔다.
우선 첫 번째는 통과. 그럼 두 번째로 급한 것은 몸을 씻는 것이다. 먹고 나서 목욕도 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파악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리아는 즉시 두 번째 타겟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은 순종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좋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중에 가장 많이 흔들리고 동요하고 있는 눈동자가 두 번째 재물이었다.
‘좋았어. 두 번째는 바로 너야.’
“거기.”
이번엔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아까 그 답답이. 네가 수고해 줘야겠어. 이들 중 가장 흔들리는 동공을 가진 여자였다. 갈색 곱슬머리가 복슬복슬한 것이 푸들 같아 보였다.
“저… 저요?”
“씻어야겠어. 목욕 준비를 해 줘.”
여자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리아를 바라봤다가 중년의 남자를 바라봤다가 당황해 하는 모습이 한눈에도 애잔해 보였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더러운 꼴로 더 있다가는 미쳐 버릴지도 몰라.
중년의 남자가 여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의 표시를 하자 여자도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역시 예상대로 중년의 남자가 저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모두 그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까.
남자가 주위를 눌러보며 눈짓을 하자 모두 한꺼번에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남자와 리아 둘뿐이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남자의 표정이 묘했다. 뭔가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 아닌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도대체 아는 정보가 없으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깜깜했다.
망할 발레포르 놈. 이제 놈이라는 호칭도 사치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발레포르 새끼. 이런 곳에 던져 놓으려면 기본적인 지식은 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래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발레포르 개자식이라고 외쳐봤자 그 악마 놈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방법은 딱 한 가지다. 고전적인 수를 쓰는 것.
“하아….”
리아는 머리에 손을 얹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밥이니 목욕이니 명령을 탁탁 내리던 여자가 신음이라니. 웃기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연기로 극복해야만 한다.
‘뭐였지? 맞아. 마님! 내가 마님이라니 그럼 남편도 있다는 것일까? 한번 떠볼까?’
“남편은….”
남편이란 소리에 남자의 얼굴이 순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리아는 알 수 있었다.
“공작님 말씀이십니까?”
뭐? 공작? 남편이라는 말에 공작을 언급하는 건, 그러니까 그건 이 뼈다귀녀의 남편이 공작이라는 말이야?
리아의 머릿속이 상황파악을 하며 재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