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악녀 에리스의 딸
에리스는 자신이 임신한 아이가 사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고 그 아이를 기필코 엘리시아의 왕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런 에리스에게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둘째를 임신한 왕비 앤과 왕국의 하나뿐인 왕자 던컨은 아주 거슬리고 치워 버리고 싶은 큰 걸림돌이었다.
몇 번이나 벨로트를 떠보았지만, 그는 그런 에리스의 말을 임신한 여자의 투정쯤으로 여겼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 후계를 확실히 할 심산이었던지 던컨에게 서둘러 태자의 직위를 내려주었다.
후계자를 정한 것이었다.
던컨이 엘리시아 왕국의 정식 후계자로 공표된 날 에리스의 궁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에리스의 광분으로 시녀 몇이 죽어 나간 것은 물론이요, 닥치는 대로 던지고 부숴버려 남아나는 집기가 없을 정도였다. 때마침 눈이 띈 아무 죄 없는 시녀를 칼로 찔러 죽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뭐야? 사람이란 이렇게 약한 존재인걸. 던컨과 앤도 죽여 버리면 되잖아. 그럼 되는 거잖아.’
에리스는 라페스타에서 가져온 작은 약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나라의 패망이 결정된 순간 라페스타 왕가의 직계가족에게 내려온 독약. 왕족의 품위를 훼손하며 죽을 수 없기에 잠든 듯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조된 약이었다.
에리스는 충복 얀을 시켜 던컨과 앤의 음식에 독약을 섞었다. 모든 일이 그녀의 뜻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마지막 수는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에리스의 시녀 중 하나가 뒤늦게 에리스와 얀의 속삭임을 알아채고 죽을 각오로 왕에게 사실을 알렸으나 그때 이미 앤은 독이든 음식을 먹은 이후였다. 다행히 던컨은 음식을 먹기 전에 구해낼 수 있었다.
먹으면 12시간 이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독약.
에리스는 증인이 있음에도 절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그녀의 방 안에서 조금 남아있는 독약 병이 발견되었다.
그건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이 의심받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에리스가 약병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상한 자신감과 오만 덕분에 쉽게 그녀의 죄를 입증할 수 있었다.
더불어 피로 얼룩진 그녀의 지하 감옥도 발견되었다. 에리스에 대하여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시녀들의 고발로 궁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에리스가 무서워 쉬쉬하던 시녀들도 알고 있던 사실을 털어놓는 바람에 그녀의 악행들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녀의 충복 얀이 모두 자신이 꾸민 짓이라고 자백했지만, 지하 감옥에 남아있던 어린 처녀들의 증언으로 에리스는 잡혀 들었다.
결국, 앤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치료 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벨로트는 에리스를 믿고 싶었다. 12시간 안에 앤이 죽지 않으면 그녀의 말은 진실이다. 그런 벨로트의 간절한 바람에도 결국 앤은 죽고 말았다.
앤은 죽음 직전 이미 만삭이었던 아이를 힘겹게 출산했지만, 그 아이도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은 채로 태어났다.
죽은 아이는 딸이었다. 그녀야말로 엘리시아 왕국의 진정한 공주가 될 운명이었던 아이였다.
앤은 자신이 출산한 아이가 사산된 것도 알지 못한 채 벨로트의 품 안에서 잠든 듯 고요히 죽음을 맞이했다.
모든 신하가 에리스의 사형을 촉구했다.
벨로트도 드디어 에리스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는 희대의 악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악마.
에리스의 죄를 몽땅 뒤집어쓰려 했던 얀은 그토록 사랑했던 에리스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에리스보다 먼저 처형이 집행되었다.
사지가 절단되고 눈과 혀가 뽑혀나간 채 목이 잘렸고, 시체는 성 밖에 일주일간 걸어두어 까마귀밥이 되게 하였다.
에리스에게는 배 속에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짧은 유예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까지도 에리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태어날 아기가 아들이면 자신은 살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에리스는 깜깜한 지하 감옥에 갇혀 반은 미친 상태로 배를 쓰다듬으며 밤낮없이 말했다.
“아가 너는 아들로 태어나야 해.”
“아가 네가 이 어미를 살려 줘야 해.”
그런 에리스의 염원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에리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딸임을 확인한 순간 완전히 미쳐버렸다. 자기 손으로 아기를 목 졸라 죽이려 했지만, 다행히도 그 직전에 아기는 구해졌다.
출산한 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에리스는 교수형에 처했다.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너무 약한 처사였다. 물론 마지막까지 벨로트는 만나지 못했다.
벨로트는 에리스에게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지만 제 어미와 꼭 닮은 빨간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분명 황금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엘리시아 왕국에서 오직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만이 타고난다는 황금색 눈동자.
아이의 눈동자를 확인하던 날,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비와 딸이 그토록 가까이에서 마주한 것이 말이다.
그 후 벨로트는 평생 레오니를 찾지 않았다.
레오니를 생각하면 추악한 에리스와 불쌍한 앤이 함께 떠올랐다. 벨로트는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 찬 가슴을 치며 남은 세월을 보냈고, 종국에는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미안하오. 앤’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아비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레오니라는 이름은 그런 아이를 가엽게 여긴 유모가 지어 준 것이었다.
아이의 아비는 아이가 어떤 이름을 가지느냐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출생을 기록하여 주는 것만으로도 큰 선처라 생각했다. 유모는 어미가 죄가 있다고 하여 아이까지 미움받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라 여겼기 때문에 종종 딸을 찾지 않는 왕을 원망하고는 했다.
어린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모든 것은 어른들이 저지른 일이었고 아이는 그중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궁궐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는 아이를 미워했다. 미워했다기보다는 무서워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배 속에서부터 죄 없는 처녀의 피로 태교를 한 아이. 아비에게 버림받은 아이. 에리스의 딸.
레오니는 그렇게 아델 궁에 혼자 남겨졌다.
***
“레오니를 결혼시키란 말이오?”
에리스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며 던컨은 여전히 떨고 있는 제시카를 향해 되물었다.
레오니가 결혼을 한다? 던컨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레오니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불쌍한 아이였다. 레오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레오니를 생각하면 어머니 앤에 대한 그리움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죽어간 어머니. 죽어가면서도 던컨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던 어머니.
던컨에게 그날의 기억은 다행히 아니라 지우고 싶은 아픔이었다.
“네. 결혼을 시켜 궁 밖으로 내보내세요. 그 방법이 가장 자연스럽고 좋아요.”
결혼이라. 누가 그런 미친 아이와 결혼을 한단 말인가! 왕실에서 쉬쉬한 탓에 궁궐의 식솔들과 소수의 귀족 이외에는 레오니의 어미 에리스에 대하여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안 될 일이었다.
레오니는 누군가와 결혼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누가 레오니를 부인으로 맞이한단 말이오. 어디 그런 눈먼 사내가 있긴 한 거요?”
여전히 레오니의 비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소? 저렇게 시시때때로 비명을 질러대는 아이를 누구와 결혼시킨단 말이오?”
“전하 저에게 다 생각이 있어요. 제가 레오니 공주와 기꺼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요.”
“도대체 왕비가 이야기하는 그 상대가 누구란 말이오?”
제시카가 던컨의 눈을 바라보며 오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답했다.
“죽음의 사자,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이요.”
***
그 시각 라이언 레놀프 베드포드 공작은 자신이 미친 공주의 결혼 상대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한 채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엘리시아 왕국의 동쪽 끝 국경지대.
이제는 끝나버린 전쟁으로 더는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라이언은 용맹한 전사였다.
그가 크게 한 번 휘두른 칼에 적군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다는, 살아있는 전생의 신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즐기는 라이언을 적군들은 가장 무서워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 아무도 나서는 이 없는 그곳에 자진해 출전한 라이언을 두고 다른 귀족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를 두려워했다.
미친 피의 사자. 죽음의 사자. 그것이 라이언을 칭하는 말이었다.
“이제 오늘부로 이곳 지겨운 국경지대와도 이별이겠죠?”
라이언의 수석 기사 제레미 버클루가 함께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겹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엔 말과는 다르게 서운한 감정이 비쳤다.
이제 전쟁은 끝이 났다. 사실 끝이 난 것은 한참 전이었다. 왕궁에서 복귀하라는 서신이 벌써 몇 차례나 날아들었다. 전쟁은 끝이 났고 평화협약이 체결되었으니 그만 철수하라는 왕의 명령이었다.
전쟁으로 얼룩졌던 이곳 국경지대 작은 마을 마온은 언제 그토록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기라도 했느냐는 듯 평화로웠다. 곳곳에 전쟁이 남긴 상처는 아직 남아있지만, 다시 일어서는 중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이전의 삶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집이 사라지고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그들에 얼굴에 미소만은 남아 새로이 삶을 영위할 발판이 되어주었다.
요즘 들어 라이언이 하는 일이라고는 오늘처럼 산에서 내려와 흉포하게 날뛰는 산짐승을 때려잡는 것뿐이었다.
“그래, 전쟁은 끝이 났다. 이제 이곳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이 난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이 이곳으로 온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왕궁으로 돌아가 전쟁보고를 하고 승리 축하 파티를 열고, 그 모든 것들이 따분하고 지겨웠다.
그렇지만 이제 더는 왕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다. 한 번 더 그랬다가는 자신이 반역자로 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닥타닥-
꺼져가던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는 순간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 라이언의 얼굴이 정확히 비춰 보였다.
균형 잡힌 사지, 180이 훌쩍 넘을 듯한 큰 키. 떡 벌어진 어깨가 남자다웠다. 요즘 궁에서 인기 있다는 얼굴선이 가느다란 꽃미남은 아니지만 굵은 선이 강렬하고 남성미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 잘생긴 얼굴에는 큰 흉이 하나 있었다. 누구라도 라이언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쓰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조각 같은 턱, 남자다운 입과 우뚝 선 코, 밤하늘보다 새카만 눈동자에 홀려 그를 바라보다가도 이마에 그 시선이 닿는 순간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이마에는 어릴 적 다쳤다는 상처의 흉터가 크게 남아있었다.
그 흉터를 두고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5살 때 혼자 산짐승을 잡으려다 다쳤다는 설과 12살 때 전설의 용과 싸우다 용의 꼬리에 베었다는 설이 가장 분분하게 나뉘는 의견이었다.
그 외에는 아예 태어날 때부터 이마에 훈장처럼 흉터가 있었다고 믿는 이가 많았다.
물론 그중 정답은 없었다.
이마 정 중앙에서부터 대각선 모양으로 왼쪽 눈썹 끝부분까지 깊고 길게 패인 상처는 누가 보아도 흉측했다.
제때 치료하지 않아 커질 대로 커진 흉터는 당시에 아픔이 얼마 심했을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가장 큰 문제는 라이언이 그 상처를 감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머리를 길러 늘어트려 놓으면 전혀 보이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라이언은 흡사 그 상처가 자랑이라도 되듯이 머리를 짧게 깎아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다녔다.
사람들은 모두 그 상처를 두려워했다.
흉터를 본 이들은 다시는 라이언의 눈썹 위로는 시선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뒤에서 그의 상처에 대해 수군댔다.
라이언은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흉터에는 귀찮은 사람을 쫓아내는 마력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라며 웃고는 했다.
흉터에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늘 라이언의 곁에서 그를 보위하는 검은 사자단 밖에 없었다.
검은 사자단과 라이언은 라이언이 공작의 작위를 이어받기 이전인 15살 때부터 베드포드 공작이 된 현재까지 10년 이상을 함께 동고동락해온 사이였다.
라이언의 검은 머리와 눈동자 때문에 사람들은 라이언의 부대를 검은 사자단으로 불렀다.
울던 아기도 뚝 그치게 한다는 용맹과 공포의 검은 사자단. 단장은 물론 죽음의 사자라 불리는 라이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