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59)화 (159/164)

159화.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온몸이 밑으로 쑥 꺼지는 느낌에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피로가 중첩되어 그대로 과로사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가족들 품에서 죽은 게 위안이라면 위안인가.

전생에 비하면 이번 생은 엄청 행복하고 따스했다. 비록 내 명이 짧아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기쁜 마음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다. 단지 씨엘이 걱정되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인연을 만나지도 못한 채 수절하다 죽을 거라고 했는데.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어찌 변할 줄 모르는 일이다. 부디 씨엘이 좋은 사람을 만나 내 기억을 잊을 정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다.

행복한 나날을 선물로 받아 그걸 되뇔 때 불현듯 귓가에 무언가가 닿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이마와 눈, 그리고 볼에 촉촉하고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피…….”

어둠을 뚫고 아련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라, 피……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응? 라피, 이제 일어나 봐. 나 무서워.”

씨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는 것은 내 몸이 아직 땅속에 묻히지 않은 것인가.

“내가 안 깨어났을 때 이런 느낌이었어? 라피, 제발…… 이제 일어나 봐. 응? 일어나면 뭐든지 다 해 줄게. 결혼하면 침대도 부술 수 있게 노력할…….”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씨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른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손을 올려 소리가 들린 곳을 틀어막았다.

“씨엘, 미쳤어? 너 우리 아빠 있는 곳에서 그런 말 하면 죽어!”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두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일 때 손바닥에 뭔가 뜨듯하고 뭉클한 게 닿았다.

“라피, 이제야 일어났구나.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애간장이 다 타들어 갔단 말이야.”

내 손바닥에 입맞춤하며 핥자 저절로 손이 굽었다.

“내가 씨엘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아.”

“다행이네. 오래오래 나랑 같이 살자.”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온기가 느껴지자 그때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잤어?”

“3일간 계속 잠만 잤어. 처음엔 하루면 일어날 줄 알았는데 계속 안 일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다들 라피를 축하해 주러 왔다가 잠들어서 입맞춤만 해 주고 돌아가셨어.”

한마디로 서프라이즈하러 왔다가 서프라이즈를 당했는데 그걸 보자마자 바로 잠들어서 다들 놀랐다고 한다.

“다들 라피를 간호하겠다고 해서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했고 오늘이 내 차례였어.”

“그, 그렇구나.”

“응, 내 차례에서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나 정말 울 뻔했어. 라피가 눈을 안 뜨니까 너무 무서워져서 아버지한테 빌고 또 빌었어. 우리 라피 깨어나게 해 달라고.”

지금이라도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씨엘의 얼굴을 어루만져 준 나는 픽 웃으며 그의 볼에 입맞춤을 했다.

“내가 씨엘을 두고 어떻게 죽어. 후우, 그나저나 나 지금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데 다시 누워도 될까?”

“응, 내가 조심히 눕혀 줄게.”

자연스럽게 등을 감은 단단한 팔에 의지해 침대에 반쯤 누웠다. 등받이 베개에 기댄 채 기운 없는 숨을 밭았다.

“3일간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플 거야. 내가 먹을 거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그때까지 쉬고 있어.”

씨엘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3일간 잤다는데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웠다. 폭신폭신한 이불에 몸을 맡긴 채 다시 잠이 들었지만 이내 깨어나야만 했다.

“라피, 잘 땐 자더라도 먹고 자. 숟가락을 들 힘도 없지? 내가 먹여 줄게.”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늘만은 호사를 누리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씨엘의 수발을 받으며 가까스로 수프 한 그릇을 먹고 따뜻한 물 한 잔으로 입을 헹궜다. 다 먹고 나자 바로 누우면 안 된다며 제 몸을 내 베개 대용으로 들이밀었다.

씨엘의 가슴에 기댄 채 그간 있었던 일을 듣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그토록 원하던 말이 나왔다.

“이제 편히 자. 안 깨울 테니까.”

“응…….”

씨엘이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금방 잠에 빠져들었고 깨어났을 땐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후아암.”

늘어지게 하품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보는 가족의 시선에 방긋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무 오래 잤어요?”

“응, 그래도 괜찮아. 깼으니까. 우리 동생,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좀 기운이 없는 것 빼곤 괜찮아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우리 인절미, 정말 장하고 멋져.”

언니가 내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물러서자 형부가 다가왔다.

“난 우리 인절미 처제가 크게 하나 터트리고 올 줄 알았어. 그래서 걱정은 안 했어…… 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매일 하늘을 보고 빌었어. 우리 처제가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말이야.”

형부가 내 볼을 꾹꾹 눌렀다.

“예전처럼 찰지게 달라붙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야. 우리 처제는 여전히 인절미인걸. 노란 콩가루 묻은 인절미.”

방긋 웃은 형부를 밀치고 콜린이 오더니 왈칵 눈물을 쏟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모, 너무너무 걱정되어서 수업 중에도 이모 생각하느라…….”

“너 이번에 장학금 못 받았지?”

“으, 응…….”

“장학금 못 받은 거 내 탓으로 돌리면 혼난다. 욘석아!”

작은 손을 들어 콜린의 머리를 콩- 때렸다. 힘을 가하지 않은 꿀밤에 콜린은 눈물 섞인 웃음을 지으며 혀를 찼다.

“칫! 우리 이모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그래도 이모를 걱정한 것은 진짜야. 나도 매일 매일 외할머니한테 기도했단 말이야.”

“고마워. 그런다고 결혼해 주는 건 아니야.”

언니네 가족에게 순서를 빼앗긴 오빠와 조슬린이 투덜대는 콜린을 옆으로 밀어내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 동생, 우리 호박떡…… 라피가 건강하게 돌아와서 너무 좋구나.”

“라피, 잘 왔어. 오자마자 잠들어서 그때 너무 놀라서 다들 우왕좌왕했어. 우선은 몸보신하면서 푹 쉬어. 알았지?”

다정한 오빠와 조슬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뒤쪽을 봤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곧 오실 건데. 아마 싸들고 오실 게 너무 많아서 좀 시간이 걸릴 거야.”

오빠의 말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잠시 후 들이닥친 티그리스 공작가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몸보신할 음식이랍시고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만든 것을 죄다 가져온 것이다. 

전부 먹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안쓰러워하는 눈빛에 굴복한 나는 조금씩이라도 전부 맛을 봐야만 했다. 맛만 봤음에도 소화제가 필요할 정도로 배가 불렀다.

“내 귀한 새끼, 반쪽이 되었어. 이 일을 어쩌누. 이 할미는 안 보고 싶었니?”

내 얼굴을 연방 쓰다듬은 할머니의 말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매일 매일 보고 싶었어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리고 다른 가족들도…… 그래서 매일 울었어요.”

매일 울었다는 건 뻥이었다. 울 시간조차 내겐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전략을 짜느라 매일 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에이든이 제대로 보조하지 못한 게냐?”

“아니에요. 할아버지, 에이는 충분히 잘해 줬어요. 이번에 마지막 전투에서 어땠냐면요.”

이미 씨엘에게 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시 말하는데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 듣는 표정으로 모두 경청을 했다.

“역시 내 동생이야. 그렇죠? 헬레나.”

“그렇죠. 누구 시누이인지 몰라도 참 너무 멋지네요.”

“역시 우리 고모님이 최고예요!”

“고모님이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예요.”

다니엘과 헬레나의 말은 그러려니 하는데 이젠 사비나와 마리엘까지 덩달아 나를 위로 띄워 줬다. 이러다가는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여튼 우리 고모는 추종자가 너무 많아서 탈이야. 물론 나도 그중의 하나지만. 고모, 정말 잘 왔어.”

제이든이 웃으며 말했다. 티그리스 공작저에 처음 가서, 고대어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던 제이든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제이든은 삼십대 중반이 되어 내 앞에서 웃었다.

“제이도 이젠 늙었구나.”

“고모! 내가 늙긴 뭐가 늙어. 이 정도면 동안이지.”

“동안은 우리 아빠를 말하는 거고.”

오십대이건만 아직도 삼십대의 얼굴을 지닌 아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의 한계를 지나면 노화가 더디게 진행된다고 하던데.

“고모는 꼭 감동 어린 말을 하면 감동을 쪽 빼 버리고 대답한다니깐.”

“감동을 빼도 할 것은 다 하잖아. 할아버지, 제이가 막 대들어요.”

그 한마디에 할아버지의 오싹한 시선이 제이든을 얽맸다.

“전쟁터에서 고모가 돌아왔는데 감히 막 대들어? 네놈이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할아버지한테 혼이 났음에도 제이든은 평소대로 웃기만 했다. 에이든이라면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반성을 할 텐데, 같은 형제지만 성격은 달랐다.

“내 새끼, 당분간은 침대를 벗어나지 말렴. 얼마나 피곤했으면 3일을 내리 자누. 한데 자네, 우리 라피의 생일을 이대로 지나칠 건가.”

“라피의 의견을 듣고 할 생각입니다. 라피, 넌 생일 파티를 하고 싶니? 그렇다면 크게 파티를 열어 주마.”

어쩌다 보니 전쟁터에서 생일이 지나가 버렸다. 당시엔 생일이란 것도 자각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씨엘이 들꽃을 엮어와 다발로 만들어 줬다. 그때야 그날이 내 생일임을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이 찾아와서 사비나가 미리 챙겨 줬다면서 머리핀을 꽂아 줬다. 제이든이 처음 준 머리핀을 자주 애용하는 것을 보고 흑진주가 끼워진 머리핀을 선물로 준 듯했다.

“음, 이번엔 만사가 귀찮으니까 내년에 해요.”

보통 귀족 영애라면 무조건 생일 파티를 개최하겠지만 나는 그런 건 귀찮아서 싫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아빠의 핏줄은 맞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네가 원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그건 나중에 제가 결혼할 때 해 주세요.”

“그, 그러도록 하마. 그럼 생일이 지났으니 우리 라피의 컨디션이 괜찮아지면 가족끼리 약식으로 하자꾸나.”

그리하여 나의 생일 파티는 일주일 후에 가족만 참석하는 규모로 열렸다. 물론 미네르바도 초대했지만 일이 밀려서 좀 늦을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가족끼리 모여 조촐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고 하하호호 웃을 때 늦는다는 미네르바가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많이 기다렸어요.”

“어머, 말이라도 정말 고맙구나. 선물을 가지고 오느라 좀 늦었는데 이걸 받고 봐주려무나.”

“선물은 필요 없는데요.”

“괜찮단다. 자고로 초대받았을 땐 마음은 가볍고 두 손은 무겁게 하고 가라고 우리 어머니께서 항상 강조하셨거든.”

미네르바의 말에 그의 기사들이 낑낑대며 가져온 궤짝 두 개를 봤다. 안에는 금괴가 그득했다. 저걸 과연 두 손으로 들 수 있는 수준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두 손이 두 번만 무거웠다가는 집안 기둥까지 뽑아서 갖다 바칠 기세인 미네르바를 본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래의 시어머니 통이 너무 커서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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