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60)화 (160/164)

160화. 

루카스가 승리를 이끈 대가로 개선문에 들어섰다.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활짝 웃은 루카스는 그 무리에 끼지 않고 멀찍이서 지켜본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걸 본 아빠가 조금 섭섭한 투로 말했다.

“우리 라피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전 괜찮아요. 저기에 있다가는 사람들한테 치여 죽을지도 몰라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승전 행진이 끝난 후 곧장 황궁에서는 연회가 열렸다. 그 연회엔 나와 씨엘도 주인공으로 참석했다.

가문장이 수놓인 망토를 걸친 채 들어서자 다들 길을 터줬다. 그곳에서 뒷방 늙은이가 되다시피 한 황제와 얼굴에 살이 올라 번드르르하게 빛이 나는 클레어런스를 봤다.

“듣기로는 황제에게 이번 전쟁을 주장한 이들을 4대 공작가에서 조용히 눌러 버리셨대.”

“어련하셨을까. 안 그래도 잔뜩 벼르고 계시던데 우리가 없을 때 청소하셨나 보네.”

씨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우리 둘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에게 대대적으로 상을 주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나란히 백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루카스는 후작위를 받았고 드라코 공작은 상금을 받았다.

“루카스는 억울하겠다. 원래 황자는 황궁을 떠날 때 백작이나 후작위를 받고 가잖아. 그냥 나가도 받을 작위를 승전 전리품으로 받게 되네.”

루카스가 후작이 되든 공작이 되든 나는 상관없었다. 그가 씨엘을 신성력으로 치료해 줘서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황자라서 그냥 받는 거랑 공을 세워서 받는 작위는 느낌부터가 다르잖아. 루카스가 황궁을 나갈 땐 내가 섭섭하지 않게 따로 챙겨 줄 거야.”

논공행상이 끝나자 클레어런스가 내게 다가왔다. 첫 춤은 무조건 씨엘과 함께라며 거절했지만 두 번째까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내내 짤막한 말이 오갔다.

“몸 건강해서 다행이야. 네가 다칠 줄 알고 매일 조마조마했어.”

“나 대신에 씨엘이 다쳐서 사경을 헤맸지 뭐.”

“루카스가 마침 달려가서 신성력으로 살려 줬다며? 그곳에 내가 갔다면 아마 루피노 공자는 죽었을지도 몰라. 나중에 루카스한테 고맙다고 하는 거 잊지 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피는 안 통해도 형제는 형제라 이거지? 동생을 엄청 챙기네.”

내 말에 클레어런스가 씩 웃었다. 피는 안 통해도 황자라서 황위 계승권이 있음에도 클레어런스는 루카스를 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둬서 잘 보살폈다.     

“라피도 들었겠지만 이번에 공작님들이 많이 수고해 주셨어. 앞으로는 타국이 먼저 쳐들어오지 않은 이상은 전쟁은 없을 거야.”

“응, 너도 고생 많았어. 중앙 귀족들이 갈려 나가는 와중에도 나라 살림 하나는 똑소리 나게 했다고 아빠가 말씀하셨어.”

“호오? 판테르 공작님이 무슨 일로 칭찬을 다 하셨을까? 내 앞에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오히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거든.”

아빠는 남에겐 상당히 칭찬이 인색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클레어런스는 아빠가 제 칭찬을 했다니 믿어지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만약 엄마 일과 씨엘이 없었다면 네가 내 남편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하실 정도로 기대하고 계셔.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해라.”

“이야, 그 정도면 진짜 최고의 칭찬인데. 후후, 앞으로도 잘 부탁해. 세라피나 판테르 백작님!”

두 번째 춤이 끝나자 클레어런스가 내 손등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나에겐 두 번째 춤이었지만 클레어런스에겐 첫 춤이라 많은 영애가 나를 사납게 노려봤다. 그래봤자 다음에 등장한 아빠로 인해 모든 시선이 가려졌다.

“우리 라피, 정말 자랑스럽구나. 세라피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너를 꽉 안아 주며 울었을지도 모르겠어.”

촉촉하게 젖은 푸른 눈동자엔 소싯적 엄마를 닮은 내가 고스란히 담겼다. 내가 커 갈 때마다 엄마를 닮았다면서 다들 좋아하셨다. 특히 오빠는 간혹 나를 말없이 안고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곤 했다. 아마도 엄마를 보고 싶어서 그런 듯하다.

“전 괜찮아요. 엄마 없다고 놀림 받으며 크지 않았으니까요. 엄마의 사랑을 더해서 아빠와 가족들이 듬뿍 사랑을 주며 키워 줬잖아요.”

엄마의 빈자리는 생각나지도 못할 정도로 내 가족들은 모든 것을 빈틈없이 채워 줬다. 그래서인지 나를 보는 이들은 절대 엄마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뒤에 서 있는 이들의 흉흉한 시선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밤길이 매우 무서워질 예정일 테니까.

세 번째 춤이 끝나자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안온한 곳에서 나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준 아빠의 품에 폭 안겼다. 아빠는 조심히 내 등을 다독였다.

“이렇게 바르고 예쁘게 자라 줘서 아빠가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구나. 남들은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고생깨나 했다던데.”

“으음, 그건 현재진행형이 될 것 같은데요.”

아빠는 나와 씨엘의 결혼을 허락했지만, 바로 결혼시켜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아빠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당분간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기로 생각했다.

“근데 진짜 드라코 공작님이랑 이야기할 거예요?”

“응? 아, 그럴 거야. 언제까지 교류를 중단하고 있을 순 없잖느냐. 우리 라피도 황태자와 친하게 지내는데.”

어찌 보면 황실과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내가 클레어런스와 친하게 지내자 아빠도 한발 물러설 예정인 듯싶다.

“저 때문에 억지로 그러시는 거라면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건 아빠가 만나 보고 결정하마. 네 어미를 황실이 죽였지, 드라코 공작이 죽이진 않았으니까. 잘못이 있다면 제 주인을 믿는 바람에 충고를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비록 드라코 공작이 내게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는 했지만, 아빠와는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황태자비의 임신을 핑계로 대는 것을 묵인했다. 그것도 모자라 수도와 그를 지킨다면서 드라코 공작 역시 출전하지 않았다. 물론 당시 드라코 공작의 차례가 아니기에 빠져도 무방했긴 하지만.

“드라코 공작가는 5대 공작가 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했었다. 황태자에게 붙은 것은 어찌 보면 가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빠와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미네르바가 아빠에게 춤을 먼저 신청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아빠가 곁을 떠나자 다른 남자들이 줄을 이었다. 춤을 추자고 신청했지만 내 저질 체력은 그들과 전부 춤을 추기엔 벅찼다.

“판테르 양, 아니 판테르 백작님이 되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기쁜 날 축배를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들이 줄을 이었지만 내 눈엔 전부 차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와 엮여 보려고 노력하는 게 가상하긴 하지만 그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누기엔 기력이 달렸다. 그렇기에 주변을 돌아보며 씨엘을 찾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씨엘의 주위를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여자에 대한 면역력 따윈 조금도 없기에 물러터져 휘둘리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루피노 백작님, 춤추지 않으시겠어요? 항상 판테르 양과 춤을 추시잖아요.”

“맞아요. 누가 보면 판테르 양이 미래의 루피노 공작부인이라도 된 줄 알겠어요.”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루피노 백작님이 원하시는 대로 전부 해 드릴 자신이 있답니다.”

어떻게든 씨엘과 춤 한 번 춰 보고자 여자들이 기를 쓰고 달라붙었다. 그녀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들 이름 모를 귀족 영애가 아니라 루피노 공작부인이 될 수 있으니 뭐라도 하려고 몸을 들이밀었다.

심지어는 풍만한 가슴을 씨엘에게 들이밀어 은근슬쩍 터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씨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피해 버렸다.

“저는 라피의 것입니다. 그러니 손대지 마십시오. 상당히 기분 나쁩니다.”

여자들이 닿은 부분을 톡톡 털어내듯 친 씨엘은 마침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벌처럼 날아와 나비처럼 곁에 섰다.

“라피가 계속 춤만 춰서 나 혼자 심심했어.”

“그랬구나. 미안해, 이왕 이리된 거 루카스 황자님께 가서 인사하자.”

선한 인상 때문인지 몰라도 루카스 쪽에도 여자들이 줄을 섰다. 그녀들의 춤 신청을 거절하던 루카스는 우리가 다가가자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곧장 휴게실로 이끌었다.

“아, 죽는 줄 알았어. 고마워.”

크라바트를 흔들며 느슨하게 한 루카스는 소파에 주저앉다시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말씀을, 스텔로 후작님!”

“풉! 라피한테 그런 호칭으로 불리고 싶지 않아.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야? 라피는 항상 형님과 함께 있을 때만 나랑 만났잖아.”

시종이 가져다준 음료로 목을 축인 루카스는 상당히 피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밖에서는 위풍당당한 황족으로서 면모를 보이지만 휴게실에서는 편한 모습으로 변했다.

“우리 씨엘을 치료해 준 거, 너무 고마워. 만약 루카스가 없었다면 씨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황자님.”

나와 씨엘은 루카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그러자 루카스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리고 대가는 루피노 공작님께 받았어. 루피노 공작님의 손이 엄청 크다는 거 이번 기회에 뼈저리게 느꼈다고.”

루카스의 말에 의하면 그의 체중만큼 보석이 가득 담긴 궤짝을 가져다줬다나 어쨌다나. 역시 주고받는 건 확실한 미래의 시어머니였다.

“그런 연유로 우리 친하게 지내요. 루피노 백작님! 성격만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으면 좋겠군요.”

“풉! 루카스, 신성한 황자님이 너무 속물이 된 것 같아.”

“살다 보면 다 이런 거지. 두 사람도 여기에서는 편히 쉬어. 여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루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클레어런스가 들어왔다.

“와, 진짜…… 나 죽을 뻔했어. 정말이지 사람들 상대하는 거 엄청 피곤해.”

클레어런스가 앓는 소리를 하며 들어와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클렌, 그러다가 허리 휘어서 늙어서 고생한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라피가 나 책임져 줄 거 아니잖아. 후우.”

“당연하지, 난 우리 씨엘을 책임지는 것도 힘들어. 그러니까 클렌은 다른 여자 만나. 클렌 좋다는 여자들은 수두룩하잖아.”

“그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문제지, 후우…….”

연애 결혼을 꿈꾸는 클레어런스를 본 씨엘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라피, 우리 집에 가자. 이제 할 거 다 했잖아.”

씨엘의 말에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레어런스와 루카스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우리가 남의 연회나 파티에 끝까지 남은 적은 없으니 중간에 빠져나간다고 한들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근데 집에 가서 뭐 할 건데 이렇게 일찍 가자고 보채는 거야?”

설마하니 딴 놈이 나를 보면 질투 나서 그런다거나 아니면 은밀한 행위를 하고 싶다고 말하려나 싶어 슬쩍 떠봤다. 그랬더니 씨엘이 귓바퀴를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오늘 실컷 궁팡하게 해 줄게.”

“뭐?”

“궁둥이 대 줄 테니까 마구마구 팡팡 두들겨 줘.”

순간 잘 가다가 삐끗해서 넘어질 뻔한 나는 씨엘을 봤다. 수인족 아니랄까 봐 궁둥이를 두들겨 달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을 함부로 한 씨엘은 너무나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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