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56)화 (156/164)

156화. 

미네르바의 품에 안겨 있던 라피는 갑작스레 깨어난 씨엘을 보곤 우는 것도 멈춘 채 두 눈을 깜빡였다. 누가 보면 잠깐 졸았다가 깨어나서 바로 대답한 줄 알 정도로 매우 생생한 목소리였다.

“씨, 씨엘?”

“라피, 나 왔어.”

흐드러지게 핀 봄꽃처럼 잔망스러운 미소를 짓는 씨엘을 본 라피는 얼른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씨, 엘…… 씨엘, 씨엘, 이 바보야. 왜, 왜 멋대로 나서서…….”

잠시 멈췄던 라피의 눈물이 속절없이 후두두둑- 떨어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자 씨엘이 안절부절못하더니 곧장 라피를 꼭 안고 등을 다독였다.

“울지 마, 응? 울지 마, 나 때문에 울지 마. 라피, 내 사랑…….”

“씨이, 나빴어. 팔찌도 못 벗게 하고…… 소원권을 그깟 것으로 쓰면 어떻게 해! 이 똥멍청아, 내가 얼마나 애가 탔는데…… 흐어어엉.”

소리내어 울자 씨엘은 어쩔 줄을 모른 채 라피를 품에 안고 작은 목소리로 달래 줬다.

“난 이제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 응? 라피, 그렇게 계속 울면 눈물 젖은 물떡이 되어 축 늘어질지도 몰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흐으윽,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안 깨어나서 내 속이 다 타 버렸단 말이야…… 이 바보야.”

“쉬쉬, 미안, 미안해. 누가 우리 라피를 이렇게 울린 거야? 응? 내가 가서 혼내 줘야겠다.”

“씨엘 때문이잖아.”

장난스레 말하는 씨엘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을 솜방망이 같은 조그만 손으로 콩콩- 두들겼다. 아프긴커녕 분홍 젤리 발바닥으로 날린 펀치를 맞은 듯 씨엘의 표정은 말랑말랑하기만 했다.

“못됐어, 나빴어, 진짜 진짜 미워 죽겠어.”

제 가슴을 연방 두들겨대는 라피를 품은 채 씨엘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미네르바는 픽,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제 아비를 똑 닮았네. 어디 가서도 알아보겠어. 하여튼 어디 가서 씨도둑은 못 한다더니.”

사랑꾼이었던 제 남편이 떠오른 미네르바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런다고 부군이 계시는 하늘이 보이진 않습니다만.”

앞에서 제 딸을 품은 채 미소 짓는 빌어먹을 놈을 본 판테르 공작의 표정은 오묘하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떼어놓고 싶었지만 라피가 씨엘을 꽉 붙든 채 가슴에 비비적대는 모습을 보니 씁쓸하기까지 했다.

언제나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딴 놈 가슴으로 옮겨 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판테르 공작부인이라면 분명 좋아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아퀼라 공작부인이 나이 많은 아퀼라 공작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허락했겠지요.”

“그건…….”

사랑 하나에 가문과 가족을 버리다시피 한 세라피나가 떠올랐다. 지금의 라피보다 더 어렸던 세라피나가 판테르 공작저에 왔을 때 저를 보며 지은 함박웃음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결혼을 했고, 애까지 있는 남자를 사랑해서 마법사가 아닌 기사가 되어 온 세라피나를 받아 준 건 제가 선택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것이었다.

그녀를 만나 10년을 너무나 행복해하며 지냈다. 물론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의 속마음을 다 아는 듯 세라피나는 제게 유진과 라피를 남기고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아이들이 사랑하는 존재를 데리고 오면 조건 보지 않고 허락해 주겠노라고 말한 그녀의 목소리가 아련하기만 했다.

“또 이러면…… 또 한 번만 이러면…….”

“응, 미안, 내가 무조건 미안해.”

“또 이러면…… 그땐 궁팡 안 해 줄 거야.”

“어, 어? 아…… 정말 죽을 죄를 지었어.”

은근히 라피가 궁둥이를 팡팡 두들겨 주는 것을 즐긴 씨엘은 금방 사색이 되어 빌었다. 그 모습을 본 판테르 공작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미네르바는 ‘궁팡에 길들어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는 건 핏줄 때문인가.’ 혼잣말을 하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한동안 씨엘의 가슴에 안겨 눈물짓던 라피는 가까스로 그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러더니 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고는 판테르 공작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이 아비가 보이더냐.”

“아빠…….”

“그리도 저놈이 좋더냐. 이 아빠보다?”

“…아빠가 최고죠. 아빠 같은 아빠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아빠.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전쟁터에서 사적으로 외부와 통신구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는 사령관이었다. 혹은 사령관이 허락하면 그의 입회하에 외부와 통신을 할 수 있었다. 일전에 그 방법으로 라파엘과 잠시 연락을 했던 라피였다.

가족들과의 연락은 전부 편지로 대신했다. 그렇기에 한두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받아 보며 안심을 했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판테르 공작과 오래 떨어져 있게 된 라피는 아빠를 보자 불안한 마음이 가셨다. 그러곤 긴장이 풀린 듯 판테르 공작의 품에 안겨들었다.

“라피, 우리 찹쌀떡…… 아빠도 우리 딸이 정말 보고 싶었단다.”

라피가 전쟁터에 있는 동안 판테르 공작도 한가하게 영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터로 물자가 충분히 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합심해서 황제의 권력을 누르고 황태자의 힘을 키웠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를 폐하고 황태자를 옹립한 것은 아니었다.

회의 결정권 등의 권력을 황태자에게 쥐어 준 것이다. 한마디로 황제를 뒷방 늙은이로 만든 셈. 물론 황태자의 허락을 받고 일을 진행했다. 황후 역시 제 아들에게 권력을 준다는 말에 토 달지 않았다.

대신관은 재산을 몰수했다. 신도들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하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꾸몄다. 그리고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산골에 있는 허름한 신전으로 몰아냈다.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수많은 생명을 세 치 혀로 앗아간 죄를 매일 신께 빌라는 의미로 말이다. 물론 하루 세 끼는 신관에겐 사치이니 두 끼를 제공했다. 매우 허름한 식단을 지키라고 그곳 신전의 담당자에게 미리 귀띔을 해 줬다.

죄인에게 고기는 필요 없다고 했더니 그 이후로 멀건 수프에 딱딱한 빵 한 조각이 제공되었다.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절대 나오지 못하게 조치를 한 판테르 공작은 제 딸을 품은 채 등을 다독였다.

제 딸이 돌아오면 또다시 황제의 손에 놀아나지 않도록 한 판테르 공작은 눈이 시큰거려 질끈 감았다. 다시금 소리 없이 우는 딸의 눈물이 가슴을 적시는지 따뜻하고 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아빠랑 멀리 안 떨어질 거지?”

“니에?”

판테르 공작의 말에 라피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뭘 그리 놀라느냐. 라피는 아빠가 안 보고 싶었니?”

“당연히 보고 싶었지요. 훌쩍.”

“그렇지? 보고 싶었지? 그러니까 이젠 아빠랑 떨어지지 말자꾸나. 에리카와 유진도 찹쌀떡이 보고 싶어서 이곳으로 달려오려고 했단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말해 봤자 입 아프고.”

다들 각자 집이 아닌 사하라에 모여 황제를 압박하면서 라피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따금 승전을 알리는 연락이 올 때마다 서로 안도하며 작게 기쁨을 나누곤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루카스의 특별 승인을 받은 에이든이 통신을 했다. 그걸 들은 판테르 공작은 곧장 미네르바에게 연락을 했다. 제 딸을 구하기 위해 씨엘이 다쳐서 오늘내일한다는데 당연히 미네르바는 알아야 하는 게 옳았다.

아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에도 미네르바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저 라피를 구하기 위해 한 당연한 행위로 여긴 미네르바는 지금 이 상황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아빠……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결혼을 허락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음? 아, 그렇긴 했지. 결혼을 허락해 준다고 했지 언제 해도 된다는 말은 안 했다만.”

“아, 아빠!”

“그만큼 우리 라피를 보내고 싶지 않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 주면 안 될까?”

판테르 공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되면 씨엘과 멀어지게 된다. 씨엘도 계속 판테르 공작저에 머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루피노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늦었지만, 후계 공부를 해야 하니 말이다.

거의 끝과 끝을 달리는 지역에서 지내야 하기에 라피는 은근슬쩍 말을 바꾼 판테르 공작을 향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판테르 공작님께서 우리 포슬포슬한 백설기를 놓아주기 싫어하는 거 저도 이해합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서부와 동부를 잇는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물론 비용은 우리가 전부 지불할 테니 허락만 해 달라는 미네르바의 말에 판테르 공작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그 정도로 돈이 많은 건가요?”

워프 게이트만 설치하는 것도 돈이 많이 드는데 거리에 따라 그 비용이 배로 늘어난다. 그렇기에 동부와 서부를 잇는 워프 게이트는 거의 천문학적인 돈이 들 게 분명했다.

“훗, 아들아! 얻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집안의 기둥 몇 개 정도는 뽑을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한단다.”

“아, 그렇군요. 어머니의 가르침을 깊게 새기겠습니다.”

“일전에 부인을 위해 판테르 공작님께서는 동부와 북부 사이에 워프 게이트를 연결하셨단다. 훗날 우리 백설기가 자주 애용하지 않았니.”

“이른바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거로군요. 어머님의 깊은 혜안에 감탄할 뿐입니다.”

참 좋은 것을 가르쳐 준다는 듯이 보던 판테르 공작의 시선이 막사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어, 으음…… 고모할아버지, 루피노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씨엘 님도 깨어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오랜만이로군.”

“오랜만이네, 티그리스 공자! 우리 씨엘이 다쳤을 때 도움을 줬다고 했었나? 정말 고맙네.”

출전 전과 달리 살이 빠진 에이든은 멀쩡해 보이는 씨엘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한데 고모, 오늘도 회의에 참석 안 할 거야? 오늘은 차이나 측에서도 참석하는 화평 회의를 할 건데.”

의식이 없는 씨엘의 곁을 지키느라 회의가 있음을 알려도 떠나지 않았던 라피였다. 그런 라피에게 에이든이 조심히 물었다.

“화평 회의를 이제야 한다고? 대체 며칠 동안 뭘 했기에 지금 열리는 거야.”

“으음, 우리도 그렇고 차이나 쪽도 그렇고 서로 사상자와 부상병을 수습하느라 좀 시일이 걸렸다고 해야 하나.”

윈드 스톰을 타고 빠르게 움직인 불길에 대다수의 병사들이 희생된 차이나 측은 전의가 꺾여 버렸다. 

항복하지 않으면 밀어 버릴 것이란 사반나의 협박을 당하는 중에 타국에서도 호시탐탐 국경을 넘을 기회를 엿봤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백기를 들었다.

그러곤 화평 회의를 제의하면서 시신을 수습할 시간을 달라는 말에 승전국의 아량으로 좀 미뤄 준 것이다. 한데 죽은 자가 태반에다가 불타 버렸기에 신분을 확인할 수 없어 애를 먹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오늘 화평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씨엘이 깨어나 정신을 차린 라피는 에이든의 말을 듣고는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살과 뼈를 발라내서 푹 끓여 육수까지 쪽쪽 빨아도 시원찮을 놈들이 온다고? 하, 그럼 내가 직접 가 줘야지. 아주 새같이 발라 줄 거야.”

전쟁터에서 사계절을 지내는 동안 라피의 입이 걸걸해졌다. 언제 울었냐는 듯이 눈물을 훔친 라피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라피? 고운 말을 써야지. 아무리 적들이 나라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라피의 말을 들은 판테르 공작이 놀라며 조금은 혼내는 투로 말하다가 멈췄다.

“놈들이 엄마를 깔짝깔짝 건드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빠 같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아요?”

“아니 그런 놈들을 아직도 살려 뒀더냐. 아주 아작아작 씹어 버린 후에 육수까지 쪽 뽑고 뼈다귀는 개새끼한테 던져 줘야지.”

달리 부녀가 아닌 듯했다. 그 아빠의 그 딸의 말투도 그러거니와 뭘 생각하는지 음흉한 표정마저 똑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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