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피할 수 없는 결혼
베드포드 성?
왕의 말에 라이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가?’
라이언은 고개를 들고는 왕을 마주 봤다.
“지금 베드포드 성이라고 하셨습니까?”
“맞소. 베드포드 성 말이오. 영지가 주인을 잃고 방치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군. 그렇지 않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던컨은 그 성을 결혼의 미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척 오래되었군요. 베드포드 성에 가 보지 못한지도.”
라이언의 대답을 성에 대한 흥미로 받아들인 던컨이 다시 말했다.
“공주와 결혼을 하면 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성도 자네에게 하사하지.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는 것이 어떻겠소?”
라이언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내가? 그건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15살, 맨발로 그곳에서 도망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전하.”
“그래, 생각이 달라졌는가?”
“전하의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라이언의 거절에 제시카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던컨을 바라보았다.
왕과 왕비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이며 마주쳤다.
“거절. 그래 거절이라?”
던컨이 작게 중얼대더니 라이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베드포드 성을 원하지 않는가?”
“그곳을 떠나 온 지 10여 년이 넘었습니다. 지금 사는 곳이 저에게는 잘 맞습니다.”
“그래그래.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당사자가 싫다는데 밀어붙인다고 능사겠는가.”
빠른 왕의 수긍에 의아했지만, 라이언은 이 불편한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차피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었고, 왕과의 대화도 점점 불쾌해지고 있었다.
라이언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그때, 왕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왕비. 참 아쉽게 되었군. 당신이 직접 결혼 선물까지 준비했는데… 그게 뭐지? 모엘? 모엘르? 검이라 했소?”
라이언의 고개가 황급히 올라갔다.
모엘르 검? 왕비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건 분명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전하, 지금 혹시 모… 모엘르 검이라고 하셨습니까?”
“왜 그러시는가? 이번에는 관심이 좀 생기시는가?”
처음과 다르게 변한 라이언의 표정에 던컨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럼 내가 그대에게 다시 혼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소?”
여유를 부리는 던컨의 말에 라이언은 이를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모엘르 검을 잘 알겠군. 자네 아버지의 검이라 들었는데.”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래도 검을 내어 보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왕은 분명 자신이 그 검을 찾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래? 왕비께서 자네가 공주와 결혼을 한다고 하면 그 검을 결혼 선물로 줄 생각이었거든.”
던컨은 제시카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자신이 던져 놓은 그물에 라이언이 걸려들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웃음이었다.
“검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아니다. 왕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분명 모엘르 검은 왕의 손아귀에 있다.
“송구합니다.”
“그래, 어때? 경의 생각이 좀 바뀌었는가?”
라이언은 이를 악물었다. 모엘르 검. 형식적인 결혼과 모엘르 검을 맞바꾼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결혼을 선택하는 것은.
“하겠습니다.”
“아하, 그러시겠다.”
“네. 그러겠습니다.”
“잘한 결정이군. 왕실의 일원이 된 것을 미리 축하하네.”
왕이 손을 들자 한스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축배를 들고 싶군. 샴페인을 가져오도록.”
한스가 왕의 명령을 듣고 나가자 라이언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결혼하기로 한 이상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베드포드 경. 자네가 나의 매제가 되다니. 이처럼 기쁜 일이 또 있단 말인가?”
“이틀 뒤에 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라이언의 말에 제시카가 먼저 대답을 했다.
“이틀이라고요? 그건 너무 촉박해요.”
“간단하게 혼인서약만 하고 싶습니다.”
라이언이 말하자 던컨과 제시카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차피 치워 버릴 것을 조금 빨리 진행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아니 사실 더 좋았다. 처음부터 크게 식을 올릴 예정도 아니었으니 간단하게 혼인서약만 하는 것쯤이야 이쪽에서도 바라는 바였다.
라이언의 지위를 생각해 형식적이나마 식을 치르려고 했을 뿐이었으니.
“자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이틀 뒤 간단히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모엘르 검은 그날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아, 모엘르 검 말인가?”
“네.”
라이언이 관심도 없는 결혼을 하는 이유는 단지 그 검이 다였다. 결혼 따윈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모엘르 검을 얻는다면야 이런 부수적인 일쯤은 견딜 수 있었다.
“내가 언제 그 검을 그대에게 바로 주겠다고 한 적이 있소?”
“그게 무슨?”
라이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던컨을 향해 박혀 들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던컨은 그 상황이 꽤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모엘르 검은 그대와 공주의 결혼이 3년째 되는 날, 내 직접 그대에게 하사하리다.”
왕은 생각보다 철저했다. 라이언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3년. 왕은 지금 자신을 3년 동안 지켜보겠다고 했다.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믿고야 싶지.”
3년? 라이언은 생각했다. 어차피 모엘르 검이 왕의 손아귀에 있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 손에 넣을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왕이 한번 말을 내뱉은 이상 3년이 지나기 전에는 검을 받을 방법은 없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네. 암, 알고말고.”
그때 한스가 샴페인을 가지고 도착했다. 던컨은 손수 병을 들어 라이언의 잔에 샴페인을 채워 주었다.
“들지. 축하해야 하지 않겠나.”
라이언은 조용히 잔을 집어 들었다.
“참. 공주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는가?”
라이언은 지금 왕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충 감이 왔다. 미친 공주라고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녀가 미쳤든, 제정신이든, 추녀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저 모엘르 검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없습니다.”
라이언의 입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군.”
왕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감추지를 못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공주 레오니의 운명이 결정되고야 말았다.
***
“대장. 대장?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러니까 그 결혼을 진짜 하시는 겁니까?”
기사 마이클 로밴이 왕을 만나고 막 돌아오는 라이언을 잡고 늘어졌다.
“대장. 왕이 뭐랍니까? 소문이 진짜랍디까?”
이번엔 제레미 버클루가 물었다. 소문을 들은 여러 명의 기사가 라이언의 방 앞에 모여들어 있었다. 질문은 제레미가 던졌지만, 모두 라이언을 주목하고 있었다.
공주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온 성안에 파다했다. 더군다나 아침부터 왕을 만나러 간 라이언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소문이 맞는 것일까?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라이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틀 뒤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다.”
단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럼 정말 결혼을 한다는 겁니까?”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공주라면서 그건 정말입니까?”
라이언이 손을 들어 올려 미간을 문질렀다. 사실 그건 라이언 자신도 궁금한 질문이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이언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라이언이 사라지고 난 뒤 한참 동안 단원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장이 결혼한다?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가 결혼이라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
성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낡은 저택. 평상시에는 어둠으로 가득한 그곳에 오랜만에 다시 등불이 켜졌다.
음산함이 가득한 저택의 2층 맨 끝 방에는 엘리시아의 하나뿐인 공주 레오니가 머물고 있었다.
파티를 피해 언제나 그랬듯이 성을 벗어난 것까지는 좋았다. 단 며칠 밤이라도 마음 편히 잘 수 있었으니….
성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레오니는 늘 성 밖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했다. 늘 행해졌던 관습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행사가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레오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자신이 왕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었다.
레오니는 이상하게도 왕궁 밖으로 나오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곳, 왕궁 안에는 레오니를 괴롭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한시도 편치 않은 삶이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동안은 기나긴 전쟁 탓에 성안에서 파티가 열리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레오니가 성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레오니에게는 이번 외출이 아주 오랜만에 가져보는 작은 평화였다.
성을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 작은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왕국을 위해서 결혼을 하세요. 부탁이에요.’
레오니는 벌써 몇 시간째 같은 생각 중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왕비의 부탁을.
‘결혼? 내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왕국을 위해서?’
어두운 방 침대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레오니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진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어 대고 있었다.
자신에게 관심이 전혀 없을 줄 알았던 왕과 왕비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죽고 싶어.”
레오니의 입에서 습관처럼 또 죽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놀란 레오니가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고는 겁에 질린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휴….”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곳은 왕궁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달려들 유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레오니는 다시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쩌지?’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결혼하면 왕궁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끔찍한 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성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문득 레오니는 자신의 고민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과 왕비가 이야기를 꺼낸 이상 자신이 좋든 싫든 결국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될 것이었다.
부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명령이었다.
“공주님? 공주님?”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레오니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자, 시녀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주님. 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 성으로 돌아오라는 서신입니다.”
‘내일? 무엇 때문에?’
레오니는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파티가 끝나고 귀족들이 모두 나가기까지는 수일이 걸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벌써 자신을 들어오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
시녀가 문 근처에 놓인 테이블에 편지 한 통을 올려놓았다.
“왕비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읽어 보시면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물론 레오니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레오니는 지친 몸을 애써 일으켰다.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 몸이 작은 동작에도 휘청댔다. 등 뒤로 손질이 되지 않아 엉킨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느린 걸음으로 탁자 앞으로 다가간 레오니는 왕비가 보냈다는 편지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틀 뒤 결혼]
종이에 쓰인 말은 매우 간단했다. 자신이 이틀 뒤에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승낙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그 순간부터 그녀는 꼭 결혼해야 할 존재가 되어버렸고 신랑이 누구인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제시카 왕비의 말이 다시 레오니의 귓가에 맴돌았다.
‘결혼만 하면 이 성을 떠날 수 있어요.’
그것은 너무도 무섭고 달콤한 유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