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무슨 일만 있으면 한데 뭉치는 3대 공작가는 곧장 티그리스 공작저로 향했다. 그 속엔 나와 씨엘도 포함이 되었다.
웨딩드레스조차 벗지 못하고 그곳에 간 나는 마리엘의 방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서성였다.
마리엘의 비명이 벽을 넘어 복도로 울리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록 아이를 낳아 본 적은 없지만, 아이를 받아 봤기에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라피 아가씨,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심이 어떠신지요.”
마리아의 말에 그때야 나는 다급하게 오느라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정장 차림의 씨엘을 보며 다시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신성한 첫날 밤에 외가로 날아왔으니 씨엘이 불만을 토로해도 할 말이 없었다.
“라피, 이번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해.”
“응, 미안, 그리고 어머님께도 미안하고.”
신방으로 들어가야 할 새신부가 제 외가로 신랑을 데리고 가 버렸으니 시어머니 입장에서도 어이가 없었을 게 분명했다.
“으으윽, 아아악!”
폐부를 긁는 비명에 제이든은 안절부절못하며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친 숨만 푹푹 내쉬었다.
절대 몸을 가만두지 않았던 마리엘은 걷기 운동을 비롯해 임산부가 하는 스트레칭도 매일 꾸준히 했다. 순산하기 위해 안 해 본 게 없는 마리엘은 쥐어짜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진통 간격이 줄어들어 그만큼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마리엘에게 직접적으로 뭐가 해 줄 수 없었던 우리는 복도에서 기도를 했다.
마리엘과 아이가 무사하길 바라며 몇 시간을 서성이던 중 순간 신음 섞인 비명이 그쳤다. 그와 동시에 산파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아기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에 다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격려를 했다.
“아들인가, 딸인가?”
할아버지의 물음에 산파는 미소를 지으며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아들입니다.”
그와 동시에 뭔가 섭섭한 표정이 스몄지만, 얼른 지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모는 어떤가?”
“매우 건강하십니다. 한데 마리엘 님께서 고모님을 뵙길 원하십니다.”
아이 아빠인 제이든이 아닌 나를 먼저 보길 원한다는 말에 나는 웨딩드레스를 벗으러 가려다가 멈추고 마리엘의 방으로 들어갔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가 피부에 닿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든 나는 기진맥진해진 채로 숨을 몰아쉬는 마리엘의 곁으로 가기 전에 얼른 몸을 클리어 마법을 써서 깨끗이 했다.
“리엘, 나 왔어. 기분은 어때?”
“고, 고모님…… 흐윽…….”
막 아기를 출산한 마리엘은 내 손을 꼭 붙잡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이럴 땐 친정 어머니가 곁에 있어야 옳았지만, 인연을 끊은 탓에 와 줄 이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서럽게 운 마리엘의 얼굴을 소독한 천으로 닦아 주며 장하다고 말했다.
그런 내게 산파가 아기를 보여 줬다. 마리엘을 닮아서인지 얌전하게 앉긴 아이는 아직 누굴 닮았는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좀 시일이 지나면 얼굴이 제대로 드러날 겁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실베스터 왕국에서 아기를 직접 받아 봤으니까요.”
내 말에 조금 놀란 듯한 산파는 튼튼한 아기를 마리엘에게 안겼다. 젖을 물리라는 뜻이었지만 마리엘은 제 아들을 보고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으흐흑, 말랑 콩떡이 아니라니…….”
“으, 응?”
“말랑 콩떡이 낳으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허으윽.”
평소에도 말랑 콩떡 같은 아이를 낳을 거라면서 할머니한테 내 그림을 빌려 매일 봤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사비나가 그런 것으로 말랑 콩떡이를 낳을 수 있었다면 자신은 진작 성공했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사비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처음 그린 그림을 보며 태교를 했는데 실패하자 다른 의미로 울었다. 그런 마리엘을 다독이며 다음을 기약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벤스와 같은 아들 부자가 될 확률이 있었다. 벤스를 지켜본 결과 다산이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마리엘이나 사비나에게 출산을 강요하지 않았다.
“말랑 콩떡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건강하기만 하면 되지. 이것 봐. 아이의 손가락이랑 발가락이 다 제대로 붙어 있잖아.”
꼬물꼬물 움직이는 아이를 본 마리엘은 울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산파의 도움을 받아 젖을 물렸다.
“아이 이름은 정했어?”
“남자아이면 세라피노라고 지으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한 하늘 아래 라피가 둘이 될 순 없다고 하셔서…… 이사야라고 지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천사를 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엘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몸조리 잘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밤엔 빼고.”
나는 마리엘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마리엘과 이사야는 건강해요.”
내 말에 다들 제이든에게 축하 말을 건넸다.
“제이든, 먼저 아이를 낳아 본 선배로서 말하는데…… 가까운 시일 내로 배 속에 담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에이든의 말에 제이든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진 상태로 마리엘을 보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린 우리끼리 결혼 피로연 겸 이사야 탄생 기념 파티나 열지. 허허허.”
할아버지의 말에 다들 찬성을 했지만, 나는 씨엘의 손을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마리엘이 이사야를 건강하게 출산했으니, 저흰 이만 빠질게요.”
내 말에 이곳에서 파티를 하자고 거듭 말하려던 할아버지의 입을 할머니가 막았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지요. 라피! 새신랑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무나. 손님용 방마다 하객으로 온 분들이 계신데 주인이 전부 집을 비워서야 되겠니.”
최고 권력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곧장 씨엘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좀 전의 뾰로통한 표정이 살짝 누그러진 씨엘과 신방으로 들어갔다.
누구 입김이 들어갔는지 몰라도 너무나 의도가 뻔히 보인다고 해야 하나. 붉은색 캐노피는 숨결만 닿아도 흔들릴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라피, 드레스 벗는 거 도와줄까?”
“어? 아, 그래.”
등에 있는 드레스 단추를 푸는 중에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듯 내 머리에 닿는 씨엘의 숨이 조금은 거칠게 느껴졌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자 마음껏 숨을 쉴 수 있었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몸을 조이는 드레스를 벗어내자 이젠 씨엘이 장신구를 풀어 줬다. 드레스와는 달리 직접 살이 닿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씨엘의 체온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씨엘, 먼저 씻어. 난 잠시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씻을게.”
“어? 으, 응…….”
씨엘을 먼저 욕실로 들여보낸 나는 곧장 망토로 온몸을 가린 후 신방에서 나왔다.
“아가씨? 혹시 벌써 소박 맞은 건…….”
“제니도 참, 그런 실없는 농담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가져올 게 있어서 잠시 나온 것뿐이야.”
앞에서 대기 중인 제니의 농담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곧장 내 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몇 가지를 챙긴 나는 곧장 신방으로 돌아갔다.
“음? 빨리 씻었네.”
“으, 응…….”
이불 속에서 웅크린 씨엘을 본 나도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뿌연 김이 오른 욕실엔 훈기가 느껴졌다. 씨엘이 씻은 후 물도 갈았는지 깨끗한 상태였다.
따끈한 물속에 몸을 담그니 오늘의 피로가 풀리며 축 처졌다. 물떡처럼 늘어진 나는 물속에서 흐느적댔다. 물을 끼얹으며 몸을 씻을 때 욕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라피, 언제 나올 거야? 아직 덜 씻었어? 내가 등 밀어 줄까?”
“어? 아…… 아니, 지금 나갈 거야.”
씨엘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물기를 닦아내고 머리를 최대한 말렸다. 그리곤 가져온 잠옷을 입다가 아까 언니가 주고 간 것을 봤다. 평범해 보이는 환약이었다.
“설마 언니가 나한테 이상한 약을 먹으라고 줬겠어?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거겠지.”
환약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그러자 청량함이 느껴졌다. 물과 함께 환약을 삼킨 나는 밖으로 나갔다.
“음? 언제 옷을 챙겨 입은 거야?”
분명 침대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씨엘은 가운 차림이었다. 한데 씻고 나와 보니 셔츠를 입은 채 책상에 기대어 있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오느라고…….”
미소를 지은 씨엘을 보다가 화장대 앞에 앉아 빗을 들었다. 그러자 씨엘이 자연스럽게 내 손에서 빗을 넘겨받아 머리를 빗겼다.
“라피의 머리카락은 은색 실타래 같아. 달빛에 닿으면 은은하게 빛나서 예뻐.”
습기를 머금은 머리카락 한 줌을 든 씨엘이 살며시 입맞춤을 했다. 거칠게 털어내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정돈되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세 개의 단추를 풀어 가슴을 슬쩍 내비친 씨엘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거, 멱살 잡아 달라고 일부러 셔츠 단추 푼 거야?”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
풀어헤쳐진 앞섶을 잡아당기자 씨엘이 옅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곤 내가 당기는 대로 자연스럽게 끌려왔다. 침대 앞까지 끌고 온 씨엘의 탄탄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라, 라피…….”
얼굴을 붉힌 씨엘의 가슴을 살며시 밀자 자연스럽게 침대에 풀썩- 넘어졌다.
“이런 이런, 우리 씨엘은 참 요망하기도 하지. 아깐 없던 꽃잎이 침대 위에 흩어져 있네.”
밖에 나갈 일이 뭐가 있나 했더니 정원의 꽃을 따서 이곳에 뿌린 듯했다. 이건 또 어디에서 배운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셔츠 단추를 조심히 풀어내자 곧장 단련된 가슴이 훤히 모습을 드러났다. 가슴 단련을 한다더니 만족스러울 만큼 부푼 가슴을 눈에 담기만 했을 뿐인데 씨엘은 연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어떻게 해 줬으면 해?”
씨엘에게 선택권을 줬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린 씨엘이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가, 같이 자고 싶어.”
“손만 잡고?”
“아, 아니!”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은 씨엘은 농염한 황금색 눈동자로 나를 애타게 바라봤다. 이대로 보기만 할 거냐는 듯 붉은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여보…… 어, 언제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건데. 나 너무 긴장되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꽃향기가 스민 손을 뻗어 내 손을 당기더니 제 가슴 위에 올렸다. 숨결만 닿아도 파르르 떨릴 것 같은 갓 피어난 여린 꽃잎처럼 씨엘의 심장이 아릴 정도로 뛰는 게 느껴졌다.
“씨엘,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할 리가 없잖아. 라피, 내 처음을 받아 줘.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매일매일 라피랑 연습해서 늘릴게.”
부끄러워하면서 할 말은 다 하는 씨엘이었다. 그런 씨엘의 심장 위를 손으로 덮자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라, 라피…….”
손만 닿아도 봉숭아 꽃잎처럼 발그레해지는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곤 그의 입술에 바로 내 입술을 겹쳤다.
서로의 향기를 머금은 호흡을 주고받으며 그간 못한 것에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키스를 했다. 보채듯이 내 허리와 등을 어루만지는 씨엘의 손길을 느끼며 입술을 떼어냈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씨엘의 입술을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귓가에 그의 숨결이 섞인 숨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오늘 밤, 각오해.”
모든 것이 처음이라 조금은 서툴더라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지리라.
나는 캐노피를 쳐서 침대 안이 우리에게 유일한 아지트처럼 만들었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가지 못하게 했다. 입을 맞추자 씨엘이 보채듯 몸을 들썩였다.
씨엘의 황금색 눈동자엔 농밀한 사랑이 절절하게 고이다가 흘러넘쳐 베갯잇을 적셨다.
씨엘이 흘리는 눈물이 아까워 그의 눈가에 살짝 입술을 포개 빨아들였다.
“음? 이거 뭐야. 진짜 달다.”
“수인은 사랑을 하면 달곰한 눈물을 흘려서 반려를 유혹한다고 했어. 그래서 어머니랑 아버지가 서로 울리곤 했다고 하셨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눈가에 입맞춤을 했다. 그때마다 씨엘은 잔뜩 쉰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쉼 없이 말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내 품에 안겨 곤히 잠들었다.
씨엘이 원할 때까지 만족시켜 줬다는 것에 안심한 나는 퉁퉁 부은 낭군의 눈가를 입술로 훔쳤다.
“밤마다 울리고 싶어지게 너무 달콤해.”
상쾌함이 깃든 미소를 지은 나는 달콤한 눈물로 촉촉하게 적셔진 씨엘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모두가 곤히 잠든 시간에 씨엘을 품고서 눈을 감다가 머리를 움직이자 뭔가가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손을 뻗어 베개 밑으로 넣자 종이가 잡혔다.
“부적인가?”
곱게 접힌 종이를 펼친 나는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라피,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 비록 우리의 삶이 영원하진 않지만,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영원해.」
나를 향한 마음이 온전히 담긴 쪽지를 읽은 후 잠든 씨엘의 눈에 입 맞췄다.
“앞으로는 이 눈으로 나만 봐야 할 거야.”
“으, 응…….”
잠결에 대답을 한 건지 씨엘이 작은 소리를 내며 새끼 고양이처럼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만을 위한 사랑스러운 반려가 되고자 한 씨엘을 품은 채 이 세상에서 가장 달곰한 시간을 보내며 눈을 감았다.
라피가 늦게 잠이 들자 씨엘의 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가슴에 파묻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제 몸에 남은 흔적에 씨엘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것이라는 듯 남긴 흔적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곳을 어루만진 씨엘은 얼굴을 덮은 땀에 젖은 라피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이렇게 기분 좋은 건 줄 알았으면 몰래몰래 실컷 했을 건데.”
그동안 처가댁의 눈치를 보느라 손만 잡고 잔 게 조금은 억울했다.
사랑을 할 때 수인은 달달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로 반려가 절대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유혹했다.
말만 들었었는데 실제로 눈물을 터트릴 줄은 몰랐다. 당황할 틈도 없이 제 마음을 농축한 눈물을 흘려 라피를 유혹한 씨엘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숨결이 닿기만 해도 흩날릴 것 같은 라피를 조심히 제 가슴으로 품으며 속삭였다.
“라피, 사랑해. 매일 밤 달콤한 눈물을 흘리게 해 줘.”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