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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55)화 (155/164)

155화. 

누군가의 아비이고, 형제이며, 또는 자식일지도 모르는 이들을 죽였다. 전쟁터에선 양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고, 죽은 자는 누군지도 모를 이의 발에 밟혀 제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계책을 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적군과 아군에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업보가 바로 이런 식으로 내게 돌아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씨엘! 정신 차려 봐. 응? 씨엘!”

씨엘을 붙잡은 채 주저앉은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피…….”

“정신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눈 감지 마. 알겠지?”

“라피…….”

항상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로 나를 보던 씨엘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눈동자에 얇은 막이라도 씌워진 듯 약간 흐리멍덩해 보였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아…….”

화살을 뽑아야 했다. 한데 그 와중에 적의 화살이 이쪽을 향해 집중적으로 쏘아졌다.

“고모, 내가 막을게. 막을 테니까…… 미안해. 우리가 고모를 엄호했어야 했는데.”

에이든이 자책을 하며 급히 실드를 쳤다. 실드에 맞은 화살이 튕겨 나갔다. 그걸 본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숨결이 서서히 꺼져 가는 씨엘을 꽉 보듬었다.

“라피 아가씨, 제가 화살을 뽑겠습니다. 혹시 치유 마법 가능하십니까?”

“네!”

사실대로 말하면 아니오, 였다. 광범위한 곳을 한 번에 휩쓸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윈드 스톰을 사용했다. 당연히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 있었다. 하지만 급히 이곳으로 달려온 얀 경의 말에 바로 대답을 했다.

“화살에 독이 발려 있던 것 같습니다. 상처 부위가 까맣게 변했습니다.”

독이 발린 화살을 사용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내가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텐데 수인족인 씨엘이라서 가까스로 목숨만은 부지하고 있는 듯했다.

“얼른 뽑겠습니다. 그러니 바로 마법을 사용해 주십시오.”

독이 묻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뽑는 게 나았다. 얀 경이 이를 깨물며 심호흡을 하더니 화살대를 잡고 경고도 해 주지 않고 바로 뽑았다.

“으읏!”

화살촉엔 씨엘의 살점이 붙어 있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새하얀 기운이 맺히더니 씨엘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한계에 이르렀다. 이대로라면 좀 힘들 것 같아 팔찌를 잡았다.

마나를 한계까지 사용하면 기절시켜 버리는 팔찌였다. 이걸 벗기면 내 생명력을 쥐어짜서라도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팔찌를 풀어내려 하자 씨엘이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에 나도 고개를 저었다.

팔찌를 벗기지 못하게 막는 씨엘과 어떻게든 팔찌를 벗기려는 나는 약간의 실랑이를 했다.

“안 돼…… 난 라피가 생명을 짜내는 거……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

“그럼 눈 감아!”

“언제는, 눈 뜨라며…….”

“잠깐만 눈 감아. 그리고 눈 떠. 알겠지? 그러니까 얼른 손 놔. 그래야 널 살릴 수 있어.”

내가 고개를 저었지만, 씨엘은 절대 손목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화살을 뽑은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는데 말이다.

“라피, 나를 사랑한다면…… 빼지 마.”

“나를 사랑한다면 손 놔. 너를 살려야 사랑을 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잖아!”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씨엘의 손을 억지로 풀게 하려고 힘을 줬다. 하지만 씨엘의 손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씨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이제야 아버지 심정이 뭔지 알 것 같아…… 지금 나, 너무 안심이 되고 좋아. 무사한 라피를 보니까…….”

“그런 건 살아서 실컷 봐. 내 옆에서 지겨울 정도로 보라고. 그러니까 제발 손 놔. 응?”

고집쟁이 씨엘은 끝끝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두 눈에 힘을 줬다. 바르르 떨리는 손끝처럼 그의 심장도 아슬아슬하게 떨리는 듯했다. 단 한 번도 이 심장이 멈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내 소원이야…… 예전에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한 거…….”

예전에 실베스터 왕국에 갔을 때 나를 대신해 검을 맞은 씨엘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고 한 기억이 났다. 한데 하필이면 그 소중한 소원을 이런 곳에서 쓰느냔 말인가.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까스로 쥐어짠 씨엘의 미소에 나는 심장이 으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심장이 아프지만, 그걸 달래 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흐릿해진 씨엘의 미소처럼 그의 심장이 서서히 멎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잃을 각오를 하고 최대한 마나를 쥐어짜 계속 치유 마법을 걸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할아버지가 주신 팔찌 때문에 기절할 것이다. 한데. 당장 씨엘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애가 타들어 갔다.

“고모, 내가 도와줄게.”

이쪽으론 이제 더 이상 화살비는 날아오지 않았다. 실드가 필요가 없어지자 에이든이 급히 나를 대신해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 갔지만. 중독은 치유 마법으로 중화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독이 더 번지는 것을 막을 뿐이었다.

“라피…… 만나서 너무 행복했어……고마워…….”

“씨엘로 루피노! 넌 아직 살아 있어. 제발 과거형으로 말하지 마. 그러니까…….”

곧 꺼져 버릴 것 같은 씨엘의 숨결이 흐트러졌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나는 무작정 씨엘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라피…….”

굳은살이 잔뜩 박인 커다란 손이 가까스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마저도 금방 떨어질 것 같자 얼른 그의 손을 내 손으로 감싸 얼굴에 있는 온기를 건넸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럼, 알지……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단순히 저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목숨 걸고 나를 지킬 리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만 보던 씨엘은 안도의 미소를 가까스로 지었다.

“라피…….”

“응?”

“사랑해…… 진심으로…….”

“으, 응…… 나도 사랑해…….”

목이 메여 미칠 것만 같았다. 꽉 막힌 목구멍 사이로 겨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한 나는 씨엘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끝내 결혼해 달라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씨엘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무언가가 맺혔다. 내 눈에 고인 눈물이 떨어져 씨엘의 메마른 눈 주위를 적셨다. 이대로 가다가는 씨엘이 죽을 것만 같았다. 

숨마저 제대로 쉬지 못하는 씨엘의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변했다. 씨엘은 목숨을 바쳐 나를 살렸지만 정작 나는 내 목숨을 걸고 그를 살리지 못했다. 

바람결에도 숨결이 쓸려 갈 것 같은 씨엘의 두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씨엘을 꽉 붙잡을 뿐이었다. 이대로 씨엘을 보내 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이대로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낼 수 있겠어…….”

눈 좀 떠 보라고 하소연할 때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안 그래도 눈물 때문에 흐릿하던 씨엘의 모습이 어둠에 파묻히자 슬쩍 고개를 들었다. 루카스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나와 씨엘을 봤다.

“신파 연극도 좋은데 말야. 더 기다려 줄까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도 적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그들을 놔둔 채 이곳으로 말머리를 돌린 루카스가 평소처럼 말하더니 급히 신성력을 사용했다.

검게 변했던 피부가 제 색으로 변했고 상처가 아물어 갔다. 마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의 치유력에 나는 씨엘의 파리한 얼굴을 쓸어 만졌다.

“씨엘, 이제 괜찮아. 괜찮을 거야.”

씨엘을 다독이던 나는 앞을 봤다. 내가 바람의 방향까지 설정해서 움직였던 윈드 스톰이 소멸하자 불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군도 집어삼킬 정도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파이퍼가 있는 쪽으로 소리쳤다.

“이제 불 꺼뜨려! 얼른.”

내 외침에 파이퍼와 주위 마법사가 마나량을 증가시켜 주는 스크롤을 찢으며 외쳤다.

“워터 샤워!”

밤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에서 굵직한 비가 쏟아졌다. 메마른 대지에 소나기가 내렸지만, 쉬이 스며들지는 않았다. 마른 대지 위를 겉돌 듯 제멋대로 뭉쳐 흘러내린 빗물은 화마를 잠재웠다.

허연 연기와 새까만 재, 그리고 죽은 이들로 가득한 평원을 뒤로한 채 나는 씨엘을 봤다. 아까완 달리 호흡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라피, 내가 보기엔 너를 치료해야 할 것 같아. 루피노 경이 보면 놀라서 기절하겠어.”

“그게 무슨…….”

“입속 살 깨물었지? 입가가 온통 피범벅이야.”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내가 입 안쪽을 깨문 채 힘을 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루카스가 말하자 그때야 아픔이 밀려왔다.

씨엘을 치료한 루카스가 이번엔 내 입술 위에 손을 올렸다. 청량한 기운이 맺히더니 순식간에 입안으로 스며들었고 아픔이 서서히 가셨다.

“루카스,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우리 형님한테 라피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니까 말이야. 난 이제 수습하러 가 봐야 하니까 루피노 경은 라피가 돌봐 줘.”

불이 꺼졌으니 이제 뒷수습을 해야 하는 루카스는 픽, 웃더니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평원 쪽으로 향했다.

에이든과 다른 남자의 도움을 받아 씨엘을 내 막사에 눕혔다. 구멍난 옷을 갈아입힌 후 몸을 닦아 주려고 하자 에이든이 제가 하겠다고 먼저 나섰다.

씨엘이 묵는 막사에서 옷을 가져온 에이든은 곧장 클리어 마법을 사용해 더러운 것을 씻어냈다. 옷을 갈아입힌 씨엘의 곁에 앉은 나는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진 것을 다시 확인한 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있으면 깨어나겠지 싶어 곁에서 간호했지만, 씨엘은 곧장 깨어나지 않았다. 며칠간 애가 타들어 갈 때 소식을 전해 들은 미네르바와 아빠가 급히 이곳으로 달려왔다.

“아, 아빠, 예, 예쁜 언니, 아니, 루피노 공작님…… 씨엘이 저를 구하고 그만…….”

아빠와 미네르바를 보자마자 애써 막아 놓은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미네르바가 나를 안아 주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괜찮아. 저 녀석이 내 말은 제대로 이행한 듯하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목숨 바쳐 구하는 게 우리 집안의 유전이란다. 그러니 죄책감 느끼지 말렴.”

그 말을 들었음에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감정에 복받쳐 어쩔 줄 몰라 할 때 아빠가 씨엘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씨엘로 루피노…….”

나직한 목소리로 씨엘의 풀네임을 불렀다. 하지만 씨엘은 아빠의 부름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노려본 아빠는 팔짱을 끼더니 음산한 어투로 말했다.

“셋 셀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라피를 황태자와 결혼시키겠다. 하나, 둘…….”

나를 구하고 의식이 없는 씨엘에게 할 소리인가 싶어 아빠에게 한소리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애타게 부를 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씨엘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저 일어났습니다. 아버님! 라피와 결혼하는 거 허락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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