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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6화 (6/116)

6화. 공주 레오니

왕비에게서 온 편지를 받은 다음 날 레오니는 다시 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이미 결혼은 정해진 일이었다.

지금껏 평생을 아무것도 모른 채 스스로 가두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결혼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까지 남은 날은 단 하루. 결혼을 통보받고 단 며칠 만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아델 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운 레오니는 빌고 또 빌었다.

오늘만은 무사히 넘기게 해 달라고. 제발 오늘 밤만은.

결혼 상대는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이라고 했다.

죽음의 공작.

그를 부르는 호칭은 많고 많았지만, 레오니는 그중 그것이 가장 맘에 들었다. 죽음의 공작이라니.

그녀는 늘 죽음을 동경했지만 죽음 앞에 무너졌다. 무서웠다. 이토록 약한 자신을 원망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몇 번이고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했지만 두려움과 무서움 그리고 그들의 방해 덕분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악녀 에리스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레오니는 저주받은 인생이었다. 이름도 없이 어미에게도 아비에게도 버려진 아이.

그것이 바로 레오니였다.

‘용감해지세요. 공주님 늘 명심하세요. 공주님은 가장 용감한 여인으로 자랄 것이랍니다.’

레오니가 끝도 없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때면 유모는 늘 그런 레오니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결국 유모는 죽었고, 혼자 남은 레오니는 용감해지지 못했다.

늘 나약했고 미련했다. 평생을 두려움에 몸을 떨며 죽음을 동경했다.

왕궁은 그녀에게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같은 곳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아비에게 버려진 아이에게 그 누구도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홀로 버려진 레오니는 오직 유모 한 명과 작은 아델 궁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생활을 했다.

아델 궁을 벗어 날 때는 오직 궁에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레오니는 이제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다.

바로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과의 결혼. 그조차도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 결심이었지만…….

공작이 왜 자신과의 결혼을 승낙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의붓 오라비인 왕과, 왕비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진행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시녀들이 종알대는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공작의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나뿐인 여동생과 결혼을 시킨다는 그 말을.

진정 공작을 위한다면, 왕은 절대 자신과 공작을 결혼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은 궁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그는 왜 이 황당한 결혼을 허락한 것일까?

덜컹덜컹-

그때 레오니의 방 창문이 덜컹거리며 음산한 기운이 레오니의 몸을 휘감았다.

“안 돼, 안 돼. 오늘만은 제발.”

빌고 또 빌었지만, 그녀는 늘 운이 없었다. 그들이 그녀의 마지막 밤을 놓칠 리가 없었다.

레오니는 왕비 제시카의 경고를 떠올리며 손을 들어 올려 입을 틀어막고 이불 속으로 더 깊숙이 숨어들었다.

‘오늘 밤, 또 소리를 지른다면 영원히 궁을 떠날 수 없을 것이에요.’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녀는 기필코 이 성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 성안에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죽음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 앞에서 늘 죄인이었고, 앞으로도 죄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궁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령이었고, 자신은 오늘 밤이 지나면 이 궁을 떠날 수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평생 그녀를 괴롭히는 그들의 존재는 바로 유령이었다.

아델 궁은 악녀 에리스가 살던 궁을 부수고, 그녀의 지하 감옥을 메꾼 후 그 위에 다시 지은 건물이었다.

악녀 에리스에게 희생당한 유령들. 그들은 이미 죽어서 사라져버린 에리스 대신 남겨진 딸 레오니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원망을 쏟아냈다.

한이 사무쳐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아델 궁 안을 떠돌며 사는 유령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악령이 된 불쌍한 영혼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 될 죄를 저지른 어머니 에리스 탓이었을까?

레오니는 어미의 배 속에 있을 적부터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요, 유령을 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시녀들과 궁의 사람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악녀 에리스가 마시고 뿌려댄 그들의 피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주받았을지도 모른다.

에리스와 레오니는 탯줄로 연결이 되어 있었고, 그 모든 저주가 그녀에게로 이어졌을지도….

“레오니. 에리스의 딸. 내 피를 마시고 자란 아이여.”

귓가에 소름이 끼치는 속삭임이 들려올수록 레오니는 더 세게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제발 버텨야 해. 오늘 밤만 지나면 이 무서운 고통도 끝이야.

두려움과 공포는 언제나 레오니의 의지를 꺾고 정신을 지배하며 살기 위한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었다. 비명을 지르는 동안은 그들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만은 견뎌야 한다. 두려움과 공포도 오늘로 끝일 것이다. 단 하루만, 이번 한 번만.

그렇게 레오니는 한숨도 자지 않고 긴 밤을 버텨냈다. 유모가 말한 그 용감함이 처음으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오로지 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녀는 그날 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을 닫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을 버텨냈다.

그 긴긴밤 탓이었을까? 결혼식 당일 레오니의 상태는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아니 최악 그 자체였다.

그녀를 두려워하며 의무적으로 대하는 시녀들이 차갑고 딱딱한 손으로 입혀주는 드레스를 억지로 몸에 끼워 넣고 무거운 왕관과 베일을 뒤집어쓴 레오니의 모습은 유령신부처럼 보였다. 얼굴을 본다면 더 그럴 것이었다.

한숨 자지 못해 퀭하게 패인 두 눈, 잘 먹지 않아 움푹 팬 볼, 볕을 전혀 보지 않아 창백한 피부. 마르고 갈라진 입술.

베일을 쓴 것이 다행이었다.

레오니는 시녀들의 손에 끌려 식장으로 들어갔다. 결혼식은 예상대로 간소하다 못해 아무것도 없는 정도였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참석자는 왕과 왕비, 시종 몇 명과 자신과 결혼을 할 공작, 그리고 공작의 부하 몇 명뿐이었으며 형식도 절차도 무시한 채 주교님의 혼인서약만으로 순식간에 끝이 났다.

레오니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도 자신의 남편이 된 공작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베일 너머로 형태만 얼핏 보았을 뿐이었다.

신랑과 신부가 얼굴도 알지 못한 채 식장에서 처음 만났고 혼인을 했다.

비록 서로의 이익을 위한 애정 없는 결혼이래도, 결혼식은 신성한 것이었다.

***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라이언이 젊은 왕 던컨을 향해 말했다.

“벌써 말인가?”

주교가 혼인서약을 끝내고 막 돌아선 참 이었다.

“벌써 오래 있었습니다. 공주… 아니 아내가 짐을 챙겨 나오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아내. 아내라는 말에 레오니는 움찔했다. 정말 자신이 결혼한 것이었다.

젊은 왕 던컨은 역시나 라이언의 곁에 서 있는 레오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그의 시선은 라이언을 향할 뿐이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던컨이 물었다. 거취는 알고 있어야 했다. 라이언이 씁쓸하게 웃더니 답했다.

“글쎄요. 전하께서 친히 내려주신 성에 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신혼살림으로 그곳이 딱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던컨이 껄껄 웃었다.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그 정도쯤이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얻은 것이 이토록 많을 것인데 이런 작은 도발쯤은 기분 좋게 넘길 수 있었다.

지금 왕국 내에는 젊은 왕 던컨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왕의 너그러움과 인자함 그리고 현명함을 칭송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라이언을 하나뿐인 공주와 맺어 주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역시 왕이라는 이야기가 절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상으로 공작의 오래된 영지를 돌려주고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것도 그를 더더욱 칭송하게 하였다.

보통 귀족이 공주와 결혼을 할 적에는 왕에게 지참금을 내야 한다. 그런데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를 결혼시키면서 지참금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내어줬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왕의 크나큰 배포와 마음 씀씀이에 모두 감복하고 있었다.

사실 젊은 왕 던컨은 그 무엇 하나 아까운 것이 없었다. 성을 내어줬으나 그것은 본래 라이언의 것이었고, 오래되고 관리가 어려워 유지비만 들어가던 쓸모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같이 하사한 금은보화는 라이언이 이뤄낸 전쟁의 승리로 인해 얻은 재물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많은 보물을 내어준다 해도 얻을 수 없는 백성들의 신임까지 얻었으니 얼마나 현명한 처사였는가 말이다.

거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거슬리기만 했던 레오니를 공작에게 보내 버렸으니, 그것이 가장 큰 수익이었다.

이번 결혼을 통해 던컨은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레오니의 남편이 되어 버렸으니 라이언이 왕좌를 위협할 일도 아주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악녀 에리스의 사위. 이제 라이언은 레오니의 남편이기 이전에 악녀 에리스의 사위가 된 셈이었다.

“부인, 가서 짐을 챙기시오.”

부인? 갑작스러운 말에 레오니는 얼어붙었다. 움찔하는 것이 티가 날 정도였다. 레오니의 상태를 눈치챈 던컨이 시녀들을 향해 손짓하자 시녀들이 달려 나와 레오니의 양옆에 섰다.

“결혼식 날에 신부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지. 공주를 모시고 가서 짐을 챙겨 드려라.”

라이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레오니를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내 생각을 거뒀다. 결혼식은 끝이 났고 이제 더는 상관이 없었다.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소. 긴 여행이 될 것이니 간단하게 짐을 챙기시오. 필요한 물건은 그곳에서도 구할 수 있으니.”

라이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녀들이 레오니를 데리고 나갔다.

끌려가듯 식장을 벗어나는 레오니를 힐끗 쳐다본 라이언이 던컨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3년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성에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던컨이 묻자 라이언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입니다. 앞으로 수년 동안은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3년 이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그래그래, 자네의 뜻을 잘 알겠네. 자네도 이제 왕실의 일원임을 잊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행동을 바로 하시게.”

던컨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라이언은 자신이 던컨의 계략에 빠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왕의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허울뿐인 결혼이야 누구랑 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이 결혼으로 인해 모엘르 검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평생 자신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괴롭히는 모엘르 검. 그 검 하나면 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

3년 뒤면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 모엘르 검을 생각하니 이마의 상처가 다시금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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