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베드포드 공작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 그는 지금 우리 엘리시아 왕국의 가장 큰 영웅이에요.”
“그런데?”
던컨은 제시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제시카는 생각했다. 이래서 남자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이 필요한 법이라고.
“공작의 입지가 커질수록 전하의 입지는 줄어들 수도 있다는 말이죠. 앞으로 전쟁은 또 일어날 것이에요. 우리는 다시 공작의 도움이 필요하겠죠. 지금도 전하보다 공작의 인기가 더 높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할 것이에요. 백성들이 전하보다 베드포드 공작을 더 믿고 따르고 있어요.”
제시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쟁이 종식된 배경에는 라이언의 활약이 있었고, 백성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숭배했다. 엘리시아의 아이들에게 라이언은 영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이언이 전하께 조금의 충심이 있다는 것이에요.”
던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뼛속까지 전사인 그는 선왕인 벨로트에 충성을 맹세했고 그 맹세는 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베드포드 공작과 공주를 결혼시키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걱정이 모두 해결되는 셈이죠.”
“공작이 레오니와 결혼하려 할까?”
벌써 던컨은 제시카의 말에 반쯤 넘어와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은 15년 가까이 변방으로만 돌며 전쟁에 앞장선 사람이에요. 왕실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할뿐더러 안다 해도 레오니 공주의 정확한 상태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사실 공주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아요.”
에리스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악녀 이야기의 주인공이 레오니 공주의 어미 에리스라는 것을 아는 백성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공작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들었어요. 공작의 나이 이제 27살이에요. 결혼을 했어도 몇 번은 했을 나이이죠. 형식적인 결혼으로 포장한다면 상대가 누구든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뻔해요. 거기에 전하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보답으로 하나뿐인 여동생을 내어주려고 한다고 하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에요.”
제시카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던컨은 그래도 의문이 생겼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데 결혼을 하겠다고 한단 말이오?”
제시카는 벌써 거기까지 생각해 두었다는 듯 바로 던컨의 말을 받았다.
“거절하지 못하게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거죠.”
“매력적인 조건?”
“그는 베드포드 공작이지만 베드포드 성의 주인은 아니에요. 그의 선친이 막대한 노름빚을 갚느라 성을 경매에 넘겼고, 그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급할 귀족은 아무도 없었죠. 그래서 결국엔 전하께 귀속되었잖아요.”
던컨은 이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이마를 탁하고 쳤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모엘르 검을 찾고 있다고 해요.”
“모엘르 검?”
“네, 베드포드 가에 내려오는 성스러운 검이에요.”
던컨은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제시카는 요정처럼 입꼬리를 휘며 미소를 지었다.
“그 검이 어디 있는지 제가 알고 있어요.”
“그 검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바로 제 친정에 있답니다. 선대 베드포드 공작께서 죽기 전 저희 아버지께 찾아와 그 검을 담보로 돈을 빌리셨다 들었어요. 검이 아니래도 빌려드렸겠지만 선대 베드포드 공작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나 봐요. 극구 검을 담보로 맡기셨대요. 물론 그 사실은 저희 아버지와 선대공작 둘만의 비밀이지요.”
결국, 선대 베드포드 공작은 그 검을 찾지 못하고 죽고 말았고, 검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젊은 왕 던컨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꺼림칙한 레오니를 치워 버리면서 베드포드 공작까지 혈연으로 묶을 기회.
레오니와 결혼을 하는 조건으로 모엘르 검과 베드포드 성을 하사겠다고 하면 그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비명이 멈췄다.
***
왕에게서 다섯 번째 서신이 도착한 날. 라이언은 기사단을 이끌고 정든 땅 마온을 떠나 왕궁으로 향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귀환이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수고했소. 그대 덕에 우리 엘리시아 왕국이 평온할 수 있었군.”
젊은 왕 던컨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는 검은 사자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이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역시나 라이언이 할 만한 대답이었다.
“듣자 하니 축하 파티를 거절했다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도착한 것도 그 때문인가?”
사실 왕국에서는 검은 사자단의 도착에 맞춰 성대한 환영행사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거절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피하려고 일부러 예정된 날보다 빨리,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조용히 궁에 도착했다.
“전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파티는 필요 없습니다.”
어찌 보면 불손한 태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라이언이었다. 엘리시아 왕국을 승리로 이끌고 지켜낸 전쟁의 영웅이었다.
던컨은 그런 라이언의 태도에 기분이 몹시 상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남아 있기에.
“그래, 경이 파티를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오늘은 늦었으니 돌아가 보게. 숙소를 준비했으니 궁에서 며칠 푹 쉬다 가시오.”
“아닙니다. 전하를 뵈었으니 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허. 이거 너무하는군. 경의 성격이야 내 익히 알고 있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어찌 자신만 생각한단 말인가?”
던컨의 핀잔에 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이 고개를 들자 던컨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지금껏 몇 번이나 라이언의 흉터를 보았지만, 아직도 정면으로 마주치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베드포드 공작. 본인 생각만 하지 말고 같이 고생한 병사들을 생각하게. 다들 전장에서 제대로 된 밥 한 끼 못 먹으며 나라를 위해 몸 바쳐 고생했는데 그 정도 배려도 못 하는가?”
라이언은 왕의 말에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검은 사자단을 바라보았다. 모두 라이언의 눈빛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보게. 다들 자네 눈치만 보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자리에서 파티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네 혼자뿐인 것 같네.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3일 동안 축하 파티를 열 터이니 그렇게 알고 있게.”
3일 동안 열리는 환영파티라. 라이언은 파티라면 질색이었다. 시끄럽게 꺅꺅거리는 여자들. 짙은 향수 냄새.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단원들은 파티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빛을 피하는 꼴이 말은 못 해도 머물렀으면 하는 눈치였다.
“네. 전하.”
라이언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혼자 몸이라면 바로 돌아갔겠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고생한 단원들을 생각하면 3일 정도야 어찌어찌 참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돌아서 나가는 라이언을 보는 던컨의 표정이 묘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왕비의 말처럼 그것들이 베드포드 공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공작이 있는 동안 레오니가 또 폭주하지 말아야 할 텐데.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이른 새벽부터 성안은 설렘과 흥분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드디어 검은 사자 단이 지난밤 도착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엘리시아 왕국의 수도 르셀로 모여들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라이언의 머리카락이라도 볼 수 있다면 가문의 영광이라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하다못해 베드포드 공작은 무리일지라도 검은 사자단의 뒷모습이라도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성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궁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귀족들로 북적였다.
전설 속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 그의 모든 것은 미스터리였다. 인생의 반을 전 세계를 돌며 보낸 라이언에 대해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현상금 사냥꾼이라 불리었던 남자.
전 세계를 돌며 긁어모은 황금으로 산을 쌓고도 남을 정도라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 자자했다.
어쩌면 왕보다 부자일 것이라는 추측. 그런 소문은 쉬쉬할수록 더 멀리 퍼졌다.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공작의 눈에 띌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귀족 처녀들이 궁으로 몰려들었다. 심지어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어난 10대 초반의 딸들을 데리고 온 귀족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있었다. 그 진귀한 구경거리는 바로 라이언의 이마에 자리한 흉터였다.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하는 흉터에 관한 이야기는 귀족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였다.
도대체 얼마나 흉측하기에 기절하는 사람까지 있다는 것일까? 라이언의 위용도 위용이지만 흉터를 한 번 보기 위해 온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는 감히 라이언의 흉터를 두고 내기를 건 사람도 있었다. 흉터를 10초 이상 마주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그 내기의 주된 내용이었다.
수많은 귀족 처녀들은 생각했다.
베드포드 공작과 결혼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 흉터는 견뎌낼 수 있어!
라이언이 안다면 파티고 뭐고 당장 뒤돌아 가 버릴 소식이었다.
젊은 왕 던컨과 왕비 제시카는 이른 아침부터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밤 레오니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공작을 부르세요.”
“지금 말이오?”
“네 지금 당장이요. 한시라도 빨리 결정해서 소문을 내는 게 좋겠어요. 오늘 밤 파티에서 공작과 공주의 혼인을 발표하는 거예요. 벌써 궁 안에 내로라하는 수다쟁이들 귀에 공주와 베드포드 공작이 혼인한다는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도록 손을 써 놓았어요.”
꺼림칙한 레오니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베드포드 공작이 딴소리하지 못하도록 소문을 내야 한다. 결혼한다는 소식이 온 왕궁에 퍼지고 나아가 백성들 사이에도 돌게 되면 후회하더라도 무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다만, 왕이 베드포드 공작을 아끼는 마음에 공주와 혼인을 시켜 가까이 두고 싶어 한다고 여길 것이다. 모두 왕의 너그러움과 현명함을 칭찬할 것이었다.
“모엘르 검은 도착했소?”
“네. 지난밤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왕은 왕비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재촉에 제시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공작에게 모엘르 검을 바로 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검을 바로 주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의문이 섞인 왕의 물음에 왕비가 답했다.
“공작이 공주의 정체를 알고 변심을 할까 봐 그래요. 원하는 모든 것을 받고 난 후에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가 없잖아요. 그때 후회하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옳아요.”
“흠.”
던컨이 제시카의 생각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모엘르 검을 보여주기만 해요. 대신 조건을 거는 거죠. 결혼생활을 제대로 지속했을 때 검을 넘기겠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었다. 검을 받고 난 이후에 공주가 정상인이 아니라며 혼인을 취소하겠다고 한다면 공주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물론이요, 검을 회수할 방법도 없었다.
“공작이 받아들이겠소?”
“그럼요. 당연하죠. 제가 알아본 바로는 공작이 모엘르 검을 찾기 위해 해마다, 상당한 황금을 뿌려대고 있다고 해요.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 아니겠어요? 확신할 수 있답니다. 공작은 분명 검을 원하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말이죠.”
공작은 검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던컨은 이제 레오니가 걱정이었다.
“레오니는? 그 아이가 이 결혼을 하겠다고 할까?”
제시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어요.”
말은 안 해도 공주는 다 알고 있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그녀를 설득시키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지겹고도 무서운 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만 하면 무조건 승낙할 것이다. 뭐 약간의 회유와 더불어 작은 협박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시카는 그렇게 믿었다.
남편인 던컨은 생각보다 마음이 모질지 못했다. 자신이었다면 선왕이 죽자마자 바로 레오니를 처리했을 것이었다.
그냥 동생도 아닌 의붓동생이었고, 그 어미는 원수나 다름없는 악녀 에리스였다.
그렇지만 던컨은 그러지 못했다. 그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달랐다. 꺼림칙한 모든 것은 치워 버려야 한다. 그녀만 사라지면 왕궁은 완벽해질 것이다.
“공주에게는 제가 이야기하지요. 전하는 아무런 걱정을 마세요. 3일 뒤면 그 지겨운 비명도 끝이에요.”
“오늘 밤 파티에 공주를 부를 생각이오?”
파티에 공주를 부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부른다고 올 공주도 아니었다. 역시 던컨은 하나는 알고 다른 하나는 알지 못했다.
“전하. 공주는 지금 왕궁에 없답니다.”
“공주가 왕궁에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어젯밤에는 다행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지만, 앞으로 3일 동안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요.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요.”
“그래서?”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푹 쉬다 올 수 있도록 멀지 않은 곳에 요양을 보냈어요. 결혼식 당일 돌아오는 일정으로요.”
던컨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 궁궐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레오니를 내보내는 것은 늘 행해왔던 일이었다.
레오니는 언제나 건강이 좋지 않은 공주였고, 귀족들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레오니와 베드포드 공작을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지금은 더 조심해야 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