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레오니의 선택
- 베드포드 성
“마님은 어쩌고 계셔?”
“뭘 물어보고 그래. 보나 마나 또 자거나 울고 계시겠지.”
베드포드 성의 하녀 데이지가 말했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성의 안주인이자 엘리시아의 공주라는 빨간 머리 여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정말 미치신 걸까?”
마음 약한 하녀 메리가 조심스럽게 묻자 데이지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넌 지난 3년을 그렇게 지켜보고도 모르니? 주인님께서 그동안 이곳 베드포드 성에 들르신 적이 있니? 공주라는 저 여자, 결혼과 동시에 버려졌잖아. 그 이유가 뭐겠니?”
메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의 말이 맞았다. 3년 전 이곳 베드포드 성에 혼자 도착하신 이후로 마님을 찾아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는 성을 지키는 하인들도 알게 모르게 공주를 무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주인님께서는 왜 마님과 결혼을 하신 걸까?”
메리가 다시 물었다. 데이지는 혀를 끌끌 차며 메리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메리, 넌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주인님이 미친 마님하고 결혼한 이유가 뭐겠니?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해 봐.”
데이지의 다그침에 메리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이 바보야. 아무리 미쳤대도 마님은 엘리시아의 하나뿐인 공주야. 그걸 무시할 수야 없지.”
“그런데, 주인님께서 단 한 번도 이곳에 오시질 않으니….”
“여길 왜 오시겠니? 형식적인 결혼인 게 뻔한데. 불쌍한 우리 공작님. 하필이면 미쳐도 단단히 미친 여자한테 발목을 잡히셔서.”
“쉿! 데이지, 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메리가 주위를 살피며 말하자 데이지가 또다시 혀를 찼다.
“듣긴 누가 듣니? 그리고 내가 틀린 말 했니? 미친 마님 덕에 주인님이 여기 안 오시는 거잖아.”
메리는 당당한 데이지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데이지의 검은 속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제법 예쁜 편에 속하는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 때문인지 주변 사내 중에 데이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분명 주인님을 만나서 어찌해 볼 심산인 것이 뻔했다. 만나기만 한다면 자신에게 넘어오게 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일까? 마님을 더 무시하고 막 대했다. 마님 때문에 주인님이 이곳 베드포드 성에 걸음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올해는 주인님께서 오실까? 가까운 곳에서 한번 뵙기라도 했으면….”
데이지의 말에 메리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다시 청소하기 시작했다. 들어 주자면 끝이 없는 투정이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데이지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메리, 너도 들었니? 지금 이거 말발굽 소리 맞지?”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말발굽 소리였다.
“주인님이 오신 걸까?”
데이지는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머리를 연신 매만졌다. 메리 역시 소리의 정체를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주인님은 아니신 것 같아.”
창밖에 보이는 것은 검은 사자단의 깃발을 들고 빠르게 달려오는 전령이었다.
“공작님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 문을 열어라!”
전령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베드포드 성에 울려 퍼졌다.
똑똑똑-
“마님, 마님, 주인님께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몇 번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데이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읍.”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퍼지는 시큼하고 이상한 냄새에 데이지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방 안은 하녀들이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의무적으로 청소하므로 깨끗한 편이었으나 레오니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방안에 놓인 커다란 침대 한쪽에 엘리시아의 공주이자 베드포드 성의 안주인, 레오니가 몸을 웅크리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마님, 마님?”
데이지가 침대 발치에 서서 떨떠름한 목소리로 다시 레오니를 불렀다. 사실 테이블 위에 서신만 올려두고 나가고 싶었으나 전령은 꼭 공작 부인에게 서신을 전달하고, 읽는 것을 확인하라고 했다.
방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데이지는 어지러웠다. 고약한 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두려움보다 더 지독한 것이 바로 악취였다.
지난 3년간 레오니가 씻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누워 있는 레오니의 머리는 원래의 색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기름지고 엉켜 있었다.
데이지는 이러다가는 평생 이 고약한 방에서 나가지 못할 것만 같아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조금 더 크게 레오니를 불렀다.
“마님? 일어나 보세요. 주인님께서 서신을 보내셨어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런 레오니를 보는 데이지는 점점 짜증이 났다. 그녀는 더 불손하고 경박한 목소리로 레오니를 불렀다.
“마님, 마님? 아이 씨.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계속되는 데이지의 외침에 레오니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확인한 데이지가 이때다 싶어 다시 마님을 외쳤다.
“마님, 공작님께서 서신을 보내셨어요.”
순간 레오니가 눈을 번쩍 떴다. 그 모습에 놀란 데이지는 레오니의 발치에 라이언이 보내온 서신을 재빠르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미친 공작부인이 갑자기 미친 짓을 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마님, 여기 보세요. 공작님이 보내신 서신이에요. 확인해 보세요.”
한참 동안을 미동도 없이 누워 천장을 쳐다보던 레오니가 천천히 발밑으로 손을 뻗어 서신을 집어 들었다. 데이지는 레오니의 모습을 보며 긴장이 되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서신을 펼쳐 읽어 내려가는 레오니의 볼품없이 마른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꺄-악!”
어찌나 크고 고약하던지 화들짝 놀란 데이지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줄행랑을 쳤다. 순식간에 전령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내려간 그녀가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레오니의 비명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있던 하인들이 수군거렸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있는지도 모르게 조용하던 마님이 저토록 고약한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모두 궁금증에 어깨를 들썩이며 소곤댔다.
달려 내려온 데이지에게 전령의 시선이 닿았다.
“서신은?”
“마… 마님께 전달하였습니다.”
데이지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토록 경악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공작부인은 처음이었다.
전령은 레오니의 방이 있는 2층 쪽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마님께서 읽는 것을 확인했느냐?”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레오니의 비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습니다.”
데이지의 확답을 받은 전령은 옆에 서 있는 집사 넬슨에게 시선을 한번 주고는 뒤를 돌아 성을 빠져나갔다.
레오니는 간신히 손을 들어 올려 비명이 쏟아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은 후 다시 한번 공작이 보내왔다는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렇지만 경악스럽기도 했다.
[결혼의 신성한 의무를 행하러 가겠소.]
결혼의 신성한 의무? 레오니는 몸이 덜덜 떨렸다. 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무서웠다. 베드포드 공작의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미치도록 두려웠다.
지난 3년간 레오니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공작은 이곳 베드포드 성을 찾지 않았다. 정말 혼자 내버려 졌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비웃고 불쌍하게 여겼지만, 레오니는 자신을 찾지 않는 공작에게 감사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오겠다고? 그것도 결혼의 신성한 의무를 행하러?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사실 그동안 레오니는 아무런 미련 따위 없는 이번 생을 끝내기 위해 몇 번이나 죽을 각오를 했었다. 그렇지만 쉽지 않았다. 혼자 목숨을 끊는다는 게 마음 약한 레오니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용기가 없었다. 무서웠다. 그래서 죽지 않을 정도만 먹고 죽은 것처럼 지냈다. 하루하루 두려웠다. 궁을 벗어난 이후 무서운 유령들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갑자기 어디선가 그들이 나타날 것만 같아 조금도 편치 않았다. 삶의 목적도 희망도 없이 그저 숨쉬기에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라이언이 돌아온다니!
레오니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간절해졌다. 3년 전 보았던 라이언의 모습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레오니는 흉측하고 무서운 공작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고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두려웠다.
베드포드 성에 머무는 동안 레오니는 하늘을 향해 빌고 또 빌었지만, 하늘에서는 아무런 답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라도 목숨을 유지하고 삶을 살아가라는 들리지 않는 응답만 있을 뿐이었다.
레오니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달라. 이번에는 악마에게 빌 것이야.
레오니는 생각했다. 악녀 에리스의 배 속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에리스는 악마를 향해 빌고 또 빌었다. 끝까지 응답해 주는 악마는 없었지만, 레오니는 그 덕분에 악마를 부르는 주문은 알 수 있었다.
레오니는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방 한쪽 끝에 놓인 거울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나 걸음만큼은 주저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레오니의 모습은 초라했다. 초췌했다. 한 나라의 공주이며 왕국에서 가장 부자라고 소문난 공작의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그녀의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거리의 부랑자보다도 못한 꼴이었다. 언제 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서 본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고, 궁을 나올 때부터 낡아서 보기 흉했던 드레스는 그사이에 더 헤져서 더럽게 얼룩이 져 있었다.
깡마른 몸에 가죽만 간신히 남은 얼굴은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이 순간 레오니의 황금색 눈동자만큼은 빛이 났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레오니는 거울 속에 보이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본 후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결심은 이미 오래전에 했다. 이제 그 결심을 실행할 시간이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잇새로 새끼손가락을 집어넣은 레오니는 손끝을 세게 깨물었다. 여린 살 끝에서 피가 몇 방울 맺혀 들었다. 그녀는 물어뜯긴 손가락을 거울에 가져다 댔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거울의 표면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레오니는 3년 만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죽음의 주문을 외우기 위해.
“하늘에게 버림받은 자, 나 레오니 엘리시아는 말하노라. 내 목소리가 들리는 그대는 제발 내 앞에 모습을 보일지어다. 내 흐르는 피에 대고 맹세하노라. 그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세상 모든 선함이 지옥 가장 깊은 곳까지 그대를 찾아가 단숨에 그대에게 스며들 것이니, 그러니 그대여 지금 당장 달려와 내 소원을 들어주어라.”
거칠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간절함이 가득 하기도 했다.
“내 부름을 들은 그대여 내 말을 들어줄지어다. 내 목숨을 담보로 그대와 거래를 하고자 하니 지금 내 앞에 모습을 보이거라.”
레오니의 간절한 주문은 석양이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지친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한껏 쉰 목소리를 간신히 내뱉을 때 말라붙은 핏자국 위로 힘겹게 대고 있던 손가락 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뜨거운 기운은 손끝에서부터 시작해 온 거울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레오니는 난생처음 희열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드디어 악마에게 응답이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