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라루체
“그러니까 이 보석만 있으면 내가 지금 당장 환생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리아가 마법의 보석 라루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환생이 그렇게 쉬운 거였다니.
“어허, 조심히 다루래도. 그거 진짜 귀한 거라고.”
빛나는 물체는 발레포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라루체가 맞았다. 지옥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발레포르는 자신이 기어코 다시 찾아낸 마지막 희망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라루체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환생 그까짓 거쯤이야 어렵지도 않았다.
활짝 웃는 발레포르를 보며 리아가 다시 보석을 자세히 살폈다. 잘 보니 좀 비싸 보이는 게 특별한 것 같기도 했다.
“좋아, 그럼 나 원래 몸으로 돌려보내 줘.”
리아의 말에 발레포르의 고개가 획 하고 돌아갔다.
“뭐? 원래의 몸? 그건 안 돼.”
“왜!”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야.”
“왜왜! 이거 신비의 보석이라면서. 엄청난 힘을 가졌다면서.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굴더니. 왜 안 된다는 거야!”
리아는 안 될 것을 잘 알면서도 괜히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사실 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발레포르만 보면 투정을 부리고 응석을 피우고 싶었다.
울상을 짓는 리아를 보며 발레포르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거, 다 알만한 영혼이 왜 이래? 지금 네 몸은 다 썩어 없어졌어. 아니지, 일가친척 하나 없다고 했으니 무덤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게, 벌써 화장시켜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겠지.”
“꼭 그렇게 자세히 설명해야 해?”
다 아는 사실을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는 저 못된 악마 발레포르 덕에 리아의 입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듯 삐죽거리며 튀어나왔다. 아픈 데만 콕콕 찌르는 나쁜 악마 놈.
“너 솔직히 말해 봐. 이거 훔친 거지?”
“아…니거든! 나… 그러니까 이, 이거 절대 훔친 거 아니거든!”
리아의 일격에 발레포르가 말을 더듬었다.
“오호라,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있지. 이 악마야. 아무리 악마래도 도벽은 나쁜 거야.”
당황한 발레포르가 리아가 들고 있는 라루체를 향해 급히 손을 뻗었다.
“훔치긴 누가 훔쳤다고 그래! 헛소리할 거면 이리 내놔.”
그때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레포르의 손끝이 리아의 손바닥 위에 놓인 마법의 보석 라루체에 닿는 바로 그 순간.
발레포르의 머릿속으로 번쩍 하며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밀려들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 그대는 제발 내 앞에 모습을 보일지어다.]
[내 목숨을 담보로 그대와 거래를 하고자 하니 지금 내 앞에 모습을 보이거라.]
발레포르는 급히 리아의 손에서 라루체를 잡아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양손을 맞잡아 그 안에 라루체를 넣고 가슴 쪽으로 가져다 댄 후 눈을 감았다.
“흠….”
묘한 기운과 함께 주문을 외우는 여자의 모습이 발레포르의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여자의 생각도 발레포르에게 스며들었다.
‘공주에 공작부인이란 말이지. 거기다가 죽고 싶다고? 그럼 나 발레포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죽음에 대한 열망이 눈이 부실 정도로 뜨거웠다. 원하는 것은 오직 죽음뿐. 발레포르는 눈을 뜨고 옆에 서 있는 리아를 돌아보았다. 기회였다. 꼭 잡아야만 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
발레포르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아가 물었다.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뜨고 사납게 묻는 리아를 보며 발레포르는 생각했다.
‘저것을 당장 보내버려야 해!’
언제까지고 이렇게 당하며 살 수는 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리아를 보내버려야 했다.
“너 환생할래?”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그거잖아. 나 환생 좀 시켜 달라고!”
“그래 좋아. 그렇게 원한다고 하면 내가 시켜 줄게. 그 환생. 대신 예전 네 육체로 돌아가는 것은 안 돼.”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나 정말 환생시켜 줄 거지?”
리아의 목소리가 기대로 한껏 부풀었다가 이내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근데 너 그 말 진짜야? 어디 또 그지 같은 곳에 나 갖다 버리려는 거 아니고? 하는 짓이 수상하단 말이야.”
“아니야. 이렇게 서로 믿음이 없어서야. 쯧쯧.”
발레포르가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표정은 단호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리아는 팔짱을 끼고는 그런 발레포르의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좋아. 한번 믿어 보겠어. 어차피 죽은 거 겁날 것도 없지. 네 말처럼 환생이 가능한 거라면 그럼 이왕이면 부잣집에 보내 줘. 공주 대접받고 사는 집에.”
“뭐야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며!”
리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말했다.
“아니야. 계속 생각을 해 보니까 자꾸 욕심이 생기네. 너 악마잖아. 이왕이면 환생시켜 주는 거 힘 좀 써서 진짜 부잣집으로 부탁해.”
리아가 너 그 정도 능력은 되지? 하는 표정으로 발레포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좋아. 그거야 어렵지 않지. 지금 내가 이쁜이 너 환생시켜 주려는 집이 아마도 나라에서 가장 부잣집일걸. 공주처럼 사는 거지.”
발레포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공주다. 공주. 공주처럼 사는 게 아니라 진짜 공주라고.’
“정말이지? 나 진짜 그 집에 보내 주는 거야? 너 뻥 아니지?”
발레포르의 말을 들은 리아가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는지 다시 물었다.
“그렇대도 그런다. 빨리 눈 감아. 지금밖에 시간이 없어.”
재촉하는 발레포르의 말에 리아가 망설였다. 급해도 너무 급했다. 바로 환생을 하라는 거야?
“지금 당장? 그래도 마음 정리할 시간은 줘야지. 이렇게 빨리?”
막상 환생을 시켜 준다고 하니 머뭇거리는 라아를 보며 발레포르가 채근하며 말했다.
“너 거기 귀족 집이다. 이런 집에 환생하기 쉬운 게 아니야. 망설이다 똥 된다.”
‘귀족? 부자에 공주 대접에 귀족 집이라니. 한국에서 그런 집을 찾는다면 대기업 회장밖에 더 있어? 나라에서 가장 부자라면 혹시 삼송?’
리아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호… 혹시, 나 쁘띠쁘띠 하게 살 수 있는 거야?”
발레포르는 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무조건 맞다고 해야 한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짜 공주에 부자와 결혼한 여자이니 말이다.
남편이 있다는 소리야 굳이 뭐 나중에 알아도 상관없는 거였다. 지금 알려줘봤자 좋을 게 없었다. 발레포르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는 리아를 잡아끌었다.
“맞아. 지금 이쁜이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정말?”
리아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땡잡았다!
“이제 이리와. 영혼이 정리하고 할 게 뭐가 있어. 혹시 나랑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건 아니지?”
리아가 절대 아니라며 팔을 내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너 미쳤니?”
“그러니까 여기서 더 헤매고 있을 필요가 뭐 있어. 기회가 바로 앞에 있는데. 이리 와서 눈 감어. 이제 내가 이쁜이 널 좋은 곳으로 보내 줄게. 나 믿지?”
“내 인생에서 나 믿느냐고 묻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 없었는데….”
“아 진짜. 그건 사람이고. 나는 위대하신 악마님이란 말이야. 잔말 말고 그만 눈 감아. 이제 네가 눈을 다시 뜨면 그건 환생을 한 이후일 거야.”
리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발레포르 앞에서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기대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드디어 환생이라는 것을 한단 말이지? 진짜 부잣집에?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는 리아의 머리 위로 라루체를 들고 있는 발레포르의 손이 올려졌다. 눈을 감은 리아의 얼굴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한눈에 느껴졌다. 발레포르는 그런 리아를 보며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으로 짐작되는 말을 한동안 중얼대자 순간 감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리아의 온몸을 감싸 안으며 리아의 몸이 한순간에 라루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리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발레포르의 손 위에는 이전보다 더 반짝이는 라루체만 남았다.
“좋아, 이제 여긴 준비 됐고. 그쪽으로 가 볼까나.”
발레포르가 라루체를 들여다보며 씨익 웃었다. 진짜 악마 같은 미소였다.
***
- 베드포드성
손끝에서 느껴지는 불타오르는 듯한 뜨거움에도 레오니는 이를 악물었다. 참아야 한다. 이것을 견뎌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다물어도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굳게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탁탁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레오니는 지금, 생에 마지막일지 모르는 힘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순간 손끝에서부터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몸이 가뿐해지며,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온 것은. 그것은 분명히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귀여운 아이여.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간절히 빌면 이뤄진다. 레오니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악마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환상적이었다.
“부디 제 보잘것없는 목숨을 가져가 주세요.”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답을 했다. 혹시라도 사라질까 봐. 원하는 것을 말하지도 못하고 이 꿈같은 순간이 정말 꿈이 되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발레포르는 아무도 모르게 웃음을 삼켰다. 참으로 마음에 딱 드는 소원이었다. 일이 너무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발레포르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더 근엄하게, 더 어둡게 말했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네 목숨을 내가 거둬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이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뭐든 말씀해 주세요.”
너무 간절한 탓 인지 레오니는 전혀 떨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정확했다.
“하긴, 어차피 목숨을 거둬 버리고 나면 그 이후의 일은 알지도 못할 터.”
발레포드가 읊조리듯 중얼대자 레오니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며 애원했다. 그녀의 소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발레포르의 온몸이 찌릿할 정도였다.
“좋다. 나 발레포르가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대신 너는 나에게 너의 육체를 내놓아라.”
발레포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오니의 고개가 아래위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어차피 죽는다면 육체건 뭐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뭐든 다 줄 수 있었다. 죽을 수만 있다면.
“너의 영혼은 영원히 봉인되어 죽음과도 같은 여정을 걷게 될 것이며 우리의 계약대로 너의 육체는 나에게 귀속될 것이다. 너의 육체로 그 어떤 일이 행하여진다 하여도 이것은 너와 나의 계약에 의한 것이며 그 누구도 우리의 계약을 깰 수 없다.”
발레포르가 엄숙하게 말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지금부터 의식을 시작하겠다. 이제 너는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며 네 몸은 나의 것이다.”
순간 레오니의 머리 위로 마법의 보석 라루체가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드디어 죽음이 눈앞까지 와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듯 빛을 내며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던 보석은 이내 레오니의 정수리를 파고들어 레오니의 온몸을 빛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말았다.
“악마와 계약을 한 아이여.”
레오니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점점 짙어지더니 그녀의 온몸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만들었다. 방 안이 순식간에 불이 붙은 듯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죽음을 원하는 아이여, 이제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발레포르의 말과 함께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죽음을 맞이하는 레오니는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이며 바닥으로 허물어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