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씨엘은 숨마저 멎은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 씨엘의 두 볼을 감싸쥐며 조심히 말했다.
“아빠가 성인이 되면 결혼을 허락할 거라고 하셨어.”
“저, 정말?”
“응, 비록 전쟁이 끝난 후라고 말해서 기간을 설정해 두지 않은 꼼수를 부려서 결혼을 미뤘지만. 이번엔 확실해.”
“자, 잠깐…… 그렇다면 아직도 2년이나 남았잖아.”
정확히는 1년하고 6개월이 남은 상태였다. 지금은 4월이고 내 생일은 10월이니까. 그리고 결혼 준비까지 생각하면 씨엘이 말마따나 2년 후쯤은 생각해야 할 듯싶다.
나이 많은 조카님과 오빠의 결혼을 본 결과 귀족의 결혼은 결정된들 뚝딱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씨엘, 무려 15년을 넘게 기다렸는데 고작 2년을 못 버티는 거야?”
“그건 그렇지만 마치 퇴사를 앞두고 일하는 것처럼 시간이 평소보다 더디게 갈 것 같아서 그렇지.”
확답을 받아서 기쁘지만 기다리는 시간에 애가 닳을 것 같다는 씨엘의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을 했다.
“우리 씨엘은 기다릴 수 있지?”
“으, 응…… 여기에도 입맞춤해 주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씨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본 나는 픽, 웃었다. 제 입술을 가리킨 요망한 고양이 아니 정확히는 흑표범을 본 나는 모르는 척하며 볼에 입 맞췄다.
“조준이 잘못된 것 같아.”
다시 한번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술을 쭉 내민 잔망스러운 씨엘을 본 나는 손을 밑으로 내렸다.
발밑에 있는 화이트 스텔라 꽃잎을 따서 입술에 붙인 후 살며시 입 맞췄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스민 꽃잎에 씨엘의 온기와 말랑함이 전해졌다. 감긴 눈을 뜬 씨엘은 입맞춤에 취하기라도 하듯 조금은 몽롱해 보였다.
“라피? 너무해.”
“이 정도면 상당히 건전한 키스 아니야?”
얇은 꽃잎을 사이에 두었다지만 서로의 온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만스러웠는지 씨엘은 그 불만을 그대로 표출했다.
내 볼과 이마, 눈 위에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라피, 앞으로는 불건전한 키스를 해 주면 좋겠어.”
“씨엘이 하면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 여인에게 함부로 키스하면 안 된다고, 꼭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
너무나 건전하게 교육받은 씨엘을 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건 모르는 사이에서나 허락받는 거지, 나랑 할 때는 허락받지 않아도 돼.”
“그럼 그것보다 더한 것은?”
“그건 약간의 허락과 눈치가 필요하겠지? 허락이 필요할 때가 있고, 눈치껏 진행할 때도 있을 테니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씨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얼굴을 목덜미에 비비적댔다.
“얼른 2년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은 씨엘의 소원대로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루피노 공작가와 판테르 공작가 사이엔 무수히 많은 서류가 오갔다. 정확히는 결혼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결혼식은 어디에서 할 건지, 예물은 무엇으로 할 건지 등등 많은 내용이 담겼고 하나같이 미네르바와 아빠의 사인이 적혔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판테르 공작저에 와야 한다는 게 문서화되었다.
만약 친정에 가지 못하게 할 시엔 무조건 이혼이라는 아빠의 의견이 강력하게 피력된 서류엔 유독 사인이 진했다. 종이에 구멍이 나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그 모든 것이 수용되자 정확히 반년 후에 결혼 날짜가 잡혔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들은 총력전을 펼치기라도 하듯 모든 것을 뒤로 미뤄 두고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마음이 조금은 싱숭생숭할 때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우리 라피가 결혼을 하는구나. 세상에나, 세라피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꼬.”
할머니가 먼저 와서 내 손을 붙잡고 기쁨과 아련함이 범벅이 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라피, 무슨 일 있으면 언니한테 다 말해. 조슬린이랑 쳐들어가서 루피노 공작저를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언니의 협박성 말에 나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평소와 같은 내 가족들은 왁자지껄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풀어 줬다.
“이건 고모부님이랑 같이 고른 디자인인가요? 정말 예뻐요.”
“정확히는 실베스터에서 받은 스노우젬을 씨엘이 디자인한 대로 만든 거야.”
씨엘이 검술이나 체술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보석 디자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 수 있었다.
봄과 잘 어울리는 핑크색 스노우젬이 목과 손가락에서 반짝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컷팅 된 보석을 걸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모, 이거 씨엘, 아니 고모부가 직접 만든 부케를 받아서 왔어.”
푸른 장미로 만든 부케를 가져온 에이든의 눈가가 붉어 보였다.
“에이, 울었어?”
“아, 아니…….”
아니라고 하기엔 눈두덩이도 부어 보였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한 나는 씩 웃어 주고는 부케를 받아들었다.
“우리 라피가 결혼이라니, 오늘 남자들 여럿 울겠는데.”
“그중에 오빠도 포함인가?”
“나? 아, 아니거든!”
아니라고 하기엔 오빠도 눈동자에 붉은 기가 스며 있었다.
“라, 라피…… 이제 나가자꾸나. 후우.”
애써 미소를 지은 아빠가 등장하자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언니가 뭔가를 쿡 찔러 준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승기를 잡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거야.”
눈을 찡긋한 언니가 엄지를 세우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본 나는 제니에게 서랍 속에 넣어 두라고 한 후 아빠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으로 꾸며진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다양한 손님들이 존재했다.
“우리 말랑 콩떡이 결혼을…… 하다니, 너무 이른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더 이른 나이에 하셨잖아요.”
“나랑 우리 라피랑 같더냐. 세상에나, 아직도 너무 어려서 10년은 곁에 두고 키워야 할 것 같은데.”
할아버지 곁에서 다니엘이 위로를 해 줬다.
“라피, 잘 살아라.”
쾌활한 파이퍼가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덕담을 했다. 그런 건 예식이 끝난 후에 해도 되건만.
“라피, 제발 루피노 백작은 밤에 울리지 마. 차라리 나를 울…….”
클레어런스가 제 지위를 잊고 소리치다가 옆에 있는 루카스에게 입막음을 당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짓한 루카스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와 아빠의 모습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뛰어오려던 씨엘은 내 눈빛에 그대로 멈칫했다. 아직 결혼식장 입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일찍 내 손을 씨엘에게 건네준다면 아빠에게 평생 한이 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결혼을 무르고 싶으면 그래도 된단다. 잘 생각해 보렴.”
“충분히 생각했고 내린 결론이에요. 아빠랑 할아버지, 그리고 형부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씨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다들 한 성격과 한 능력을 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존재가 씨엘 외엔 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녕 씨엘을 사랑하니?”
“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처럼요.”
“그렇구나. 그럼 아빠는 더는 말리지 않을게.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는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 언제라도 이곳에 와서 아빠한테 안겨 울어도 되고 하소연해도 돼.”
아빠의 말에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진 로드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아빠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지금이라도 내 손을 잡고 결혼식장을 뛰어나갈 것만 같았다.
“라피…….”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구예요. 아빠랑 엄마의 딸이잖아요. 절대 지지 않고 살 자신 있어요.”
“씨엘이 좀 불쌍해질 것 같은 생각이 찰나에 들었다가 사라지는구나. 내 귀한 딸.”
서서히 씨엘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빠의 손이 긴장으로 굳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새하얀 장갑을 맞댔지만, 아빠의 체온이 오롯이 느껴졌다.
“아버님…….”
씨엘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려와 아빠를 불렀다. 그 부름에 아빠는 깊은숨을 쉬며 나의 볼과 씨엘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예쁘고 행복하게 살려무나. 엄마 몫까지.”
씨엘에게 약간의 협박이나 싫은 소리를 할 줄 알았다. 한데 매우 담백한 말 한 마디만 해 준 아빠가 내 손을 씨엘의 손에 조심히 얹었다. 그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미소를 짓는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긴 결혼식이 싫어서 절차를 최대한 간소하게 한 탓에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동부에는 신전이 없어서 신관을 주례로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할아버지가 주례를 봐 주셨다. 처음엔 근엄한 표정으로 첫 줄을 읽더니 서서히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도 안 우는데 할아버지가 펑펑 울며 주례사를 했다.
“신부 말랑한, 크윽…… 콩떡이와 신랑 씨엘은 평생…… 어읏…….”
보다 못한 형부가 얼른 손수건을 할아버지에게 건네줬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생각해 보니 우리 라피는 이미 파뿌리인데…… 그냥 여기서 끄…….”
“여봇!”
“백년, 아니 이백년 해로하며 행복하게 살길 바라네.”
눈물짓던 할머니의 부름에 얼른 자세를 고쳐 잡고 주례사를 끝낸 할아버지였다. 백년해로라고 하려다가 씨엘이 인간보다 수명이 긴 수인이라는 것을 알고 얼른 이백년이라고 바꿨다.
한마디로 내가 죽더라도 딴 여자 만나면 대대손손 티그리스 공작가에서 가만 안 둔다는 뜻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슬아슬한 주례사가 끝난 후에 반지를 교환했다. 하객들을 보증인 삼아 성혼선언문을 읊은 나와 씨엘은 미소 지었다. 이제 결혼식이 끝났음에 안도할 때 갑자기 오빠가 끼어들었다.
“이제부터 축가가 있겠습니다. 실력이 좀 모자라겠지만 모두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결혼식에 가수라도 초청한 건가 싶을 때 악단의 음악에 맞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너무 놀라 두 눈을 깜빡일 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앞에 선 채 노래를 불렀다.
내 가슴 위에서 잠든 널 보며
완전히 빠져들었어.
너를 모를 거야. 널 볼 때마다 사랑하는 이가 떠오르는 것을.
과거를 떠올리며 매일 아파해
난 엉망으로 망가졌어.
너는 모를 거야. 네가 환히 웃을 때마다 아픔이 사라지는 것을.
널 볼 때마다 눈에 담고 싶어.
네 숨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뛰어.
네 손이 날 잡으면 따스함을 느껴.
오래전 잊힌 감정이 너로 인해 떠올라.
비로소 내가 살아 있는 사람임을 깨달아.
네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끔찍한 어둠으로 감싸여.
네 웃음과 네 손길에 익숙한 아픔이 걷혀.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이뤄주진 않지만
네가 내 아이인 것은 변하지 않아.
아가, 나의 생명. 나의 기쁨.
아빠는 너를 사랑한단다.
우리 아가는?
아빠가 습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놀라 부케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아빠의 노래를 가장한 마지막 물음에 미소를 지으며 왈칵 눈물을 쏟았다. 달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포근한 품에 안겨들었다.
“아빠, 나도 아빠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요.”
아빠의 가슴에 눈물을 닦아내며 축가에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