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왕의 제안
불면증은 여전했다. 라이언은 늦은 새벽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른 아침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라이언의 기상을 귀신같이 알아챈 시종 존이 말했다.
“주인님. 성이 소란스러우시죠? 말도 마세요. 주인님을 보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지….”
“존.”
“네네, 주인님. 여기 세수부터 하세요.”
존이 탁자에 세숫물을 올려놓고 섰다.
“주인님. 지금 궁 안에 말이에요. 전국에 귀족 처녀란 처녀는 몽땅 다 모인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성문 앞은 또 얼마나 붐비는지. 말로 설명이 다 안 될 정도라니까요.”
라이언은 아침부터 수다스러운 존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런 주인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존은 여전히 밖의 상황을 중계하며 세수를 하고 일어서는 라이언의 얼굴 위로 재빠르게 수건을 가져다 댔다.
“아침 식사는 어디서 할까요?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식당에서 하시겠어요? 이왕이면 식당으로 나가셔서 사람들도 만나보시고….”
라이언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손을 들어 올렸다.
“존, 그만.”
“네?”
“네놈 잔소리 덕분에 귀가 다 아플 지경이다.”
“아이고 주인님 죄송합니다. 제가 오랜만에 너무 신이 나서….”
존은 공작 작위와 함께 따라온 시종이었다. 작위도, 시종도 모두 라이언에게는 의미 없는 것이었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똘똘 뭉친 존을 내칠 수는 없었다.
“대장, 대장.”
그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존이 재빠르게 달려가 문을 열었다. 대장을 불러대며 문을 두드린 것은 마이클이었다.
“마이클 로밴님.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무슨 일이십니까?”
존은 일찍부터 찾아온 마이클이 맘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장이라니? 주인님께 대장이라는 저급한 호칭이 가당키나 한 것이냔 말이다.
“존, 그만.”
라이언의 말에 존이 투덜거리며 물러섰다.
“대장. 그게 사실입니까?”
별다른 설명도 없이 마이클이 다급하게 물었다.
“뭘 말씀이십니까?”
라이언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시종 존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마이클이 기다렸다는 듯이 존을 잡고 늘어졌다.
“설마! 존은 아직 못 들었나? 대장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온 궁 안에 쫙 퍼졌다네.”
“겨… 결혼이요? 주인님이 말씀입니까?”
마이클의 말에 존이 놀라 외치며 라이언을 쳐다봤다. 마이클과 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이언이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결혼을 한단 말인가?”
“네, 대장이 결혼한답니다. 밖을 나가보세요. 지금 궁 안에 모든 사람이 대장 결혼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아니, 우리 몰래 또 언제 그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다들 지금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랑 결혼한다든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마이클의 모습에 라이언이 조금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결혼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진짜 아닙니까? 공주라던데요. 공주.”
“공주?”
“공주요?”
라이언과 존이 동시에 말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문 쪽으로 돌아갔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존이 가장 먼저 몸을 움직였다. 문을 열자, 앞에는 왕의 시종 한스가 서 있었다.
“아. 베드포드 공작님. 마침 일어나 계셨군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한스가 존의 등 뒤로 보이는 라이언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존이 그런 한스를 가로막고 물었다.
“누구?”
“베드포드 공작님의 시종 존 스미스입니다.”
“아하. 저는 전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한스라고 불러주세요.”
“전하의 명이라고 하시면?”
놀란 존이 라이언을 돌아봤다.
“존, 그만.”
라이언이 존을 향해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공작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스가 처음보다 더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지금 나를 찾으신단 말인가?”
“네, 공작님. 전하께서 벌써 한참 전부터 공작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한참 전부터 날 기다리고 계신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그래. 알겠네. 전하를 기다리게 할 수야 없지.”
“그럼 전하께 곧 공작님이 도착하실 예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라이언이 한스를 불렀다.
“한스.”
“네?”
“이 성에 공주가 있나?”
공주. 그래, 공주가 문제였다. 갑자기 들려온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결혼 소식과 그 결혼 상대가 공주라는 소문.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왕의 시종. 모든 것이 이상했다.
라이언의 질문에 한스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을 했다.
“그… 답은 전하께서 주실 것입니다. 소인이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전하가 주실 것이다….”
한스는 라이언의 말에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이내 마이클이 라이언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대장. 이러다 진짜 결혼하는 거 아닙니까? 공주랑?”
라이언은 말이 없었다.
“그 소문 모르십니까?”
말없이 서 있는 라이언을 향해 마이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문?”
“엘리시아 왕국에 하나뿐인 공주 말입니다.”
“공주가 진짜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들어봤던 것도 같았다. 너무 오래전에 흘려들었던 이야기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라이언의 질문에 마이클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근데 그 공주가 말이죠. 미쳤답니다. 미친 공주래요.”
옆에서 가만히 듣던 시종 존이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미친 공주요?”
“쉿! 그래 존, 미친 공주라네.”
“공주면 공주지 미친 공주는 또 뭐랍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은가. 그래서 들은 이야기도 많지. 듣자 하니 이 왕국에 공주가 한 명 있다더군.”
마이클이 존을 향해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돌아봤다. 라이언이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확실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러니까 그 공주가 있기는 한데 미쳤답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라서 사람들 앞에 내보일 수가 없을 정도랍니다.”
라이언에게서는 별다른 답이 없었다.
“결혼하실 겁니까? 미친 공주랑?”
“그건 전하를 만나봐야 알게 되겠지.”
마이클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 대장.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공주래도 미친 여자랑 결혼할 수야 없죠. 상태가 영 아니라던데요.”
“존.”
라이언이 대답 대신 존을 불렀다.
“네, 주인님.”
“옷을 가져오게. 왕을 뵈러 가야겠다.”
라이언은 문득 궁금해졌다. 미친 공주? 진정 왕은 나를 결혼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
“전하. 베드포드 공작 들었사옵니다.”
시종 한스가 말했다.
“그래? 들어오라 하게.”
라이언은 한스의 안내에 따라 왕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소. 공작.”
“네. 전하.”
젊은 왕 던컨이 눈짓하자 한스가 라이언을 한쪽에 놓인 소파로 안내했다.
“전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앉게.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야기가 길어진다? 라이언은 왕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시종의 안내대로 자리에 앉자 곧바로 다과상이 나왔다. 지금 한가하게 차나 마시자는 이야기인가? 라이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왜? 바쁜가? 파티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바쁜 일이 무엇인가.”
라이언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던컨이 웃으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한스.”
라이언의 질문에 던컨은 시종을 불렀다. 왕의 작고 날쌘 시종 한스가 순식간에 앞에 와 섰다.
“네. 전하.”
“왕비를 모셔오게.”
왕비? 라이언의 시선이 던컨을 향했다. 라이언의 시선을 눈치챈 던컨이 웃으며 말했다.
“아, 자네와 왕비, 그리고 내가 함께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네.”
던컨이 다시 눈짓하자 한스가 재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라이언은 궁금했지만 기다렸다. 왕이 왕비와 함께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정말 소문이 맞는 것인가.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 일이었다.
다시 문이 열리고 왕비 제시카가 한스를 앞세워 들어왔다.
“왕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라이언이 일어나 인사를 하자 제시카가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앉으세요. 제가 좀 늦었네요.”
왕비가 왕의 옆에 가서 앉자, 라이언도 다시 자리에 앉으며 왕과 왕비를 살폈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표정. 둘은 분명 자신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럼 베드포드 경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겠소.”
“네, 전하.”
젊은 왕 던컨이 왕비 제시카를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라이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과인이 경께 제안을 하나 하려 한다네.”
제안?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도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왕궁에는 공주가 한 명 있지.”
공주라. 그럼 마이클이 말한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라이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던컨의 말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올해 17살이나 되었지. 그 아이가. 그 정도면 혼기가 꽉 찬 나이가 아닌가?”
왕이 라이언을 향해 던진 질문에 왕비가 웃으며 답을 했다.
“그럼요. 혼기가 꽉 차다마다요. 저는 전하와 16살에 결혼을 한 걸요.”
라이언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자네가 올해로 27살이 되었다지?”
라이언은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오늘 자네를 불렀다네. 자네와 공주의 혼사를 추진하기 위해서 말일세.”
역시 소문대로였다. 공주와 결혼이라. 라이언은 갑자기 흥미로워졌다.
“공주님과 저의 혼사를 말입니까?”
“그렇다네. 레오니는 아, 그 아이의 이름이 레오니라네.”
사설이 길어지는 왕의 말을 왕비 제시카가 받아들었다.
“공작께도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공주와의 결혼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주 많을 거예요.”
얻게 되는 것이 많다? 미친 공주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많은 것을 주겠다는 말인가?
왕이 얻을 것이 많다는 왕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경이 동의를 한다면 이달 말쯤 결혼식을 올릴까 하는데.”
이달 말? 라이언은 천덕꾸러기일 것이 뻔한 공주를 자신에게 빨리 치워 버리려는 저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미친 공주를 치워 버리고 나까지 경계하겠다는 것인가? 갑자기 이 상황이 매우 지겨워졌다.
라이언도 알고 있었다. 왕국 내에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들이 많다는 것을. 그 인기가 왕보다 높다는 사실도. 그러나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속박하려 드는 왕과 왕비를 향해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싸움꾼일 뿐입니다.”
“관심이 없다? 그래, 그렇겠지. 다들 처음엔 그런 말을 하더군.”
던컨의 말에 라이언이 다시 말했다.
“저는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좋은 남편이 될 자신도 없습니다.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님께는 저 말고 다른 상대를 찾아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자신은 정말 결혼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관심이 없을 예정이었다. 결혼이란 것 자체를 할 생각이 없었다.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오늘 일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라이언이 그만 나가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때 라이언의 귀로 던컨의 말이 날아들었다.
“경. 경은 혹시 베드포드 성이 내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