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12화 (12/116)

12화. 새로운 몸으로 눈 뜨다

처음 느껴진 것은 이상한 냄새였다. 시큼하고 털털하고 역하기까지 한 고약한 냄새에 눈이 번쩍 떠졌다.

‘여기가 어디지?’

이상하게 머릿속으로 생각이 맴돌 뿐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밤이었는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둠뿐이었다. 갑자기 기억이 났다.

그래, 환생!

발레포르와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이쁜아 너는 망각의 샘물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환생을 해도 전생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

그 말이 진짜였다. 정말 다 기억이 났다. 리아로 살아왔던 삶과 죽음, 발레포르와 있었던 일까지.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아니 점점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느낌이 그랬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어둠에 적응이 된 것인지 방안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원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눈을 꿈 벅 거려 보아도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병원은 아니었다.

가정출산을 한 건가? 요즘 여유 있는 집에서는 가정출산을 하는 일이 왕왕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약하지? 코끝을 자극하는 역한 냄새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질 줄을 몰랐다.

리아는 조심스럽게 손끝을 움직여 보았다.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직 몸에 적응하지 못해서 인지 생각만큼 움직임이 따라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오른쪽 손을 들어 올릴 수가 있었다.

그때 달빛이 방안을 환히 비췄다.

“꺄-아-악!”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고 포동한 아기 손이 아니라, 뼈다귀였다. 해골의 손이었다. 순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거친 비명을 뱉어낸 리아는 그대로 기절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아침이었다. 역한 냄새는 여전했고 리아는 눈을 뜨기가 겁이 났다.

꿈이었겠지? 아무리 아기의 몸이라고 하지만 정신만큼은 성인의 것이니 그런 꿈을 꿀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역시 꿈일 것이다. 손이 뼈다귀일 리 없지.

리아는 손끝을 움직였다. 아직 이질적이었지만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기는 했다. 이번에는 발끝에 힘을 모았다. 느낌이 있었다.

리아는 조심스럽게 다시 눈을 떴다. 강한 햇살에 몇 번을 깜빡이고 나니 다시금 방의 모습이 천천히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휑하고 넓은 방이었다. 부잣집은 역시 부잣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천장과 그에 어울리는 샹들리에. 놓여있는 가구도 고급스러웠다.

꼬르륵-

배가 고팠다. 역시 아기는 먹고 자는 게 일이니.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울면 되는 건가?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아침이요. 뭐 보나 마나 안 드시겠지. 귀찮아 죽겠네.”

금발? 분명 금발 머리의 여자였다. 부잣집에서는 외국인을 가정부로 쓴다고? 컬쳐쇼크였다.

“으, 고약해.”

방 한쪽의 테이블에 쟁반을 던지듯 올려놓은 금발의 여인은 코를 비틀어 잡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마님? 이 방에 나 말고 누가 또 있는 거야? 그러다 문득 리아는 믿고 싶지 않은 이상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아기치고는 상당히 큰 몸. 자신의 몸이 이상했다.

천장과 주변을 둘러볼 때만 해도 알지 못했는데 고개를 살짝 숙이니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천에 감싸인 누군가의 몸통. 자신의 머리와 바로 연결된 듯한 이상한 몸통. 리아는 뒷덜미를 관통하는 싸늘한 느낌에 다시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밝은 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손은 분명 어른의 것이었다. 말라비틀어지고 더러운, 다 큰 성인의 손. 지난밤 자신이 뼈다귀라고 생각했던 그 손이 진짜였다. 놀란 리아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뭐야 망할.”

이번엔 생각이 아니라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아! 말도 할 수 있었다.

‘뭐야? 죽음이고 환생이고 다 꿈이었던 거야? 나 안 죽은 거야?’

뭔가 가슴이 두근거리며 희망 부풀어 올랐다. 오랜 꿈을 꾸었던 거야. 그럼 그렇지 내가 죽긴 왜 죽어. 기대감에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번에는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만졌다. 눈, 코, 입 전부 그대로 제자리에 다 붙어 있었다.

“근데 이 고약한 냄새는 뭐야.”

혹시 자신이 의식불명으로 오래 누워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인간 그런 것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라비틀어진 몸뚱이와 손가락이 이해될 것이다.

“왜 이런 누더기를 입혀놓은 거야.”

목소리가 이상했다. 낮고 거칠고 소리도 매우 작았다. 그렇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식물인간이었다면 목소리가 그런 것도 당연했다.

우선은 확인해야 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확인을! 그때 여기저기 눈동자를 굴리던 리아의 시야에 거울이 보였다.

그녀는 몸을 움직였다. 삐걱대는 말라비틀어진 몸을 간신히 움직여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그래도 분명하게 알아낸 것이 있다면 자신은 절대 아기는 아니었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희열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희열이.

리아는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때문에 걷기를 포기하고 기기 시작했다. 자꾸만 거울이 보고 싶었다. 살아있다는 확신을 하고 싶었다.

이방이 어디인지 고약한 냄새의 근원이 어디인지 따위는 상관없었다. 살아만 있다면.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말이다.

힘겹게 거울까지 기어간 리아가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 이게 뭐…뭐야!”

너무 황당해서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리아가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그것도 매우 더러운 여자가.

얼마나 감지 않았는지 기름져서 엉킨 빨간 머리와 버짐이 핀 얼굴. 그리고 전혀 다른 생김새. 같은 것이 있다면 황금색 눈동자뿐이었다.

또 꿈인가 싶어 고개를 흔들었다. 거울 앞에 주저앉아서 몇 번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떴지만 그대로였다.

“발…레…포…르.”

거칠게 튼 입술이 움직였다. 너무 황당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그녀의 상태가 그랬다. 그저 발레포르만을 부를 뿐이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 힘이 없었다. 꿈이야. 그래 이건 꿈이지? 고약하고 못된 꿈일 뿐이야. 혹시 분장을 한 것인가 싶어 턱밑으로 손을 올려 살을 거칠게 집어 당겼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손톱에 상처만 날 뿐이었다.

심지어 아팠다.

고통. 그래 고통이 느껴졌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리아는 발레포르를 부르며 거울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이마로 밀려들었다.

“헉.”

한꺼번에 밀려든 기억들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죽음에 대한 열망, 기도, 그리고 발레포르의 응답. 뜨거운 기운과 함께 발레포르와 이 몸의 주인이 계약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이 여자의 영혼을 소멸시키고 날 이 속에 집어넣었다고?

“아 진짜 미친 악마 새끼.”

낯선 몸에서 나오는 자신의 말이 어색했다. 이게 현실이란 말이야? 이놈은 날 어디다 가져다 놓은 거야?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머릿속으로 밀려든 기억이 정말 다 진실이란 말이야? 죽음 이후 황당한 상황을 하도 겪어서 그런 것일까? 전혀 현실 같지 않은 상황이 웃기게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발레포르! 이 악마 같은 새끼!”

아니지, 그놈은 악마였지. 수차례 발레포르를 불러 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물론 없을 것이다. 지금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이 뻔할 테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럼 여긴 어디야? 유럽의 어디쯤 되는 걸까? 거울에 비친 얼굴로 볼 때, 생긴 게 딱 서양 사람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그녀의 과거와 닮아있었다.

‘미쳤지. 닮긴 어디가 닮아. 이 말라비틀어진 쭈그렁 할망구 얼굴이랑 연예인까지 했던 내 얼굴을 비교하다니.’

눈동자 색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어디서 그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원인은 몸뚱이였다.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는 끈적한 머리카락에 코를 가져다 대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웩.”

이 여자는 정말 왜 이렇게 살았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죽고 싶었을까? 아 진짜 악마 놈. 부잣집에서 공주처럼 살게 해준다더니 그런 여자가 이토록 죽고 싶었을 리가 없잖아.

빛 좋은 개살구인 거 아니야? 사채빚에 시달린다거나? 정신병이 있다거나?

리아는, 아니 레오니의 몸 속에 들어간 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쩌면 좋지?’

밀려든 기억에 의하면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다. 발레포르 놈과 이 여자의 계약이 그러했다. 이 몸에 원래 주인은 죽었고 이제 리아 자신이 이 몸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 그러니까 왜 이런 거지 같은 몸에 자신을 넣어놨냐고! 따지고 싶은데 그 악마 놈이 순순히 모습을 보일 것 같지 않았다.

꼬르륵-

이런 상황에서도 몸은 늘 그렇듯이 정직하다. 자연스럽게 조금 전 금발여자가 놓고 간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먹자. 그간 얼마나 음식에 목말라 있었던가. 얼마나 무언가를 씹고 뜯고 즐기고 싶었던가. 삐쩍 마른 몸뚱이를 보더라도 우선은 먹는 것이 먼저였다.

리아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부잣집이라고 하니 먹는 거 하나는 잘 나오겠지. 그렇겠지. 그래야만 한다. 먹는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이런 씨-’

애써 다가간 보람도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쟁반을 본 리아는 망연자실했다.

진짜 말만 귀족이고 어디 망한 집구석에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닐까 심각한 고민에 빠질 정도였다.

쟁반 위에 놓인 것이라고는 멀건 스프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이 전부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건더기라고는 전혀 없는 맹탕 스프. 그것도 식은 지 한참이 지났는지 차가운 상태였다. 빵은 솔직히 딱딱하다는 표현도 과찬일 정도였다.

“이걸 먹으라고 준 거야?”

당장 이 집의 재정 상태부터 확인해야 한다. 발레포르 그놈이 진짜 부잣집이라고 했는데. 이럴 수는 없다. 지나가던 거지가 동냥해도 이보다는 잘 챙겨 줄 것이다.

빵과 스프는 음식이라고 칭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꼬르륵-

이미 배 속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픈 지경.

리아는 어쩔 수 없이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먹어 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진정 이걸 먹으라고 준 것일까?

무엇으로 끓인 것인지 그냥 맹물이 더 맛있을 것 같은 고약한 스프. 딱딱함이 그 수준을 한참 넘어서 벽돌 같은 빵.

이 더러운 뼈다귀녀는 그동안 뭘 먹고 살았던 걸까?

너무 배고 고프니까 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어질했다.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직접 음식을 찾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방을 벗어나야 하겠지.

삐걱삐걱 잘 움직이지도 않는 두 다리를 휘청대며 리아는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향했다. 망할 방이 넓기는 왜 이렇게 넓은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몸을 하고 움직이려니 딱 죽을 맛이었다.

간신히 문 앞에 도착해 고급스러워 보이는 손잡이를 돌리니 그래도 기름칠은 잘해 놓았는지 소리도 없이 쉽게 문이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