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1화 (1/116)

1화. 비명을 지르는 공주

꺄- 악-

깊은 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엘리시아 왕궁에 난데없이 괴기스러운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성벽에 기대 졸던 비둘기 몇 마리가 시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숲을 향해 푸드덕 날아올랐다.

꺄- 악-

바로 옆에서 질러대는 것처럼 귀를 왕왕 울려대는 비명. 그 찢어질 듯 기분 나쁜 소리에 설 잠을 자던 몇몇 사람들이 깨어났으나, 이내 익숙하다는 듯 귀마개를 찾아 끼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상하기는 왕궁의 밤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 하나 비명에 놀란 이가 없었다. 이 정도 비명이라면 누군가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비병 중 그 누구도 비명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그저 시끄러움에 귀가 아프다는 시늉만 할 뿐.

“또 시작인가? 이번에는 좀 오래 참는가 했더니.”

성문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오랜 침묵을 깨고 동료를 향해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오늘따라 아주 고약하네그려.”

동료 병사 역시 고개를 흔들며 귓구멍을 파냈다.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꺄- 아- 악-

비명은 온 성 구석구석을 향해 퍼져나갔다. 그것은 멀리 왕의 집무실도 포함이었다.

오늘따라 소리가 어찌나 큰지, 소리의 근원지와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집무실 안에도 바로 옆에서 질러대는 것처럼 비명이 마구 귀를 울려댔다.

때마침 부는 밤바람을 타고 퍼지는 소리는 쉽사리 끝나지도 않고 이곳저곳을 돌며 메아리쳤다.

“오늘은 유독 심하군.”

한참을 계속되는 기분 나쁜 소리에, 젊은 왕은 밀린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귀마개를 찾아 끼었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고약했다.

“한스.”

참다못해 왕이 시종을 불렀다. 왕의 부름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고 날쌘 시종 한스가 집무실 탁자 앞으로 달려와 섰다.

“네 전하. 부르셨습니까.”

왕은 손을 들어 올려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돋아나기 시작한 턱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 아이인가?”

그 아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젊은 왕 던컨도 그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물어보는 것뿐이었다. 저 비명의 주인은 분명 그녀였다.

“네 전하. 아델 궁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충직한 시종 한스가 바로 답변을 내놓았다.

“휴….”

젊은 왕 던컨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졌다. 역시나 아델 궁이었다.

꺄-아아아악-

던컨이 한스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비명은 멈출 줄을 모르고 더 고약해졌다. 유난히 길어지는 비명에 애써 잠을 청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뒤척이기 시작했다. 귀마개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 만이지? 이번엔 좀 오래된 것 같은데.”

던컨이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스를 향해 물었다. 지난번 비명을 들은 게 눈이 올 때였으니 정말 한참 만이었다.

“오늘로 딱 3개월째입니다. 전하.”

3개월이라. 이번에는 많이 참았군. 그동안 너무 조용해서 그녀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이런 비명만 질러대지 않는다면 평생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살 수 있는 아이였다.

선왕 벨로트가 죽고 젊은 왕 던컨이 보위에 오른 지 이제 3년. 이제 막 28살이 된 젊은 왕은 여전히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지끈대는 머리를 문질렀다.

그만 끝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의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비명이 30분쯤 계속되었을까? 갑자기 예고도 없이 집무실에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전하.”

던컨의 귀로 울먹이며 떨고 있는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왕비 제시카였다.

“왕비!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러운 왕비의 방문에 놀란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하. 무슨 일이라니요. 제가 이 밤에 왜 잠 못 이루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전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저 비명 때문에 제명에 죽지 못할 거예요.”

던컨의 품 안으로 부서질 듯 가벼운 제시카의 몸이 쓰러지듯 안겨들었다.

“제시카. 나의 왕비.”

꺄-악-

그 와중에도 비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발 전하. 나의 왕이시여. 이 소리를 멈추게 해 주세요.”

제시카의 간절한 목소리가 던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왕비.”

“이대로는 못 살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저와 전하의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제발요.”

제시카가 던컨의 품 안에서 흐느끼며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왕비 제시카는 지금 임신 중이었다. 결혼 7년 만에 생긴 귀한 아기님이었다.

품 안에 안겨 흐느끼는 제시카를 내려다보며 던컨은 고민이 가득했다. 비명 때문에 잠 못 이루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비명을 어찌 멈추게 한단 말인가. 억지로 입을 틀어막아 멈춘다 해도 언제 또 이 사달이 날지 모를 일이었다. 늘 입을 막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니.

“제발요. 전하.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그동안은 참아보려고 노력했어요. 전하도 아시잖아요. 하지만 이제 더는 못 해요. 비명을 우리 아기도 함께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제시카가 귀하디귀한 왕의 씨를 품은 아랫배를 연신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제시카. 억지로 비명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없소. 그건 아무리 왕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던컨은 흐느끼는 제시카를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순간 제시카의 눈빛이 변했다.

“왜 꼭 멈추게 해야 하는 거죠?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면 되잖아요. 레오니 공주도 벌써 17살이에요. 결혼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잖아요.”

제시카의 말에 놀란 던컨이 안고 있던 제시카를 놓으며 물었다.

“결혼?”

레오니가 결혼을? 던컨은 지금 이 고약한 비명을 질러대는 공주 레오니를 떠올렸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전혀 아니었다.

비명의 주인공은 엘리시아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레오니였다. 젊은 왕 던컨과 레오니 공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던컨은 왕비에게 난 적통 자식이요, 레오니는 애인에게 난 사생아라는 점이었다.

레오니는 아주 특이하다 못해 괴기한 아이였다.

사실 던컨도 지금껏 레오니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던컨이 아는 레오니는 늘 겁에 질려 있었으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언제나 아델 궁 안에만 머물렀고 외부와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 그녀를 본 것은 3년 전 선왕이 서거했을 때였다. 던컨은 기억을 더듬어 3년 전 그날, 레오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은 드레스에 검은 베일을 쓰고 나타난 그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깡 마른 몸뿐이었다. 몇 겹의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쓰러질 듯 비틀댔던 마르고 작은 몸. 소매 사이에 살짝 드러났던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베일 뒤로 늘어트린 새빨간 머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그 섬뜩함까지는 가려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우울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넘쳐났으니 말이다.

그런 레오니를 결혼시킨다고? 그 뒤로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빛나는 황금의 나라 엘리시아.

젊은 왕 던컨이 다스리는 이 평화로운 왕국은 바로 축복받은 땅 엘리시아다.

그러나 이 축복받은 땅에도 단 한 명 축복받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엘리시아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레오니였다.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레오니는 아버지 왕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랐다. 아니 버려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레오니의 어미는 레오니를 낳은 그날 목숨을 잃었다. 레오니를 품고 있었기에 그나마 그날까지 살 수 있었다.

레오니의 어머니는 바로 희대의 악녀 에리스였다.

백성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악녀 에리스 이야기가 있다. 그들 중 그 악녀 에리스가 왕국의 공주 레오니의 어미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거의 없지만, 전설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에리스를 만나면 온 세상이 피로 물든다는 무서운 전설.

그 이야기는 왕국의 모든 여자아이를 공포에 떨게 한다. 요즘도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어린 처녀를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

“조심해. 에리스가 잡아간다.”

에리스는 지금은 멸망해버린 나라, 라페스타에서 온 망국의 공주였다.

누구라도 홀리게 하는 빨간 머리에 꿀을 바른 듯 빛이 나는 새하얀 피부. 마주치면 사랑에 빠진다는 하늘보다 더 푸르고 바다보다 더 깊은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 풍만한 가슴, 한 줌이 안 되는 허리. 에리스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에리스는 라페스타에서도 유명했던 악녀였고,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르게 추악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나라도 가문도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의 멸망과 함께 라페스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와 공주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그녀만은 홀로 라페스타를 빠져나왔다. 아비와 어미, 형제자매의 죽음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녀는 곧바로 엘리시아로 숨어들었고 철저한 계획하에 엘리시아의 왕 벨로트를 만났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를 홀리는 데 성공했다.

에리스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벨로트는 순식간에 빠져버렸고 그런 벨로트의 총애를 등에 업은 에리스는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추악한 일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다.

에리스는 언제나 자신의 가장 큰 무기는 아름다운 얼굴과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미모를 유지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그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기 위하여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일을 벌였다.

에리스는 벨로트가 하사한 자신의 궁지하에 비밀 공간을 만들고 어린 처녀들을 남몰래 잡아 들였다. 그녀는 어린 처녀의 싱싱한 피가 젊음과 미모를 유지해 주는 비법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녀가 그 말도 안 되는 끔찍한 비법을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행하였다는 것이다.

언젠가 늙고 볼품없어지면, 벨로트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떠나갈 것이라는 걱정과 초조함에 결국, 에리스는 어린 처녀를 잡아다 가차 없이 목을 잘랐고, 목이 잘린 시체를 천장에 묶어놓은 채로 떨어지는 피를 맞으며 목욕을 즐겼다.

그 모든 일은 라페스타에서부터 에리스를 따라온 충복 얀이 해 주었다. 얀은 에리스의 충복이었으며 첫 남자이자 비밀스러운 애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갑자기 어린 처녀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의심을 피하고자 처음에는 거리에 부랑자나 고아를 위주로 노렸으며 아주 어린 아이도 죽이길 서슴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일은 에리스는 레오니를 임신한 동안에도 처녀의 피로 수시로 목욕을 하고 심지어 직접 마시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에리스는 자신이 빛나는 미모를 유지하고 아들을 낳기만 한다면 왕비 앤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그런 착각을 할 만큼 당시 벨로트는 에리스에게 빠져있었다. 그러나 에리스가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에리스만큼 강렬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벨로트는 왕비 앤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십 년을 친구로 여인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반자의 역할로 늘 온화하고 인자하게 자신을 믿고 지켜주는 앤을 아꼈다.

에리스가 파멸을 맞은 것은 레오니가 태어나기 불과 얼마 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