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그날 일찍 돌아간 나는 고양이로 변한 씨엘의 궁둥이를 팡팡 두들겼다. 그러자 씨엘은 느른한 표정을 지으며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씨엘은 계속 우리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길로 씨엘은 미네르바에게 끌려갔다. 더는 후계자 수업을 미룰 수 없다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씨엘이 서부로 끌려가는 것에 그 무엇보다도 찬성한 아빠는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라피, 뭐 해?”
“뭐 하긴, 공부하지.”
마법의 길은 매우 험난했다. 그렇기에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법 공부에 매달렸다.
“라피, 그러지 말고 우리 잠시 산책할까? 계속 책만 들여다보면 호박떡에 곰팡이 필 것 같아.”
오빠가 옆에서 살살 구슬렸다.
“린은 어디에 두고?”
“조슬린은 지금 수련하느라 바빠. 요즘 나한테 경쟁심리를 느껴서 그런지 매일 검을 손에서 안 놓아서 탈이야. 좀 쉬엄쉬엄해도 되는데.”
조슬린이 매일 검술 수련을 핑계로 자신과 시간을 같이해 주지 않자 서운하다며 약간 불만을 표한 오빠를 보며 픽, 웃었다. 그러곤 오빠의 손을 꼭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우리 동생을 처음 봤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네.”
“그러게. 그때가 세 살이었으니까 벌써 15년이 지났네.”
꽃 피는 봄이 왔다. 이제 가을이면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는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땐 이곳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며 애교를 부렸다. 혀 짧은 소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 떨어져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시절을 생각하면 조금 아찔했다.
이 세상에 관련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눈치 보며 사느라 어느 땐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 호박떡은 여전히 그때처럼 귀여워. 아직도 내 눈엔 세 살짜리 어린아이 같아.”
“누가 보면 오빠가 내 부모인 줄 알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오빠와 함께 정원을 거닐며 봄을 만끽했다.
“앗! 이거다 이거, 예전에 아빠가 나한테 이걸 따 줬어.”
달달한 맛이 나는 진통해열제로 사용한다는 꽃을 본 나는 한 움큼 꺾었다. 그러곤 머리에 묶인 비단 끈으로 돌돌 말아 다발을 만들었다.
“이건 뭐 하려고?”
“아빠 주려고.”
“아빠만?”
“오빠랑은 꽃과 관련된 추억이 하나도 없어서.”
“그럼 지금 만들면 되지. 참고로 오빠는…… 라피가 준 거면 아무거나 다 좋아.”
지금이라도 꽃을 안 주면 실망할 것 같은 표정에 나는 얼른 봄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곤 오빠의 귓가에 꽂아 줬다.
“어휴, 예쁘다 예뻐.”
진심으로 예쁘긴 했다. 아빠의 소싯적 모습을 박아 놓은 얼굴에 꽃이 더해지니 예쁠 수밖에.
“오빠가 예뻐 봤자 어디에 쓰겠어.”
“어디에 쓰긴, 린을 유혹할 때 쓰면 되지. 참고로 그 얼굴에 엄마가 폭 빠진 거 알지?”
“크흐흠, 어린애가 못 하는 말이 없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 오빠가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오빠와 짤막한 산책이 끝난 후 곧장 아빠에게 갔다. 오늘도 역시나 책상에 차곡차곡 쌓인 서류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빠, 바쁘세요?”
“음? 아무리 바빠도 우리 찹쌀떡 볼 시간은 있지.”
열린 문을 두들기며 말하자 굳어 있는 아빠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아빠가 처음으로 내게 준 꽃이에요. 오늘은 내가 선물로 가져왔어요. 마음에 드세요?”
“나는 라피가 뭘 가져와도 다 좋고 마음에 든단다.”
리본 끈으로 돌돌 묶은 꽃다발을 받아든 아빠는 새신랑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느라 그러하리라. 예전에 아빠가 결혼해 주지 않으려고 하자 엄마가 꽃을 들고 쫓아다녔다는 말을 오스카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내 생에 두 번째로 꽃을 받아 보는구나.”
“세 번째엔 손주가 꽃을 줄 거예요.”
“유진과 조슬린은 아직 소식이 없던데.”
“나랑 씨엘의 아기는 어때요?”
“라피, 아빠는 그런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환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곤 고개를 흔들었다. 결단코 빨리 결혼시켜 줄 의사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아빠의 뒤로 가서 꼭 안아 주며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아빠의 미소가 다시 소생했다.
“아빠한테 뭐 바라는 것이라도 있더냐?”
“제가 여기에서 아빠한테 뭘 더 바란다면 그건 불효녀가 되는 거겠죠.”
“그렇게까지는…….”
“그럼 결혼은요?”
“아직은 안 돼. 너와 씨엘은 아직 미성년자니까.”
“핏, 엄마는 열여섯 살에 아빠랑 결혼했고, 언니는 열일곱 살에 형부랑 결혼했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안 돼! 난 아직도 라피가 일찍 결혼해서 아기 낳는 것을 볼 자신이 없구나. 그렇다고 결혼을 무조건 안 시켜 준다는 건 아니야. 성인이 되면 꼭 약속 지키마.”
전쟁이 끝나면 결혼시키자는 미네르바의 의견에 마지못해 동의했던 아빠는 막상 나를 결혼 시키려니 마음이 불편한 듯했다.
“라피는 오래오래 아빠 곁에서 살았으면 했단다. 한데 그 고양이가 수인이었을 줄이야. 미리 알았다면 네가 씨엘을 기르는 것은 막았을 텐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제 딸을 홀려 홀라당 데려가려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누가 보면 제가 씨엘과 결혼해서 서부에서 살면 이곳엔 평생 안 오는 줄 알겠어요. 이미 서부와 동부 사이에 워프 게이트도 다 설치가 되었는데 말이죠.”
속전속결이라고 했던가. 미네르바가 씨엘을 서부로 데려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루피노 공작저와 판테르 공작저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씨엘이 상사병을 앓아서 다 죽어 간다는 이유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서 만든 워프 게이트가 있지만 자주 쓰지는 못했다.
나도 바쁘고 씨엘도 바빴다. 거기다가 아빠가 씨엘이 이곳에 건너오는 것을 싫어한 편이었다. 방문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터라 씨엘은 꼼짝없이 나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빠, 씨엘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자칫 잘못해서 나랑 결혼한 후에 이곳으로 절대 못 보낸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그렇다면 영지전을…….”
“아빠? 애꿎은 영지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지 마세요. 아빠의 딸이 전쟁터에서 굴러다닌 것만으로도 부족한가요?”
“그건, 크흐흠, 미안하구나. 아빠의 생각이 짧았다.”
얼른 사과를 한 아빠를 본 나는 뒤에서 좀 더 힘줘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고로 오늘 씨엘을 만나러 갈게요. 벌써 한 달째 못 만났어요. 그럼 허락한 것으로 알고 이만 가 볼게요.”
굳이 마법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기에 나는 아빠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바로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가족의 배웅을 받지 않고 바로 서부의 마법사와 통신을 한 후 움직였다.
분명 아빠와 오빠가 배웅해 준다며 와서 가지 못하게 워프 게이트 앞에서 실랑이를 할 게 분명하기에 바로 건너갔다.
“어서 오십시오. 라피 님!”
루피노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인물에 나는 눈인사를 했다. 항상 내가 올 때마다 그레이스 경이 마중을 나왔다.
“오랜만이에요. 한데 루피노 공작님과 씨엘은요?”
“지금 후계자 수업 중이라서 라피 님께서 오신지도 모르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일부러 말을 안 한 티가 역력했다. 그렇다는 것은 나를 타인이 아닌 이 집안의 가족으로 여긴다는 것인가. 이 집안의 가주에게 허락받지 않고 오고 갈 수 있는 가족 말이다.
그레이스 경의 정중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루피노 공작저에 마련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씨엘의 입김이 들어가서 판테르 공작저에 있는 내 방과 똑같이 만들어져 있었다.
절대 이곳에 와서도 낯설어하지 말라는 씨엘의 배려가 느껴지는 방에 짐을 놓자 고용인들이 들어왔다.
“아가씨, 씻으시겠습니까?”
“아, 그래요. 생각해 보니 오늘 집에서 안 씻고 바로 넘어왔네요. 아! 씻은 후에 커피 한 잔만 부탁할게요.”
내 한 마디에 커다란 욕조에 곧장 따끈한 물이 받아졌고, 입욕제가 뿌려졌다. 욕조에 몸을 담그자 고용인들이 다가와 곧장 머리를 감겼다. 세지 않고 은은한 샴푸 향에 살짝 눈을 감았다.
샴푸질이 끝난 후 곧장 몸을 씻고 일어나자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닦아낸 후 새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이곳엔 굳이 내가 옷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옷장엔 내 옷으로 그득했다.
머리를 말리고 다 빗은 후에 소파에 앉자 고용인이 케이크와 커피를 내려놓았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맥스가 커피를 마셔도 괜찮다고 말하자 아빠가 허락을 했다. 그때부터 형부에게 커피를 달라고 해서 마시곤 했다.
자주 커피를 마시자 씨엘이 루피노 공작저에 커피를 들여놔서 이곳에 와서도 언제든지 즐길 수 있었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느긋하게 마법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즐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시커먼 무언가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옆에 얌전하게 앉았다.
“씨엘? 수업이 일찍 끝난 거야?”
“그레이스 경이 라피가 왔다는 말을 전해 줘서 어머니가 얼른 가 보라고 일찍 끝내 주셨어.”
내 옆으로 자꾸만 파고드는 씨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애달팠는지 손만 갖다 댄 것만으로도 씨엘은 봄에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웃었다.
“우리 잠시 밖에 나가서 산책할래?”
“응.”
내가 손을 내밀자 씨엘이 다소곳하게 손을 올리더니 감아서 깍지를 꼈다. 쉽게 놓치지 않도록 잡은 손을 본 나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우릴 본 고용인들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처음엔 이곳이 어색했지만 몇 번 다녀보니 내 집처럼 익숙해졌다.
“씨엘은 평소에 산책해?”
“아니, 평소엔 산책할 시간이 없어. 그 시간에 어머니한테 굴려지거든. 그래서 라피가 오는 날이 제일 좋아. 라피가 오면 어머니가 안 굴리시니까.”
다른 의미로 내가 온 게 반갑고 좋은 씨엘은 자꾸만 키 작은 내게 붙어서 비비적댔다. 자주 오지 못하니 그만큼 씨엘의 자잘한 스킨십이 늘어난 듯했다.
루피노 공작저의 정원에 들어서자 이곳도 봄꽃으로 새 단장을 마친 상태였다. 판테르 공작저와는 다른 분위기의 정원을 거닐다가 잠시 긴 의자에 앉아 쉬었다.
“라피는 계속 공부만 한 거야? 마법 공부는 언제까지 하는 거야?”
“아마도 평생, 죽을 때까지?”
“누가 보면 라피는 마법이랑 결혼한 줄 알겠어. 좀 쉬엄쉬엄해.”
“지금 쉬고 있잖아. 씨엘을 만나는 날이 나한테는 쉬는 날이야. 뭐 며칠 후엔 할아버지 집에 가야지만.”
찹쌀떡 시절에도 바빴지만 지금도 바빴다.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이 대륙을 몇 번이나 횡단할 정도의 거리를 한 달마다 갱신 중이다.
“그럼 이번엔 얼마나 있다가 갈 수 있어? 설마하니 저번 달처럼 하루만 있다가 바로 가는 건 아니지? 그때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말도 못 할 정도야.”
“그래서 매일 통신구로 연락하잖아.”
“통신구로 연락하면 이렇게 만질 수가 없잖아.”
여전히 건전하게 비비적대는 씨엘을 본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한 달간 떨어져 있을 땐 얼마나 안절부절못했겠는가.
“음? 여기 꽃이 있네, 씨엘은 저 꽃 이름이 뭔지 알아?”
“어, 이건 화이트 스텔라야. 서부에만 자생하는 꽃인데 꽃말이…….”
발밑에 있는 새하얗고 청초해 보이는 꽃을 꺾은 나는 씨엘의 귓가에 꽂았다. 역시 미남은 꽃이 잘 어울렸다.
“그러니까 꽃말이…….”
꽃을 꽂으며 귓가를 슬쩍 어루만지자 씨엘의 얼굴에 홍조가 드리워졌다. 수줍어하며 채 말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씨엘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다른 꽃에 비해 여운이 길게 남는 잔향이 특징인 화이트 스텔라의 꽃말을 대신 속삭이며 귓가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