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9화 (9/116)

9화. 악마 발레포르

사후세계이건 저승이건 간에 시계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지루함에 몸부림치기 직전,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가 리아의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원초적인 식욕을 자극하는 환상적인 냄새였다.

킁킁- 리아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야?”

분명 죽은 몸인데 이상하게 입안에 침이 한가득 고였다. 허기가 몰려왔다.

“이런 망할. 죽었는데 배고픈 게 말이 되는 거야?”

그렇지만 냄새는 더 자극적이고 더 본능적이고 더 참을 수 없게 리아를 공격해왔다.

[헤이 이쁜이]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환청까지 들렸다. 리아의 귓속에 요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리아는 순간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쁜이? 내가 지금 헛소리까지 들리는 거야 뭐야? 리아는 두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미쳤다. 분명 그랬다. 아니 죽어서 환생하려고 줄 서 있는 판에 이쁜이라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느님 아버지 저를 보호하소서.”

되는대로 지껄여도 향기로운 냄새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때 또다시 이쁜이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이쁜이. 배고프지? 나를 좀 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리아의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이 후각. 음식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원초적 본능. 리아는 다시 코를 벌렁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킁킁거렸을까? 리아의 눈에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오는 자그마한 틈이 보였다.

환상적인 향기는 바로 그 틈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틈을 발견한 리아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사인 한 장을 외치던 그놈이 쳐 준 결계 덕분인지 아무도 리아를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리아는 다시 향기로 가득한 틈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틈은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로운 냄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코를 간질였다. 리아의 입에는 침이 한가득 고였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리아는 그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무언가가 리아의 손끝을 확 하고 잡아당겼다.

“앗”

“잡았다.”

리아의 몸이 순식간에 작디작은 구멍 안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

그녀는 몹시 유혹적이었고, 무척이나 탐스러웠다. 그녀를 훔친 이유를 대자면 그것뿐이었다. 순간의 실수가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때 그녀의 손을 잡아챈 것이 그랬다.

-발레포르의 일기에서 발췌-

발레포르는 오늘도 징징대는 리아를 향해 소리쳐 말했다.

“악마는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강렬한 욕망이 있어. 욕구가 있단 말이야. 근데 너한테서 난 그걸 느꼈어. 참을 수 없는 달콤함.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 훔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자극.”

“그게 무슨 개소리야?”

리아의 대답에 이번엔 발레포르가 울부짖었다.

“그래서 이쁜이 널 훔쳤다고! 내 의지로 훔친 것이 아니라 본능이 널 원했어!”

“그래서 이 나쁜 새끼야! 그렇게 내가 그렇게 이쁘고 탐났으면 책임을 져야지!”

말이 통하지 않는 여자였다. 왜 그때 자신은 이 싹수없는 영혼을 향해 그토록 통제되지 않는 소유욕을 느꼈던 것일까? 발레포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밥 줘 이놈아. 굶겨 죽일 작정이야?”

발레포르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넌 영혼이고 난 악마야. 우린 음식 따위는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고!”

“뭐래 이 거지 같은 놈이. 배고파 죽겠는데.”

이 귀찮고도 신경 쓰이는 영혼을 다시 천계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이미 차원의 틈은 닫혀 버린 지 오래였다. 천계에 몰래 숨어든 것으로도 모자라 영혼 서리까지 하고만 발레포르는 이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마왕 바알은 천계와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무너트려 마계를 위험에 빠트린 발레포르를 향해 분노했고 발레포르는 그런 마왕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 천계와 마계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3차원의 세계를 떠도는 중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천계였다. 영혼이 하나 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찾으려 하지 않았다. 마왕 바알도 발레포르가 영혼을 훔쳤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천계에 몰래 숨어들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분노할 뿐. 그렇다고 해서 발레포르가 그들이 모르는 사실까지 친절히 알려 주며, 나서서 욕을 먹을 만큼에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리아를 숨겼다. 숨길 수밖에 없었다. 들켰다가는 더 어마어마한 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오늘도 투정을 부리는 리아를 바라보며 발레포르는 한숨을 크게 삼켰다. 저것을 왜 가지고 나와서 이런 고초를 겪고 있는지 악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저것만 없었다면 그냥 잘못 인정하고 감옥에 몇백 년쯤 갇혀 있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몇백 년쯤이야, 몇만 년을 살고도 또 몇만 년을 더 사는 자신에게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리아의 존재를 들킨다면 그건 일이 달랐다. 천계에 올라간 인간의 영혼을 훔친 극악무도한 죄를 들킨다면 몇백 년 자숙하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소멸을 당할지도 몰랐다.

“아 순간의 실수가 내 인생을 이렇게 꼬아 버리는구나.”

발레포르의 한탄을 가만히 듣던 리아가 성을 내며 받아쳤다.

“그러게 난 어떤 모자란 악마 덕분에 환생도 못 하고 이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밥도 못 먹고 굶어 죽게 생겼네.”

“아 진짜 안 먹어도 안 죽는다고! 너 벌써 죽었다고!”

리아도 알았다. 자신은 죽었다는 것을. 그런 것이 아니라면 지금 영원토록 깨지 않는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죽었다는 것을 안다. 죽어서 환생을 하려 했고, 그 주체못할 식욕 덕에 이 능력도 없는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서 이러고 있다는 것도 안다.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이었고 현실이었다.

악마 놈의 말처럼 자신은 이미 죽어 영혼의 몸으로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렇지만 너무 배가 고팠다. 잘 먹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몰라 그런 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고 차례를 지내는 이유가 다 있을 것이란 말이다. 뭐 자신은 제사를 지내 줄 피붙이 하나 없지만, 있다 해도 지금 이 상태로는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몇 달이 지났는지, 아니 몇 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선 시간의 개념이 없었고 삶의 의미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저 악마 놈을 쪼아대는 것뿐이었다.

다시 생각하니 다시 열이 뻗쳤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환생도 못 해, 지금 이건 또 무슨 상황이냐고!

“야 악마, 너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한참을 땅으로 머리를 박아대며 투덜대던 리아가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자신을 부르자 발레포르가 그런 리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또 뭘 가지고 짜려고?”

“너 내 기구한 인생사 좀 들어봐.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내가 지금 너한테 이런 취급당할 군번이 아니라고. 내가 성불을 해도 골백번 해야 했을 영혼이라고.”

평소와는 다르게 담담하게 말을 꺼내는 리아를 보는 발레포르의 시선도 진지해졌다.

“학연, 지연, 혈연이라고 들어봤어?”

물론 발레포르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리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어디서 났는지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고아가 살아남기 얼마나 어려웠을지 너는 모르지? 그래 분명 모를 거야. 더군다나 그걸로 부족했는지 온전한 한국인도 아니래. 너 튀기라고 아니? 그게 바로 나야. 혼혈아.”

리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육원에서도 왕따요, 학교에서도 왕따. 누구도 나랑 어울리려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도 난 죽기 살기로 살아남았다. 근데 또 인생이라는 게 참 웃겨. 세상이 점점 변하더란 말이야. 내 튀는 외모 덕에 그렇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크고 보니 그 외모가 나를 도와주더란 말이지.”

리아는 지난 생을 떠올리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를 놀리던 것들이 이제 나를 좋다고 난리야. 똥색 같다던 내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변했네. 참 웃기지만 그래도 나는 참았어. 살고 싶었으니까. 잘 살고 싶었으니까. 몇 년을 밑바닥부터 고생하고 보니 막 인기가 생기더란 말이지. 세상에 학연, 지연, 혈연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단 하나가 뭔지 알아?”

발레포르가 그 단 하나가 무어냐는 표정으로 리아를 마주 봤다.

“돈이야.”

그건 바로 돈이었다. 그래서 리아는 그 돈을 벌기 위해 늘 치열하게 살았다.

“근데 말이야. 하늘이 진짜 무심한 게 뭐냐면, 뭐 하나 제대로 준 게 없으면 명줄이라도 좀 길게 줬어야지. 이제 좀 살아볼 만하니까 죽는 건 또 뭐야? 나 놀리는 거야? 더 열 받는 건 내가 죽은 다음 날이 적금 만기일이었다고! 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발레포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리아의 등을 토닥거렸다.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야. 뭐 그래도 잘못한 건 없는지 이것들이 날 환생시켜 준다고 지랄을 하네. 그래서 죽음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환생이란 걸 시켜 준다니 다음 생에서는 좀 평범한 집에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었는데 어떤 거지 같은 놈이 날 또 이런 거지 같은 곳으로 데려와 버렸네.”

리아의 등을 두드리던 발레포르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는 조금씩 천천히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숨 막히는 적막이 악마와 영혼 사이를 감싸고돌았다.

“그… 그게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명색이 악마다 보니 유혹에 좀 약해서… 그래서….”

발레포르가 웅얼거리며 조금씩 천천히 리아의 옆에서 엉덩이를 떨어트렸다. 분위기가 험악했다. 인간계에는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근사한 말이 있다더니 잘못 알았던 것 같다. 리아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 주면 들어 줄수록 그녀의 분노가 반은커녕 곱절로 느는 것이 눈에 보였다.

순간 리아와 발레포르의 눈이 마주쳤다. 황금색이라던 그녀의 눈이 어째서 불타오르는 붉은빛으로 보이는지는 그건 리아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내가 여기 3차원의 세계에서는 힘을 못 써. 악마의 능력이고 뭐고 하나도 소용없단 말이야. 이런 나는 얼마나 답답하겠어?”

이상하게 리아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발레포르였다. 리아는 늘 그렇듯이 또다시 발레포르를 향해 온몸을 날려 소리치기 시작했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던가! 아니면 날 환생시켜 주던가! 이렇게 계속 살게 할 거야? 배고파 죽게 할 거야?”

발레포르의 등위에 올라탄 리아가 발레포르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인간이든 악마든 간에 잘못했을 때는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그건 분명했다.

발레포르는 리아의 공격을 피하려고 납작 엎드렸다. 그렇지만 등에 올라탄 리아는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리아의 공격이 자신에게 고통을 줄 리는 없었지만, 진짜 이러고 있는 악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힘을 못 쓴다고 해도 인간의 영혼쯤이야 한 손가락으로도 튕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상하게 이쁜이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악마 주제에 무슨 양심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미안했다. 지금 이렇게 이쁜이에 지난 생을 듣고 난 후에는 그 마음이 더 커져 버렸다. 악마도 순정은 있었다.

“내가 환생을 시켜 주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내가 힘이 없다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무리 외쳐도 리아의 화는 풀릴 줄을 몰랐다. 그래 날 때려서 속이 풀린다면 풀릴 때까지 때려라! 이제 발레포르도 포기상태였다. 어차피 리아의 손짓은 발레포르에게 간지럼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냥 견뎌 주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엎드려 리아의 화를 받아주던 발레포르에게 저 멀리에서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아무리 보아도 낯이 익은 반짝임이었다.

“잠깐! 이쁜아, 잠깐만!”

확인해야 한다. 지금 보이는 어디서 본 듯한, 내 것 아닌 내 것인 듯 내 것 같이 반짝이는 저 물건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물건이라면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 주고도 남을 것이었다.

저기서 반짝이고 있는 저 영롱하고도 아름다운 물건이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라루체’ 라면 말이다.

몇천 년? 아니 몇만 년인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옛날. 발레포르는 모든 차원의 힘을 넘나들 수 있는 마법의 보석 ‘라루체’를 발견했었다. 물론 그에게는 발견이었지만 다른 이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발견한 ‘라루체’를 다시 빼앗길까 두려웠던 발레포르는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3차원의 세계로 던져 버렸다.

그 당시에는 참으로 기지 넘치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3차원의 세계는 함부로 무언가를 숨길만 한 곳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명칭이 3차원의 세계이겠는가. 그곳에서 숨겨놓은 물건을 다시 찾는 일이란, 지옥에서 죄 안 지은 놈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었는데….

발레포르는 순식간에 리아를 들어 올려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추정되는 반짝이는 물건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으악!”

발레포르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에 리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악마 놈이 달려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다시 한번 발레포르의 외침이 리아의 귀를 파고들었다.

“심 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